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세계의 情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하모 하모 (작가: 문낭호, 작품정보)
리뷰어: 코르닉스, 18년 3월, 조회 77

게으른 감상입니다.

스포일러 있습니다.

 

 

 

주저리주저리 감상을 적기 전에 먼저 말하자면, 저는 애완동물을 기르지 않는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물론 모니터 너머로 애완동물의 귀여운 면면을 보는 건 좋아하지만 정작 마주하면 굉장히 어색합니다. 그래서 애완동물을 어떤 감정에서 기르는지 모릅니다. 귀엽고, 집에 오면 반겨주고, 자신을 따른다는 이유 만으로 한 생명을 기르는 건 저에게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애완동물을 기르는 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기른다는 건 상상도 되지 않습니다. 작품 내의 할아버지도 그런 삶을 살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할아버지는 친구의 유품으로 하모라는 작은 로봇 강아지를 데리고 오면서 바뀌게 됩니다. 최신 기종보다 움직임도 어색하고 건전지가 많이 소모하는 구형 로봇 강아지입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돈과 시간을 들여 구형 하모를 수리합니다. 어째서 할아버지는 하모에게 빠지게 되었을까요?

 

작품은 구형 하모를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보여줍니다. 하지만 답하지는 않습니다. 점점 질문이 쌓여갑니다. 왜 할아버지는 하모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왜 할아버지의 친구는 하모를 할아버지에게 주었을까. 왜 할아버지는 ‘나’에게 하모를 주었을까. 왜 친구는 하모를 살펴보곤 살 수 없다고 했을까. 왜 나는 그리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하모를 팔지 않고 있었을까. 무엇 하나 속 시원하게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저 보여줄 뿐입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정()입니다. 이 단어는 ‘나’의 시점에서는 직접 언급되지 않습니다.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서 등장합니다. 등장인물들은 수많은 궁금증과 모순을 정 하나로 납득합니다. 그렇다면 소설에 나오는 정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면 등장인물들의 의문가는 행동들이 이해가 가지 않을까요? 하지만 이 문제도 그리 쉽지 않습니다. 정은 무엇일까요? 정말 답하기 쉽지 않습니다. 특히 저처럼 교양 이상 배우지 않은 사람은 더더욱 그렇고요.

 

제가 소설을 읽으면서 떠올릴 수 있었던 건 정이 더욱더 개인적인 감정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자동차나 지역에도 정을 붙인다는 표현을 쓰는 걸 생각하면 상대와 소통할 수 없어도 심지어 그게 생물이 아니라도 정을 붙이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조금 비약하자면, 정은 대상에게 자기 마음의 일부를 두는 거라 할 수 있습니다. 상대가 어떻든 별로 상관없고요. 그리고 그게 가능하다면 생물이나 로봇이나 별 차이는 없을 겁니다. 하모의 실제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의 로봇 강아지 아이보도 노인들에게는 가족처럼 취급받고 장례식도 치렀으니까요.

 

오히려 <진짜가 아니라서 더 그래.>라는 친구의 문자는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살아있지 않은 로봇이기에 오히려 더 많은 정을 붙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 그것입니다. 살아있다는 건 독립적이라는 소리입니다. 아무리 개가 인간에게 순종적이라고 해도 어디까지나 개는 인간과 독립적인 개체입니다. 저번 감상에서도 적었지만, 자신의 일부가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갈등이 생기겠죠. 하지만 하모는 다릅니다. 돌발적인 행동은 하지 않습니다. 로봇 강아지고,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쏟아부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기에 오히려 살아있는 애완동물보다 더욱더 정을 붙이기 쉽고 마음을 쏟은 게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나’의 친구가 사지 않는다고 단언한 것도 그걸 알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부품도 생산되지 않는 하모가 관리가 이 정도로 되어있다는 소리는 보통 정성이 들어간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을 테니까요. 그건 나의 하모가 아니라 타인의 하모일 뿐입니다. 이미 하모를 키워본 친구는 알 수 있겠죠. ‘나’와 할아버지는 깨닫지 못했지만요. 아니, 어쩌면 마음 한구석에는 알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친구의 죽음이, ‘나’는 본가의 개인 로미의 죽음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더욱 정을 주기 쉬운 로봇 강아지에 손을 대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한 번 하모에게 정을 준 이상 버리지도 가만히 내버려 둘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다만 할아버지의 경우는 사십구재를 지켜보면서 하모에게 지나치게 정을 주었다는 걸 깨달았던 거 같습니다. 친구의 죽음도 그러한데, 이렇게 정을 준 하모가 사라진다면 할아버지는 슬픔을 견딜 수 있었을까요? 할아버지는 그런 자신이 없었던 거로 보입니다. 그렇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두려고 한 모양입니다. 결과적으로는 정의 또 다른 정의 희생자(?)를 만든 셈이지만요.

 

흔히 디지털 세계에는 아날로그가 지배하던 세계와는 달리 정이 없거나 정을 붙이기 힘들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거꾸로 디지털이기에 아날로그보다 더욱 마음을 주고 아끼는 그런 세계가 올 수 있다, 혹은 일부지만 이미 왔다는 걸 보여주는 이야기처럼 보였습니다.

 

PS. 말은 이렇게 했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저는 애완동물을 기르지 않았기에 전부 가정일뿐입니다. 어쩌면 살아있는 애완동물과 로봇 애완동물은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지도 모르지요. 그냥 애완동물을 기르지 않는 사람이 보기에는 이렇게 보였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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