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신화의 시대, 하늘의 명을 받들어 곤륜을 지키는 호랑이가 있습니다. 여기에 천호로 불리는 한 여우가 사형을 언도받아 옵니다. 여우는 오랜 득도 끝에 경지에 올랐지만 금기를 어긴 죄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하늘인간이 되어 그 앞을 지키고 있는 문지기인 호랑이에게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한 여우 한 마리가 찾아옵니다. 자신을 천호의 아내라고 밝힌 여우는, 남편이 죄값을 받기 전에 한번이라도 그를 보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예전에 책에서 보았던 로맨스의 법칙 중에 그런 대목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을 갈라놓는 이야기가 로맨스라고요. 그러면서 작가가 하는 일은 두 사람을 끊임없이 떼어놓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너무 확신에 찬 문장이라서 당혹스러웠어요. 로맨스는 연애 이야기인데, 왜 저런 식으로 정의되어야 하는가 하고요.
하지만 생각해 보면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그랬던 것 같아요. 우리가 알고 있는 뛰어난 러브 스토리들은 모두 주인공들을 그렇게 떨어뜨려 놓았으니까요. 그 유명한 연애 영화나 소설들에서 주인공들이 정말로 알콩달콩하게 사귀고, 행복한 감정을 느끼는 시기는 얼마 되지 않아요. 나머지 순간들이 모두 고통과 수난으로 채워집니다. 그걸 쟁취하기 위해서 싸우고, 후회하고, 아파하는 이야기가 로맨스인 거에요.
‘찔레와 장미가 헤어지는 계절에’에서 주인공인 호랑이의 사랑을 가로막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짝사랑의 대상이 되는 여우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고요. 다른 하나는 여우의 소원을 자신이 들어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부분을 따지자면 종 차이라는 문제가 있지만 이건 의외로 장벽이 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들은 신선이고 상식을 초월하는 존재들이니까요. 여우는 사형 언도를 받은 남편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죽으면 따라 죽을 기세에요. 호랑이는 그녀에게 단호하게 구는 한편 동정심을 느끼지만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부분은 호랑이의 심리입니다. 호랑이는 이미 여우에게 마음을 빼앗겼어요. 그리고 그 뒤에 얽힌 속사정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여우가 저렇게 지극 정성으로 모시는 남편은 사실 두 집 살림을 한 바람둥이거든요. 심지어 그 쪽이 첩인 것 같고 애를 배기까지 했어요! 호랑이가 볼 때 여우의 남편은 그런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한데 여우는 그를 너무 깊이 사랑하고 있어요. 누구의 말로도 그녀의 마음을 돌리지 못할 정도로 그 사랑이 강합니다.
일부일처로 천년을 해로하는 건 도를 깨우친 여우의 미덕이니까요. 대단한 원칙주의자인 여우는 그걸 깰 생각이 추호도 없어요. 저는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만약 여우가 호랑이의 지극정성을 받아들여 마음을 돌린다면 호랑이의 사랑이 이뤄지는 걸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호랑이도 여우 못지않은 원칙주의자니까요. 그 무가치한 감정 때문에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여우의 고고한 성품 자체가 호랑이를 더욱 매혹시켰는걸요. 마음을 돌린다면 그건 자신이 사랑하는 여우가 아닌 겁니다.
그 결과 벌어지는 건 엄청난 캐릭터 학대입니다. ‘찔레와 장미가 헤어지는 계절에’는 거의 모든 내러티브를 고통의 감정으로 채우고 있어요. 여우는 남편을 만나지 못해 죽어가고 그를 바라보는 호랑이의 마음은 갈수록 찢어집니다. 둘의 사랑을 갈라놓는 게 작가가 할 일이므로 작가는 그들에게 행복한 시간을 허락하지 않아요. 사형 언도 날짜는 다가오고, 죽기로 작정한 여우는 나날이 말라갑니다. 호랑이는 그녀의 목숨을 간신히 붙여놓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그만큼 사랑의 감정은 더욱 강력하게 피어납니다. 아무리 애써도 본인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으니까요. 그게 이뤄지면 사랑이 아닌 거니까요. 호랑이는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겠지만, 보는 입장에서 이건 매우 괴로운 내용이면서 환상적인 러브 스토리이기도 해요. 종점으로 향하는 기차처럼 일방향으로 달리는 이야기 속에서 그 감정이 계속 커지는 걸 그대로 맞닥뜨리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대로 끝나면 너무 잔인하지요. 작가는 마지막에 일말의 가능성을 열어 놓습니다. 여우는 호랑이가 자신을 사랑한 걸 알고 있었어요. 현실에서 그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을 뿐이지요. 그 대신에 여우는 다른 생에서 만난다면 그를 사랑할 수도 있을 거라는 말을 합니다. 그게 호랑이에게는 유일한 희망이에요. 사라지지 않는 여우의 형체를 바라보며 그는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꿈꿉니다.
슬픈 결말이죠. 하지만 생각해 보면 해피 엔딩이기도 합니다. 누구도 훼손되지 않았으니까요. 여우는 아내로서의 도리를 다 했고, 호랑이는 그녀를 앞으로도 사랑해도 된다는 승낙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사랑할만한 대상이라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했어요. 이 이야기를 지켜보는 독자로서도 두 사람 모두가 무너지지 않는 아름다운 모양새로 남는 걸 지켜보았고요.
앞에서 저는 두 사람의 사랑을 갈라놓는 이야기가 로맨스라고 했습니다. ‘찔레와 장미가 헤어지는 계절에’는 아름다운 주인공들과 막대한 장벽, 그를 뛰어넘는 진심이 존재하는 명쾌하고도 강렬한 러브 스토리입니다. 단순한 줄거리이지만 저는 이런 이야기가 상당히 다루기 어려운 종류에 속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철저히 감정선을 중시하고 있는데다 끝이 정해져 있어서 조금만 어긋나면 이야기 전체가 다 무너지게 돼 있거든요. 거기다 호랑이는 심각한 츤데레라 자신의 마음을 대놓고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여우와 호랑이나 새 등이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신비의 세계에서 벌어지잖아요!
이 아슬아슬한 구도를 지탱해주는 건 작가의 이미지 환기력과 균형 감각입니다. 이 글은 미문의 극치라고 해도 될 만큼 극단적인 스타일을 보여주는데요. 만약 평이한 문장으로 쓰였다면 이렇게 강한 효과를 낼 수 없었다고 생각해요. 도 닦은 동물들이 인간의 모습으로 둔갑하고, 갖가지 도술을 부리며 격렬한 감정을 나누고, 찔레와 장미가 되어 영원을 기약하는 이야기를 온갖 수식을 곁들여 오랜 설화처럼 진지하고 장엄하게 들려주는 것입니다. 그런 미사여구로 가득한 문장을 찬찬히 따라가며 그 이미지들을 떠올리고, 기운에 압도되다 보면 그 감정을 믿을 수밖에 없어져요. 여우의 절절한 순정을 단번에 알아보았던 호랑이의 마음처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