찔레와 장미가 헤어지는 계절에

찔레와 장미가 헤어지는 계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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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내리고 하늘이 열려 하늘엔 열 개의 해가 이글거리며 계절 없이 뜨고, 하늘인간과 땅인간이 나뉘어 살아 달이 아직 생기지 않고, 사람과 짐승의 구별이 모호해 서로 말을 나눠도 뜻이 통하고 몸을 나누어 피가 섞여도 이상하지 않던 시절에—

“…다가오는 청화절(淸和節)에, 참형에 처한다.”

—하늘의 약초를 훔친 대가로, 죽을 날을 받은 여우가 있었다.

사람이 하늘에 탄원하면 하늘로 향하는 계단이 열려 소청(訴請)할 수 있던 시대다. 짐승이라 하여 요즘 같은 짐승일 리 없다. 이치를 알고 도를 깨우치면, 축생도(畜生道) 험난한 생의 끝에도 짐승의 형(形)을 벗고 신선이 될 수 있던 시대였기에.
여우는 천호(天狐)였다. 최초의 천호로 가장 먼저 하늘인간 꼴을 하고 하늘에 올랐다. 그러나 그것 뿐. 법은 하늘 아래 지엄했고, 여우의 죄는 너무 컸다. 여우는 타고 태어난 모습 그대로 곤륜에 감금당했다.
곤륜의 성은 이중삼중도 아닌 구중. 그 위엄만으로도 사사로이 입에 올릴 수조차 없는 곳이다. 하지만 그 굳건한 장소에, 천제(天帝)는 문지기까지 배치했다. 그 문지기는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사람 꼴을 띠었지만 애초부터 인간이 아닌 자였다. 먹지 않고 자지 않고 배설하지 않으면 죽는 인간이라 할 수 없었다. 먹고 마시지 않아도 되었고, 잠들지 않아도 되었다. 천제가 그를 귀히 여겨 쓰다듬어 누구보다도 축복받아 그리된 그런 자였다. 감시자였으되 처형자이기도 한 그의 이름을 육오(陸吾)라 한다. 다만 꼬리가 아홉이나 되고 본디의 형(形)대로 간간히 무심하게 얼굴을 드미는 그를, 하늘인간들은 그리 불렀다- 호형랑(虎形郞) 또는 호해랑(虎骸郞)이라고.

끝이 뭉뚝한 굵직한 창을 지팡이 삼아 하나 들고, 기분이 나쁘면 험상궂어지고 기분이 좋으면 심술궂어지는 큼지막한 얼굴을 들이밀며 잠도 자지 않고 딴청도 피지 않고 사납게 오는 이들을 막아대는 그 자리에, 장승마냥 붙박인 사내가 좋아서 찾아오는 이는 없었다. 다들 그를 두려워하거나 경외하거나 원망하거나 해치우고 싶어했고, 사내는 그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 형(形)은 사람이지만 천성이 어쩔 수 없는 짐승이기에 그렇다. 자신의 평가에 대해 신경 쓰는 맹수는 없다. 그런 걸 신경 쓰면 굶어죽기 십상일 터. 어차피 삼악도(三惡道)의 하나인 축생의 길을 걷고 있으니 그런 감정들 따윈 아무렇지도 않다. 그저 업(業)만을 조심할 뿐, 애먼 피만을 아낄 뿐.
그렇게 오늘도 사내를 향한 원망이 하나 더해졌다.

“문을 열어 주십시오.”

계집의 허리는 가늘어 주둥이를 묶어놓은 포대 같다. 몇날 며칠을 걸어온 건지, 신발이 다 해진 발엔 보얗게 먼지가 앉아 있었다. 그 먼지 색과 끝만 묶은 머리카락의 색은 맘먹고 아궁이를 쑤셔 뿌옇게 뒤집어 쓴 것 같은 잿빛이었다. 면과 마를 섞어 짠 직물을 솜씨 좋게 가다듬어 지어 입은 옷은 제법 그럴싸했으나, 사내는 계집이 멀찌감치 보일 때부터 그녀의 정체를 냄새로 알아낸 상태였다. 코가 쨍할 정도의 짐승 냄새.

“여우인가. 소청할 것이 있으면 괴광산(塊江山)에서 하라. 길을 잘못 들었다.”

