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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작품: 슬픔의 뒷면에서 그를 기다릴 때 (작가: , 작품정보)
리뷰어: 루돌프, 18년 4월, 조회 116

이 이야기는 뮌하우젠 증후군을 앓고 있는 나(재우)가 과거의 상처를 마주하고 연인인 민세를 기다리는 내용이다. 퀴어라는 소재를 다룰 때는 그것을 특별하게 취급하지도 그렇다고 무심하게 다루지도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퀴어 중에서도 동성애는 이제는 많이 찾아볼 수 있는 소재가 되었다. 그것은 동성이라는 조건이 자아내는 긴장감은 여타의 소설과 다른 긴장의 층위를 형성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작에도 나와 있듯 왜 퀴어물에는 죽음 혹은 불행이 수반되는 것일까. 그들의 삶이 편견과 억압 때문에 대체로 순탄치 못하다는 것을 반증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도 나와 민세는 나의 아버지를 칼로 찔러 죽이고 매장한다. 내가 곡도우미 일을 하러 간 장례식장의 고인 ‘민세(세희)’는 트랜스젠더로 자살을 했다. 나의 애인 ‘민세’는 퀴어문화축제에서 폭발에 휘말려 오른쪽 다리를 잃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앞에서 자살했다. 이런 극단적인 폭력의 장면들은 소수자들이 당하는 다양한 형태의 폭력을 보여줌으로써 약자의 입장을 가시화한다. 그러나 피해자들이 가해자를 죽인다는 전개방식은 그들의 폭력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해주지 않는다. 문제는 가해자와 똑같거나 극단적인 방식으로 맞서지 않고 어떻게 그들 스스로를 드러내고 인정받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답은 작품 안에 나와있다. 이 작품 안에는 다른 텍스트들이 많이 인용되고 있다. 영화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바비를 위한 기도’, ‘캐롤’이, 연극은 ‘미저리’가, 작가의 다른 작품인 ‘자기에 담은’과 스티븐 킹, 정유정과 윤이형의 소설, 씨야와 SG워너비의 노래가 언급된다. 단순히 취향에 따른 작품들의 나열일수도 있겠지만 특정 작품들에는 이렇게 구체적으로 언급될만한 의미가 부여되어있다고 보인다.

먼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보자. 이 영화는 두 청년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짧은 사랑을 나눈 후 이별하는 내용을 그리고 있다. 관객은 여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겪는 첫사랑을 통해 성장하는 주인공을 보게 되는데 이 영화에서 두 사람의 사랑을 평범한 인간의 사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붙잡아 두는 데에는 엘리오의 부모님의 공이 크다. 그들은 상대가 누구이건 간에 아들의 선택과 사랑을 응원한다. 엄마는 올리버와 헤어지고 무너져내리는 아들의 전화를 받고 군말없이 엘리오를 데려오고, 아빠는 그저 상대와 사랑했던 감정을 잘 갈무리하여 간직하라고 충고한다.

‘바비를 위한 기도’도 자신의 호모포빅 때문에 아들을 잃은 엄마가 뒤늦게 바비가 지옥이 예비된 죄인이 아닌 그저 자신의 아들, 게이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물론 이 소설이 이런 영화들처럼 오해가 없거나 화해로 나아가는 백일몽과 같은 작품이었으면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고통받는 등장인물들의 입장과 반대되는 작품들이 언급되다보니 이 작품이 그 자체로 이야기가 아닌 메시지를 강하게 담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이 밖에 언급된 텍스트들도 마찬가지다.

그 밖에는 이런 메타텍스트들과 명사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재고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앞서 말했듯 구체적인 텍스트들이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느낌을 준다면 몇몇은 가려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상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강점이지만 이것은 영화가 아닌 소설이다. 독자에게 인물이 담긴 장면을 자세하게 보여줄 순 있으나 그 탓에 독자가 장면, 나아가 이야기의 빈틈을 채워갈 여지는 빼앗겨버린다. 인물의 생각과 행동을 빠르게 실어나르는 단문에 힘이 있으니 묘사에서는 힘을 빼고 다소 거친 그림을 보여주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른 작품을 읽거나 쓸 때 퀴어를 소재로만 소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여전히 퀴어는 몰이해와 많은 폭력들에 직면해 있고, 아쉽게도 자신의 존재의 정당성에 대해 그들 스스로가 끊임없이 인지하고 피력해야하는 입장에 서 있다. 작가는 이것들을 어떻게 보여주고 물음을 던질지 고민한다. 그 기본이 되는 것은 퀴어도 다른 사람들과 다를게 없는 똑같은 인간이라는 인식이다. 그들의 고통이나 불행은 퀴어여서 겪는 것이 아니라 퀴어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서두에 언급했듯 이 작품은 가정폭력으로 인위성 장애를 앓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나’의 피부질환, 결벽증세, 자위행위 등이 관련 증상에 해당될 것이다. 가정폭력과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주변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고통은 이런 인위성 장애를 불러일으킨다. 면회를 갈 때 만난 민세가 말라간다는 사실은 그도 역시 어떤 형태로든 장애를 겪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이 인위성 장애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기저에 있는 정신질환의 원인을 마주하고 극복해야 한다. 작품에서는 아버지를 죽이는 극단적인 방향으로 실행되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또 다른 기폭제가 되었다. 아버지라는 존재를 현실에서 지울 수는 있지만 아버지의 폭력은 기억속에서 되살아나 주인공을 괴롭힌다. 작품에서 이 증상의 완화는 떨어져 있는 서로에게 기대고 ‘내일’을 생각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나’는 아버지를 죽인 죄로 복역하고 민세에게 면회를 갈때마다 울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이르러 더 이상 울지 않는다. 특이하게 작중에서 ‘나’는 장례식장에서 곡도우미 일을 한다. 구체적인 설정은 나와있지 않지만 돈을 받고 상주를 대신해 곡을 하는 모양이다. 곡도우미란 일은 울어야 할 사람이 감정을 억누르고 있어 그것을 표출하는 방법을 잃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시대에서는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가능할 리가 없다. ‘나’는 이 일을 하면서도 울음이 나오지 않아 아프기만 했지만 작품이 진행되어가면서 자신의 애인과 이름이 같은 망자, 그의 어머니를 보고 전염되어 운다. 그리고 공허한 자위행위만을 하던 나는 노래방에 들러 스스로를 위한 비가를 부른다. 그것은 그의 연인에게도 위로를 줄 것이다. 이것은 엘리오와 올리버가 했었던 것과 같은 평범한 두 인간의 사랑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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