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결국 누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공모(비평)

대상작품: 다윈과 나 (작가: 조나단, 작품정보)
리뷰어: 최현우, 17년 11월, 조회 38

리뷰를 시작하기에 앞서, 필자는 최재천 교수의 책 ‘다윈 지능’을 읽지 않았음을 고백하고 싶다. 그래서 이 리뷰도 그 도서를 읽은 리뷰에 비해 반쪽짜리 리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미리 말해두고 싶다. 리뷰를 쓰기 위해 인터넷 검색으로 다윈 지능에 대해 수박 겉핥기 수준으로 알아볼 수밖에 없었던 필자의 좁은 식견을 양해해주었으면 하는 바이다.

소설은 크게 보자면, 태어나기 전부터 인류방위군의 프로파간다에 의해 ‘비글 족은 죄다 흉악한 나쁜 놈들.’, ‘좋은 외계인은 죽은 외계인’이라는 식의 사상을 갖고 있던 찰스턴 중위와 수명을 다한 모성을 떠나와 홀로 미지의 행성을 개척하던 비글족 여성 다윈의 만남을 그리고 있다. 이 극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로 다뤄지는 것은 인류와 비글의 우주분쟁도 아니고, 큰 부상을 입고 죽어가는 찰스턴 중위의 손에 땀을 쥐는 생존기도 아니다. 그것은 멸족의 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해 단체보다 개인의 삶을 선택한 비글족과 그것을 행한 방법에 대한 것이다. 단체보다 개인이 중요해지면서 더 이상 속성으로 다윈족의 개체를 분리하는 것은 의미가 사라진다. 그래서 소설 속에서 다윈은 그녀가 여성임을 의아하게 여기는 찰스턴 대위를 이해하지 못한다. 사회에서 사람을 카테고리로 분류하고 그에 따른 한계를 지어 구별한다는 사실을 비판하기 위한 대목이 아닐까 생각된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다윈의 설명에 모호한 부분이 있다는 점이다. 그녀는 ‘무작정 개채수를 늘이는 것은 누우와 다를 바 없다.’는 발언으로 개체수를 늘리는 것을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러기 위해선 통제가 필요한데, 찰스턴 중위의 이러한 물음에 ‘종족의 번식은 순수하고 중요하지만, 그것을 통제하거나 장려해선 안 된다.’고 밝힌다. 그러나 그녀가 밝힌 비글족의 ‘통제되거나 장려되지 않은 순수한 방식’은 1년에 한 번씩 효율적인 장소에서 만나는 것이었다. 원하는 때라면 언제나 종족보존을 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는 인간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찰스턴 중위는 속으로 ‘그게 통제가 아니면 뭐가 통제라는 거지?’라는 의문을 떠올렸을 수도 있다.

어린왕자와 여우가 떠오르는 잔잔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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