짐승이 본(本)인 이들은 이 길을 쓰지 않는다. 인간들이나 곤륜의 언덕을 걸어 신선이 된답시고 이런 길에 들어서곤 하는 것을. 완연한 봄날이었던지라, 햇볕을 즐겨 한없이 늘어지고 싶은 호랑이의 본성대로 사내는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 위로 위로 올려다봐야 하는 큼지막한 얼굴에 그 좋은 기분이 어딜 봐도 드러나질 않는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사내가 심술궂은 얼굴로 퉁명스레 내뱉자 계집이 얼굴을 들었다. 저어 산 아래에서 피어날 민들레가 계절답게도 계집의 눈에도 피어 있었다. 노오란 눈, 천호(天狐)였다. 덕분에 사내의 심술궂은 얼굴은 급격히 흉악해졌고, 그 얼굴 위에서는 흉터들이 도드라졌다.

“통과할 수 없다. 돌아가라.”

신선의 길을 걷는 여우에게 어디에선들 하늘의 계단이 내리지 않을 리 없다. 사내를 마주보고 있다는 자체가 죄인이란 증거였으므로 사내는 불쾌해졌다. 불쾌한 심경을 담아 산 같은 어깨를 돌려 등을 보이며, 땅에 창자루를 콱 소리나게 꽂았다.
하지만 그 불쾌감 위를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듯 가냘픈 목소리가 얹혀졌다.

“먼 길을 걸어왔습니다. 보고 가게만 해 주시옵서.”

불쾌감이 짙어졌다. 한갓 죄인이 감히 탄원한다. 쫓을 것인가, 물어뜯을 것인가, 잡아먹을 것인가 – 잠시 고민하는 사내의 모습을 갈등의 증거라고 생각했는지, 다시 계집이 말했다.

“잡혀가신 지 달포가 넘었습니다. 여위진 않으셨을지, 소(訴)는 어찌 진행되고 있는지…….”

계집의 말이 끊겼다. 어지간한 사람 크기만 한 호랑이 머리가 계집이 있던 자리를 물어뜯었기 때문이다. 계집은 날랬다. 누가 여우 아니랄까봐, 팔딱팔딱 재주를 넘지 않아도 날랬다. 머리카락이 마치 굴뚝에 피어난 밥 짓는 연기처럼 허공을 휘저으며 날렸다.
여우가 비켜난 그 자리에 연기에 부채질하여 연기를 흩어내는 사람처럼 눈에 등불을 켠 호랑이가 크르렁 땅울림을 뱉었다.

“돌아가라, 죄인에게 들을 말은 없다.”

여우였던 계집이 박대에 구슬피 울며 발걸음을 돌렸다. 호랑이가 본(本)인 사내는 다시 큼지막한 사내의 모습으로 돌아가, 팔짱을 끼고 콧방귀를 뀌며 땅에 꽂은 창에 기대어 그 모습을 외면했다.

이후 며칠, 아무도 사내를 괴롭히지 않았다. 그저 흘러가는 구름을 보고, 바람에 나부끼려면 아직도 자랄 날이 먼 이제 막 돋아난 새순을 보고, 바람에 머리가 흩날리면 머리카락을 보고 그러다 머리카락 끝이 가리키는 날아가는 새들을 보고. 해가 지고 희미하게 별이 뜨면 별이 지다 해가 뜨고. 가끔 자정 무렵 캥캥 여우 우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때마다 발끈하던 것도 소리가 점차 멀어졌으므로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그랬었는데.
사내는 역시 팔을 하나 뜯어놔야 했었나 잠시 고민했다. 아니면 멱을 물어뜯어 하늘의 지엄함을 보였어야 했을지도. 본(本)이 발 빠른 짐승이라 날래긴 했지만 전력으로 쫓아가 본때를 보였다면, 지금 이렇게 마주하는 일은 절대로 없었을 것이다.
계집의 꼴은 그 며칠 동안 조금 더 처참해져 있었다. 처음도 고운 모습이라 하긴 힘들었던 터였다. 하지만 그때의 원인은 먼지가 다였다. 지금은? 전신이 다 흙투성이다. 무릎이 제일 심각했고, 소매가 엉망이었다. 치마도 절대로 정갈한 꼴이라 할 수 없다. 마치 진흙을 냇물 삼아 다듬이방망이 두드려 빨래라도 한 모양새였다. 사내는 눈살을 찌푸리다 문득 이 여우새끼가 배고픔에 근처 누군가의 무덤을 파헤치기라도 한 모양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덕분에 원래의 불쾌감에 혐오감이 더해져, 사내는 이를 드러내며 선전포고마냥 자신의 뜻을 전했다.

