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개인적 이야기가 많이 가미된 감상형 리뷰입니다.
지금으로부터 6-7년 전쯤, 저도 취업을 준비한 적이 있었습니다. 다트에 올라온 보고서를 기반으로 기업 분석을 하고 인사팀에서 근무하는 선배들에게 제가 쓴 자소서(라고 쓰고 자소설이라고 읽지요)를 보내 첨삭을 받았지요. 혹시나 면접이라도 잡히면 그 회사에 다니는 선배를 수소문해 전화를 걸어 사내 분위기를 물어보기도 하였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면접 복장 때문에 정장도 사고 검은 구두도 샀지요. (이때만 해도 저는 집시 같은 옷을 입고 다녔기에 면접에 적합한 정장이 정말 단 한 벌도 없었습니다)
하나 더 말하자면, 면접 당일에 헤어메이크업을 따로 받기도 했습니다. 저는 화장도 잘 못하고, 머리카락도 반 곱슬이라 매우 부스스하거든요. 평소 고데기는커녕 드라이기도 쓰지 않다보니, 정말 답이 안 나오더군요. 면접 때마다 다 받은 건 아니랍니다. 인맥으로 알음알음 영업을 하는 곳에서 받은 거라 값이 싼 곳이었지만, 그래도 취준생에게는 큰돈이었으니까요. 외모를 특히나 많이 본다는 모 항공사 면접 때만 큰맘 먹고 돈을 들여서 받았죠. 심지어 2차 면접까지 있는 바람에 두 번이나 받았습니다. (허나 최종에서 탈락했습니다.. 면접비도 안주는 회사였는데 엉엉 땅콩항공 내 돈 돌려줘) 스튜어디스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는 의문이 제 머릿속에 가득 찼지만, 다들 그렇게 하고 온다는 선배의 말에 어쩔 방도가 없더군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뭐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 싶지요? 네,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겪어보니 그렇지 않더군요. 모두들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혼자 “노”라고 외칠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취업이니까요. 나 혼자 좋다고 될 일이 아니라 남의 눈에도 좋아보여야 하는 일이지요. 그래서인지 [붉은 구두가 아니어서] 속 “그녀”의 이야기가 남 이야기 같지가 않더군요. 예전의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았거든요. 물론 취업은 남녀불문하고 힘들지요. 절대 남자라고 해서 다 취업이 쉽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최고의 스펙은 남자”라는 우스갯소리가 괜히 나온 말은 아니니까요.
아래에 제가 쓸 내용들은 [붉은 구두가 아니어서]의 “그녀”가 겪었을지도 모르는 이야기들을 나열해 놓은 것입니다. [붉은 구두가 아니어서]를 읽으면서 떠올린 저의 모습이 될 수도 있구요.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 경험이 들어간 내용이기에 일부분만 공감이 될 수도 있고 아예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누군가의 삶이기에, 저런 삶도 있다니!라고 생각하며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도 “그녀”처럼 검은 구두를 신고 검은 정장을 걸치고 풀 메이크업을 한 채로 면접을 본 적이 있습니다. 다만 집으로 귀가한 적은 없었습니다. 매번 학교로 돌아갔지요. 매일 저녁에 취업 스터디가 있었거든요. 하루는 면접이 끝난 뒤, 발이 너무 아파 학교까지 가지 못하고 학교 근처 맥도날드에 들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아파트로 이어지는 산책로에 있는 벤치에 앉아 구두를 벗고 잠시 휴식을 취했던 “그녀”처럼요. 물론 발이 아픈 이유는 “그녀”와 같았지요. 다만 저는 피가 날정도로 발에 상처가 나서가 아니라 굽이 있는 구두에 익숙하지 않다보니 도저히 걸을 수가 없어서였습니다. 학교에 있던 여자 후배를 불러 함께 아이스크림을 씹어(!)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지요. 면접관이 이렇게 말을 하며 압박 면접을 했다. 면접관 중에 여자는 한 명도 없더라. 면접 전날 같이 면접을 보러가는 남자선배가 나보고 넌 여자니까 쓸 데 없이 면접 준비하지 말고 그냥 얼굴에 마스크팩이나 붙이고 자라고 했다.
이때는 취업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디든 1승만 하면 열심히 다닐 거라고 생각했지요. 특히 마스크팩 운운했던 남자선배에게 너무 화가 나서 내가 꼭 합격해서 그 선배 코를 납작하게 해줘야지라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그래서였죠. 저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흘려 들었습니다. 취업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너무 강해 마음에 담지 않았던 거지요.
