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사회를 은유하는 ‘코어-커널-어플리케이션’의 3층 구조… 공모(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불법 개조 가이노이드 성기 절단 사건 (작가: 전혜진, 작품정보)
리뷰어: 후더닛, 17년 10월, 조회 181

‘어둠의 왼손’으로 유명한 여성 SF 작가 어슐러 르 귄은 그 책의 서문에서 ‘모든 소설은 은유이며 SF도 은유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SF의 외피를 취하고 있는 이 단편, <불법 개조 가이노이드 성기 절단 사건>에게도 해당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현실을 은유하고 있다는 것이죠.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남성 중심 사회 아래에서 억압과 차별을 받는 여성의 현실을 말입니다. 제목의 <가이노이드>는 쉽게 말해 인간형 로봇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인간의 명령을 받아 육아나 사무 보조 또는 서빙 같은 이런저런 일들을 대신 해주는 존재인 것이죠. 네, 고대 그리스나 로마 시대의 노예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데 작가는 거기에 하필이면 남성을 뜻하는 ‘가이(영어 ‘guy’로 표기되지는 않아서 이렇게 말하는 게 섣부른 단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를 붙여놓아 가이노이드를 은연 중에 ‘남성의 노예’로 해석하게 합니다. 더하여 화자가 독자에게 주로 언급하는 가이노이드는 오로지 남성을 위한 것에만 맞춰져 있어 그런 해석을 더욱 강화시킵니다. 육아를 위한 가이노이드를 설명할 때조차 분명 이런 가이노이드의 본래 목적일 ‘여성의 노동을 덜어주기 위한 존재다’ 같은 말은 일절 없으며 뒤에 가선 굳이 ‘아내를 갑자기 잃고 어린 자녀를 돌보기 위해 육아용 가이노이드를 데려온다’고 언급하니까요. 분명 ‘남성만을 위한 가이노이드’라는 걸 더 부각시키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이쯤 되면, 소설의 가이노이드를 달리 해석할 도리가 없습니다. 앞서 말한, 남성 권력에 포획되어 부당한 억압과 차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지금 사회의 여성인 것이죠. 적어도 제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인간 명령에 충실한 가이노이드가 ‘성기 절단’이라는 엄청난 위해를 인간에게 가하는 것을 납득시키기 위해 작가는 ‘코어-커널-어플리케이션’이라는 3층 구조를 가져 옵니다.

소설 초반은 여기에 대한 설명에 할애되어 있습니다. 코어는 어떤 응용도 불가능하여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을 가리키고, 커널은 그보다 유동적인 것으로 의도에 따라 변조가 가능한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어플리케이션은 그렇게 작의적 변조를 좀 더 원활하게 만들기 위해 부가시킨 장치 같은 것으로 보면 될 듯 합니다. 가이노이드가 성기 절단을 하게 된 것은 이 구조 사이의 모순 때문이었습니다. 그것도 내부적 모순이 아니라 외부적 모순. 그러니까 인간, 즉 그 가이노이드 소유자가 커널을 적절히 변환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어플리케이션을 무리하게 실행케 한 결과 일어난 사고였던 겁니다.

나름 합리적 설정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제가 주목하는 건, 좀 다른 부분입니다. 저는 이 3층 구조가 묘하게 마르크스의 체제 구조론과 닮아보이거든요. 마르크스는 체제를 이렇게 구분한 적이 있습니다. ‘하부구조-상부구조-이데올로기’. 똑같이 3층 구조입니다. 각 층위가 가지는 성격도 실은 동일합니다.

먼저 한 체제의 진실된 정체성이며 쉽사리 바꿀 수 없는 ‘하부구조’가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역사를 생산 양식에 따라서 구분하고 있는데, 그 생산 양식을 결정짓는 것이 바로 ‘하부구조’ 입니다. 한 마디로 체제의 정체성입니다. 이건 정확히 가이노이드의 코어와 같죠.