“죽여버리기 전에 돌아가라.”

그러나 고개를 숙인 계집은 두 손으로 치맛자락을 꼭 쥔 채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고선 입만 열었다.

“들여보내 주소서.”

제 목숨을 아끼지 않는 계집이다. 천호(天狐)의 수련은 최소 천년이다. 제 살을 아끼지 않고 제 혼을 깎아가며 정도(正道)를 원한다. 부정한 방법으로 도를 닦으면 제대로 된 사람의 모습을 얻을 수 없으므로, 그 모습은 공덕으로 쌓은 선력(仙力)이리라. 덕분에 불쾌감은 아까보다 더 거대해졌다. 그 긴 공덕과 그 긴 생을 이렇게 허투루 취급하려 하다니.

“그럴 수 없다. 말로 할 때 돌아가라!”

그 말에 계집이 고개를 들었다. 며칠 전에 비해 더 흉흉해진 눈이었다. 어쩐지 더 초췌해진 모습에 잠시나마 사내가 놀랐다. 그리고 놀람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 짧은 사이를 놓치지 않고, 자지도 않고 먹지도 않은 자의 얼굴을 하고 계집이 속삭였다.

“돌아가지 못하오. 보여주기 전엔 돌아가지 못하오. 소식도 하나 듣지 못하고 어찌 가오리?”

귀찮게 구는도다. 말할 기회를 주니 방만함이 도를 넘는다. 애먼 피를 흘리지 않으려 몇 번을 참았거늘, 이젠 그럴 수 없다 생각한 사내가 몸을 움직였다. 사내가 마음먹고 창을 뻗으면 그녀의 목이 데구르르 덱데굴 굴러 떨어질 터였다. 그러나 사내는 움직이던 것을 멈췄다. 여우의 울음 섞인 목소리, 그 목소리의 내용 덕이었다.

“며칠을 돌며 식음도 전폐하고 성벽을 파헤쳤소. 조금이나마 약해보이는 부분, 조금이나마 뿌리가 얕을 것 같은 부분을 골라 팠습니다. 굴 하나 파지 못하는 내가 어찌 1200년을 살아온 여우일 수 있소? 나는 성공치 못했소이다. 나를 들여보내 주소서. 살아 뚫어내지 못하면, 이 자리에서 죽어 혼령이라도 들어가 소식을 들을 것입니다.”

사내는 그제야 계집의 상태를, 차림을 이해했다. 땅을 판 건 맞았다. 목적이 달랐을 뿐. 실패를 원망하고 자신을 원망하는 여우를 보며, 잠시 사내는 안쓰러움을 느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불쾌감은 여전히 남아있었으므로.

“한갓 여우에게 뚫릴 성벽이 아니다.”

아래를 파면 아래가 깊어진다. 위로 기어오르면 위가 높아진다. 구중의 성벽은 신묘했다. 감히 아무에게나 하늘 길을 허락할 수 없기에 그토록 신묘했다.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린 사내를 향해 계집은 물기 묻어나는 목소리로 울상이 되어 외쳤다.

“잠시면 되오! 축지(縮地)로 날듯이 달음질쳐 뵙고 오리다. 문도 열 수 없는 하늘땅이니 이 벽 안에 들여만 보내 주옵시면 얼굴 뵙고 목소리만이라도 듣고 오겠습니다. 제발, 제발 부탁이오니 이 문 좀 열어 주십시오.”

축지도 쓸 수 있는 걸 보면 보통 도를 닦은 짐승이 아닐 텐데. 사내는 혀를 한 번 찼다. 내가 무슨 광영을 누리겠다고 이리 오래 말을 섞어 알 필요도 없는 것들을 알게 되는가, 이토록 허투루이. 사내는 인상을 찡그리곤 등을 돌렸다.

“에잇, 더럽다. 죽이기도 귀찮으니 돌아가라.”