자기가 다니는 회사의 여자 대졸공채 비율은 5% 밖에 되지 않는다는 동기의 말, 출산을 앞둔 직원이 3개월 출산휴가를 쓰니 같은 팀 남자들이 대놓고 쌍욕을 했다는 여자선배의 목격담, 고졸 출신 여자 직원을 ‘여직원’이라고 폄하하며 호칭하던 남자선배의 말(그냥 여자인 직원을 칭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맥락을 보니 그게 아니더군요, 이때는 뭘 잘 모르는 나이였음에도 사실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인턴이 회식 자리에 빠질 수는 없다고 생각해 회식 2차까지 따라갔다가 유흥업소에 처음 가보게 되었다는 여자(!) 선배의 경험담까지. (여기 언급된 사례는 다 대기업에서 벌어진 일들입니다. 노동자의 인권이 그나마 낫다는 곳이죠… 여기에 여성인권은 포함이 안 되나 봅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에나 나올 것 같은 일들이 제가 겪게 될 현실일 거라고는 사실 전혀 예상치 못했습니다. 먼저 사회에 진출한 선배와 동기들의 말을 흘려 들은 거죠. 그때까지 제가 살아왔던 삶이 비교적 남녀가 평등한 삶이었기에(다행히 저는 남녀를 차별하지 않는 가정에서 자랐고, 제가 속했던 학과도 여자가 다수였거든요. 남자가 과대표로 당선된 경우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들이 맘에 와닿지 않았던 거지요.
여차여차하여 저도 취업을 하기는 하였습니다. 나중에 입사 후 인사팀 동기에게 들어서 알게 되었지만, 남자 지원자의 경우 경쟁률이 100:1도 되지 않은 반면, 여자는 400:1에 달했다고 하더군요. 이유는 단순합니다. 여자를 더 적게 뽑았거든요. 지원자들은 그걸 알 리가 없으니 비슷하게 지원을 하였구요. 입사 동기가 50명이 넘었는데 여자 동기는 저까지 달랑 세 명이었습니다. 성비만 들어도 뭔가 이상하다 싶지요? 어디 그 뿐인가요. 저는 부서에서 다나까 말투를 썼습니다. 밥도 상사가 먹기 전에 다 먹어야한다고 해서 매번 밥을 입으로 먹는 건지 코로 먹는 건지 모를 정도로 빨리 먹었구요. (점심식사는 항상 10분 안에 끝났습니다) 아, 이때 제가 채식주의자였는데, 채식을 한다는 이유로 상사에게 혼이 났습니다. 회식 때 신입 주제에 쌈을 싸먹는다는 이유로 한 소리 들은 적도 있지요. 술이 약하다고 혼난 적도 있었습니다. 이건 성별을 떠나 모두에게 불합리한 문화였죠.
저는 이런 조직 생활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랍니다. 몇 달 더 버티다가 조용히 퇴사하고 나갔겠지요. 하지만 저는 조용히 퇴사하고 나가지 않았습니다. 제법 큰 소란을 만들고 나갔지요. 이유는 단순합니다. 알고 보니 특정인에게만 불합리한 문화였거든요.
제가 다녔던 회사는 물류회사였습니다. 해외지사가 130개가 넘었지요. 대졸공채 직원의 3분의 1 이상이 해외 주재원으로 나간다는 곳이었습니다. 저도 언젠가는 해외 주재원으로 나갈 수 있겠지라고 생각하며 꾹 참고 다녔습니다. 남자 선배들이 꾹 참고 다니는 이유도 다 주재원 파견 때문이었습니다. 근데 인사팀 동기가 이야기 해주더군요. 여자가 해외지사로 가려면 퇴사를 하고 현채직(비정규직인데다가 연봉과 복지의 차이가 매우 큽니다)으로 가야 한다구요. 이제껏 여자 주재원은 단 한 명도 없다구요. 차라리 원래 꿈이었던 공부나 계속 하라고 하더군요. 아무리 회사에 자신을 맞추며 살아도 여자에게 주는 보상은 없다는 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생각해보니 아무 것도 모르는 제가 보기에도 이상한 게 좀 있었습니다. 여자에게만 커피 심부름을 시켰고(저한테도 한 번 시킨 적이 있었는데 물 조절을 못해 너무 맛이 없어 다시는 시키지 않았습니다), 막내들이 도맡아서 하는 정산 업무도 여자 막내에게만 시켰습니다. 알고 보니 여자 신입이 입사하지 않자(정확히는 못하자) 후임이 없어 정산 업무를 10년간 한 여자 과장님도 있더군요.