그런데 지배계급이 자신이 원하는 체제를 만들기 위해 하부구조를 무시하고 자신들에게 이로운 운영 체제로 만들 때가 있습니다. 여러 법과 제도를 통해서 말이죠. 그런 게 ‘상부구조’ 입니다. 자신의 목적에 맞게 응용하는 것입니다. 네, 바로 가이노이드의 커널 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상부구조는 어디까지나 소수를 위한 것으로 다수를 차지하는 민중의 반감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민중을 속이고 달래어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순순히 받아들이도록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지금의 자본주의는 절대 다수 민중의 노동력을 착취해 소수만 혜택받는 구조입니다. 그런데도 민중은 왜 가만히 있을까요? 아주 어릴 때부터 학교와 사회를 통해 끊임없이 자본주의는 좋은 것이란 생각을 주입받아 왔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법과 제도를 사람들에게 정당화하고 강요하며 확장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이데올로기 입니다. 변조된 커널이 좀 더 목적에 부합하여 잘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드는 가이노이드의 어플리케이션과 다를 바 없는 것이죠.

어떨까요? 이렇게 보는 것은 무리일까요? 이왕 무모해지기로 한 김에 좀 더 무모해져 보기로 하겠습니다.

작가가 이 3층 구조를 통하여 오늘날 남성 권력에 의해 여성이 억압과 차별을 받는 현실을 비꼬고 있다고 말이죠. 아마도 우리 사회의 제대로 된 코어란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성평등일 겁니다. 우리 사회가 이것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엔 누구도 반대하지 않겠죠. 원래 남성과 여성은 자연적으로 그렇게 태어났기도 하고 말이죠. 평등하게 태어났으니 평등하게 대우받는 것은 간단한 진리입니다.

그런데 남성 권력이 지배 계급이 되자 이런 코어를 자신에게 유리한 커널로 살짝 바꾸었죠. 고대 그리스부터 여성은 열등하며 정치에 문외한이고 학문과 예술은 어림도 없으며 바깥 일에 나서기 보다 출산과 양육에 전념해야 한다는 식으로. 그리고 그것을 법과 제도, 문화라는 어플리케이션을 통하여 널리 유포하고 여성 스스로 자신을 강하고 자유로운 존재로 상상하는 걸 차단시켰습니다.

소설에서 남성이 자신의 성적 판타지를 실현하기 위하여 커널과 어플리케이션을 마구 변조하는 것과 똑같이 말이죠. 다시 말해 그 남성의 행위엔 유사 이래로 내내 여성을 억압하고 차별해 온 남성 중심 사회의 본질적인 행태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은유인 것이죠.

그런 남성이 성기 절단을 당합니다. 비꼬는 것이죠. 아니 3층 구조에 좀 더 충실하여 본다면 선언인 것입니다. ‘니들, 그렇게 계속 하다간 (영화 ‘싸움의 기술’에 나왔던 백윤식 톤으로) 피똥 산다.’라는 뉘앙스의.

백윤식 톤으로 하니 어쩐지 협박처럼 들리네요. 그래서 소설 마지막에 사족처럼 화자의 당부가 붙었나 봅니다. 수위 조절의 목적으로. 후후.

저는 리뷰란 본디 읽는 이를 설득시키는 게 주가 아니라 내가 이 작품의 어느 부분에서 재미와 흥미를 느꼈는가를 주로 고백하는 자리라고 봅니다. 지금까지 제가 말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 부분에 재미와 흥미를 느꼈다는 것이죠. 거기에 충실하여 썼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이 소설을 어떻게 읽으실지 궁금하네요.

그렇다고 이 소설을 반남성주의에 가두는 것은 위험하다고 봅니다. 사족이 될지도 모르지만 저는 여기서 아무래도 유명한 페미니스트 학자인 벨 훅스의 다음과 같은 경고를 붙여둬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우리의 문화적 인식체계에 페미니즘은 곧 반남성운동이라는 억측이 뿌리깊게 박혀 있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에 반대한다.(…) 여성이라 해도 성차별주의적 사고와 행동에 젖은 채 페미니즘 운동에 잠입한 여성은 운동에 해를 입히는 위험한 존재다.(‘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중에서)

반남성주의에 입각한 페미니즘 역시 코어를 왜곡하고 변질시키는 커널이라 할 것입니다. 거기에 기반한 온갖 이론과 주장, 선동 또한 어플리케이션일 것이구요. 커널과 어플리케이션에 휘둘리지 말고 항상 코어가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것을 먼저 바라보는 현명한 태도가 널리 자리잡았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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