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시작과 끝은 이렇다
빛이 있으라 신이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손님으로 돌아간다
이 유명한 성경의 변주는 우리가 돌아가는 곳이 현실계에 존재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SF라는 비교적 합리적 상상력에 기반한 장르의 결말이라고 보기에 미심적다. 소설 전반에 걸쳐 단 한순간도 종교적 이미지를 내비치지 않았던 사실에 미루어보면 더더욱 그렇다. 소설 안에서 ‘빛’은 지나치게 과학적인 언어로 설명되어 주인공이 거의 알아듣지도 못할 정도이다. 주인공이 알아들은 말은 기껏해야 ‘블랙홀은 생기지 않을거야’ 정도였다. 그것을 설명한 친구는 무지에 대해 지극히 냉소적이다. 빛을 보고 끙끙대는 건 기껏해야 기르는 개들이라는 말은 명백히 그것을 보고 감탄하는 동료들을 향한 비난이다. ‘빛’은 단순히 어떤 행성의 죽음이 ‘부산물’로서 배설하는 정보에 불과하다. 그것이 블랙홀이라는 위험인자를 만들어내는지 아닌지만이 그의 관심이다. 따라서 이 소설의 등장인물은 세부류로 나뉘어진다. 빛을 보고 끙끙거리는 자와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자, 그리고 주인공이다. 물론 주인공은 어느 쪽에도 속해있지 못하다.
우선 주인공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양극단의 두 부류에 대해 조금 더 말해볼까 한다. 이 소설은 지극히 연극적인 요소가 다분한데, 등장인물들의 전형성이 그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모든 인물들은 말하자면 과학적이거나, 비과학적이고, 과학적이건 비과학적이건 공통적으로 속물적이다. 그리고 이 속물적 경향이 소설 속의 사건들이 종교적색체를 띄는 것을 원천적으로 거부한다. 우주적 이벤트 앞에서도 등장인물들은 경건함을 갖지 못하고 기껏해야 미신적인 수준에 머물게 된다. 광속으로 우주를 넘나드는 미래 세계에서도 귀신이라는 소재는 흥미를 동하는 이야깃거리가 된다. 더구나 그것이 현실 안에서 모종의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하면 더더욱 그렇다. 양극단의 인물들은 흥미로서, 혹은 어떤 문제의 원인을 추적하기 위해 귀신이라는 미신적 실체를 목격하려 애쓴다. 그런데, 주인공은 이미 우주 귀신이라는 헤괴한 소문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제목의 ‘손님’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에 대한 단서가 있다.
무언가를 안다는 것. 무성한 소문 속에서 흥미, 혹은 문제해결의 실마리로서 그것을 목격해야 하는 사람들과 달리 그가 우주 귀신의 실체를 바라보는 것은 ‘확인’의 과정에 불과하다. 그것이 야기한 문제점에 대해서는 무지할지라도 이 광대한 우주의 어딘가에 자신이 유기한 시신들이 영원히 표류할 것임을 알고 있다는 것. 그것은 일종의 테두리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어딘가에 갖혀있다는 것. 어디를 둘러보아도 집 안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
그가 지구를 떠나 우주 장의사라는 SF적 직업을 갖게 된 것은 한계선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어디를 둘러보건 지평선이건 수평선이건 끝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두려워서 떠난 그가 무한히 넓다고 생각했던 우주에서 자신이 버린 시신과 마주하게 된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그 시신들은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어떤 한계에 대한 상징이다. 시신과 마주했을 때, 소위 ‘시간의 한계선’을 함께 마주해야 했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가 자신의 한계와 마주한 순간, 그가 지구에 남겨두고 왔던 모든 사건들(아내와 딸들)까지 한꺼번에 다시 그에게 몰아닥치게 된다. 그리고 그제서야 주인공은 자신이 떠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자신은 처음부터 집 안에 있었던 것이다.
자궁 안에 갇혀있을 때의 태아는 영적으로 충만하다. 거기에서 퇴거된 이후 공간적으로 넓어진 곳에서 인간은 여전히 갇힌채로 살아간다. 자유는 일종의 착각이다. 따라서 손님으로 돌아가는 것. 다시 우주의 자궁에 의식없이 심어진다는 것은 지극히 종교적이다. 단한번도 평안할 수 없었던 ‘나’의 마지막 표정이 얼마나 온화했는가. 나는 그가 들었을 신의 음성이 어땠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작가의 건필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