입사한지 몇 달 만에, 심지어 동기장이(제가 21기인가 22기였는데, 이제껏 동기장이 여자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하더군요), 그것도 1빠로 퇴사를 한다니 논란이 되긴 했나봅니다. 퇴사 사유는 당연히 사내에 만연한 남녀차별이었고 사내 시스템으로 작성된 퇴사 사유를 고치라는 압박을 받았으나 전 고치지 않았습니다.
퇴사를 앞둔 저에게 같은 팀 여자과장님이 고백을 하시더군요. 임원에게 성희롱을 당한 걸 다 녹음해서 보관하고 있다구요. 퇴사하는 날에 신고할 거라고 하더군요. (대신 동종 업계에 취업하는 건 포기해야합니다) 근데 막상 회사에서는 여자 과장이 꽃뱀이라고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남자 임원에게 잘 보여 아직까지 살아남은 거라구요. 여자가 (심지어 성희롱까지 당하며) 회사에서 살아남아 과장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만으로도 꽃뱀 소리를 들어야한다니. 저는 그 뒤로 다시는 취업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차라리 창업을 했으면 했지, 도저히 못 다니겠더라구요. (여담으로 제가 퇴사한 뒤 여자에게만 커피를 시키는 일이 사라졌다고 하더군요. 대신 빨갱이 입사 금지령이 내렸다고….)
그렇다고 해서 지금 제가 해답을 찾은 것은 아닙니다. 빨간 구두를 신고 뒷굽을 세 번 부딪혀 자기가 가고 싶은 곳 어디로든 갈 수 있는 건, 동화에나 나오는 말이니까요. 우리가 신은 구두는 붉은 구두가 아니라 우리의 피가 묻은 구두일 뿐이지요.
아, 그리고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인데요. 원래 [오즈의 마법사]에서 동쪽 마녀가 신은 신발은 빨간 구두가 아니라 은빛 구두였죠. 일부 사람들이 [오즈의 마법사]를 금본위제와 은본위제에 관한 이야기로 해석하는 이유가 은빛 구두(은), 황금 길(금), 에메랄드 씨티(달러)에서 드러나는 상징 때문이니까요. [오즈의 마법사]의 구두가 은빛에서 루비가 박힌 붉은 색으로 바뀐 건 영화로 만들어지면서입니다. 1939년도인가 그렇지요. 근데, 왜 하필 붉은 색이었을까요. 물론 컬러촬영이 가능하기에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였겠죠. 은색보다는 붉은 색이 더 시선을 사로잡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안데르센의 동화인 [빨간 구두]가 떠오르더군요. 욕망을 상징하는 ‘빨간 구두’를 부정하는 매우 교훈(?)적인 테스트지요.
그래서인지 저는 [오즈의 마법사]도 좀 다르게 보이더군요. ‘사악한’ 동쪽 ‘마녀’가 신은 건 ‘붉은’ 루비 구두. 마녀를 깔아뭉개 죽인 건 도로시의 ‘집’이죠. 구두를 얻은 도로시는 어디든지 갈 수 있지만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구두의 마법을 사용하구요. 거기다 모험을 끝내고 (심지어 모험의 동기가 자아 찾기가 아니라 가족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였죠) 가족으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오즈의 마법사]는 매우 보수적인 텍스트로 읽혔습니다.
[붉은 구두가 아니어서]의 그녀가 붉은 구두가 생긴다면, 그녀는 어디로 갈까요. 집을 택한 도로시와 달리, “냉랭한 기운만 감도는 집”은 확실히 택하지 않겠지요. 그녀와 고양이가 “따뜻하게 위로받을 수 있는 장소”는 과연 있는 걸까요?
신고 있는 신발이 붉은 구두가 아니기에 우리는 알 수가 없겠지요. 별 수 있나요. 어디든 떠날 수 없다면, 주변의 풍경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바꾸는 수밖에요.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이곳을 바꾸면 그녀는 피를 흘리면서 불편한 검은 구두를 신을 필요가 없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