문 앞에 거대하게, 환원하여 본체로 똬리를 튼 기와집만 한 호랑이를 타 넘을 수 없었던 계집이 또 캥캥 울며 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하루. 또 하루. 닦았을 도(道)가 아까워 죽이지는 못하고, 그렇다고 그냥 두자니 신경줄이 땡기고. 계집이 호소하고, 호소하고, 또 호소했다. 멀찍이에서도 잘 보이는 무덤가 도깨비불처럼 형형한 눈으로 그저 바라보고, 먹지도 자지도 않은 몰골로.
사내는 온갖 세상일에 무심하고 그런 사소한 것들엔 관심을 갖지 않아 왔다. 하지만 그렇게 자꾸 나타나곤 우는 게 분명한 등만 보이며 사라지는 계집을 볼 때마다 뭔가 울걱 치솟아 오르는 걸 느꼈다. 그것은 화병 같기도, 토기 같기도 하여 사내는 불쾌했다. 그저 불쾌했다. 콱! 물어뜯어버렸어야 했는데. 콱! 목을 떨어뜨려야 했는데. 신선의 시신은 사람의 시신처럼 남지 않는다. 본(本)이 인간이었든 동물이었든, 신선의 시신은 살아생전 본인이 닦은 선력(仙力)만큼 오래 남아있다가, 썩지 않고 어느 순간 원래부터 없었던 듯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니 시체 썩는 냄새 안 맡아도 어딘가 던져두면 깔끔하게 처리될 것을- 나는 왜 또 널 보며 성이 나고.

“문을 열어 주십시오.”
“허, 세상사 무자비하기로 이름난 육오(陸吾)의 이름이 땅에 떨어졌도다. 같은 말을 세 번 이상 들은 일이 없었거늘-”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딱지가 앉도록 들었어. 꼬리를 탁탁 치며 사내가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었는지 듣지 못했는지, 멀찌감치 떨어진 회색의 계집이 제 오른팔을 베고 길게 드러누운 사내의 큼지막한 등판을 보다 눈을 내리깔고 안개처럼 말했다.

“소문은 그리합니다만, 그와 달리 성정이 모질지 못하고 본디 다정한 분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정? 모질지 못해? 태어나 처음 듣는 평가고, 맹수에게 어울릴 평가도 아니다. 사내는 기가 찼지만, 기묘함이 찾아왔다. 멀리서 형체만 봐도 늘 찾아오는 짜증이 눈 녹듯 스르르 내려앉은 것이다. 어이가 없었지만, 더 어이없게도 웃음이 났다. 기분이 좋으면 심술궂어지는 사내의 얼굴이 웃으면 어찌 될지? 흉악한 얼굴을 머리를 받치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숨기며, 사내가 손가락 사이로 말했다.

“씨알도 안 먹힐 것인즉 꺼져라.”
“쫓겠다 말은 하셨으나 적극적으로 몰아내진 않으셨소이다. 죽이겠다 수번을 겁박하셨으나 정작 매서운 공격은 하지 않으셨소이다. 그것으로 알았지요, 가여운 이를 그 맹렬한 소문보다 어엿비 여기는 분임을.”

본성이 악한 이를 천제께서 귀애하여 하늘인간 꼴로 만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코웃음 쳤으나 입술이 들썽거리는 걸 제대로 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사내의 입술은 금방 다시 굳어졌다. 이어진 계집의 말 때문이었다.

“그러니 들여보내 주소서. 저는 보아야 합니다.”

입에 발린 소리로 살살 꼬드기려는 짓거리를 보니 과연 여우는 여우였다. 천호(天狐)가 아니고 매구인 게지- 사악한 계집, 간악한 계집, 방만하기가 이를 데가 없도다.

“불허한다. 썩 꺼져라.”

아홉 개의 꼬리로 땅을 탁탁 치며 사내는 여전히 등만을 보인 채, 잇새로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곧 움찔했다. 옆으로 누운 허리로 등으로 두 손이 원망하듯 떨어졌기 때문이다. 본능대로 고개를 홱 돌려 물어뜯지 않은 자신을 대견하게 여기다, 도대체 뭐가 대견하단 것인지 그렇게 여긴 자신을 의아해하다가, 문득 짜증이 치솟은 사내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사내는 고개를 홱 돌리며 소리쳤다.

“도대체 뉘를 보려 이리 귀찮게 구는가!”

이런, 무릎을 꿇은 계집의 얼굴을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보았다. 노란 눈, 그 노오란 눈에 망예(望霓) 같은 갈망을 담고 계집이 사내를 쳐다보고 있었다. 계집의 입술이 봄날 복숭아 꽃잎 같았다. 웃기는 일이다, 그 입술이란 게 파리하고 봄가물 땅처럼 쩌적쩌적 갈라져 있는데도. 복숭아 꽃잎은 무슨 얼어 죽을 복숭아 꽃잎! 사내는 자신의 눈을 치고 싶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사내의 손 대신 계집의 말이 사내의 눈을 때렸다. 질끈 감기도록 눈을 때렸다.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