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제 (약간 제멋대로의 기준으로) 비판적인 이야기를 써 보겠습니다.
‘알고보니 가상현실’ 류의 이야기는 그리 새롭지 않습니다.
거의 20년전 영화 ‘매트릭스’가 이런 류의 이야기를 일반인에게 널리 퍼뜨렸고, 비슷한 시기에 ’13층’이라는, 좀더 설정을 비튼 영화가 나왔습니다. 그 전후로도 좀더 나왔던 것 같은데 더 기억은 안 나네요.
‘알고 봤더니 내가 가상 인물이야’도 어디선가 본 것 같습니다. 심지어 적어도 30년은 넘은 만화에서 비슷한 설정을 본 것 같기도 합니다. 마징가Z 원작자 나가이 고의 작품이었던 것 같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서로 전쟁을 하고 있는데, 알고 보니 나도, 나와 사랑하기 시작한 여성도 다 전쟁 테마파크의 전투용 안드로이드였다는 그런.
이 소설에서 색다르다고 할 만한 걸 찾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물건이 복제되는 버그가 가상세계 인물들이 진실을 아는 계기가 된다.
2. 주인공이 서번트 증후군이라, 사태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다르다.
1.은 작가분이 온라인 게임에서 흔히 발생하는 아이템 복제 버그에서 힌트를 얻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좀 아쉽습니다.
우선, 복제와 관련한 메카니즘을 과학자들이 밝혀내는데, 그걸 증명하는 데모를 할 때 복제가 아니라 융합 비슷한 걸 데모합니다. 일종의 물체 융합 장치를 만들어낸 건데, 그게 어떻게 복제 현상에 대한 설명이 되는지, 또 세상이 코드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에 대한 증명이 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라면 극중 인물들처럼 쉽게 설득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건 오히려 클리셰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아이템 복제라는 굉장한 현상을 발견하고 그걸 재현하는 장치를 만들어내는 전개라면 (소설에서는 좀 다른 장치를 만듭니다만), 그것만으로 만족하는 과학자들만 등장시킬 게 아니라 그걸 악용하는 인물이나 세력도 나왔으면 좀더 흥미롭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실제 온라인 게임에서도 많이들 그러잖아요. 그러다 계정 정지 먹고. 이 소설에서는 그 버그가 존재하는 걸 알아낸 사실만으로 ‘계정’이 삭제되지만 말입니다.
‘우리는 프로그램 속의 코드에 불과하다’는 말에 대해서는… ‘우리는 프로그램 속의 데이터에 불과하다’가 더 적절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시스템 제작자가 그냥 무지막지하게 모든 인물들을 하드코드한 걸까요? 코드라는 말을 ID라는 의미로 쓴 것 같기는 하지만, 코드라는 말이 프로그램 코드(그러니까, 프로그램 덩어리 자체)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아서 말이죠.
사소한 궁금증. 제가 주인공이었다면 두 지우개 중 하나를 들고 한 번 사용해봤을 것 같아요. 나머지 한 개의 지우개도 똑 같이 달아 없어지는지 보려고. 같이 달면 링크이고, 달지 않으면 복제겠죠. 소설 본문에는 복제품이 진짜 가짜인지를 어떻게 가려내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는데, 이런 걸 이용하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그냥 다른그림 찾기 방식으로 찾아낸 걸까요?)
이제 2. 서번트 증후군에 대해.
읽을 때는 색다르고 괜찮았지만, 읽고 나서는 찜찜해지더군요.
이건 서번트 증후군을 가진 사람들을 조롱하는 이야기가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작가분의 의도는 그렇지 않았겠지만, 그렇게 읽힐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좀 위험해 보입니다.
여기까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