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낙원은 때로 또 다른 누군가에게 지옥이 된다… 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망선요(望仙謠) (작가: honora, 작품정보)
리뷰어: 후더닛, 17년 10월, 조회 109

‘망선요‘, ‘선녀를 바라는 노래’라는 뜻이겠지요.

주인공은 대학 후배가 자기 대신 봉사 좀 해달라고 부탁하면 석 달 동안 꾸준히 해 주는, 참 마음씨 좋은 여성입니다.

그녀가 하는 봉사란, 공부방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인데 현실적인 엄마는 그것이 영 못마땅합니다. 그래서 봉사하고 온 딸을 은근히 나무랍니다. 그 때문이었을까요? 주인공은 갑자기 자신이 가르치는 공부방을 빌리고 있는 살림집에 사는 초희란 아이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부모가 모두 일을 나가서 집에 늘 혼자 있는 열 살인 여자 아이인데 하루는 늘 보이던 아이가 갑자기 보이지 않아서 찾아 봤더니 화장실에서 도통 나올 생각을 안하더라면서 말이죠. 그렇게 냄새나는 곳에 왜 있냐고 주인공이 묻자 초희는 엄마가 절대 거기서 나가지 말라고 했다고 대답합니다. 초희는 초등학교 3학년이지만 학교도 거의 가지 않고 글도 잘 모르는데 오로지 쓰는 것은 선녀, 낙원 뿐입니다. 엄마가 자기보고 선녀라고 했다면서요.

선녀 때문에 주인공은 어린시절의 기억을 떠올립니다.

엄마에게서 허난설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시간들을. 그 때 주인공의 엄마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허난설헌은 선녀가 되고 싶다는 글을 많이 썼다고. 네, 그것이 바로 제목인 ‘망선요’인 것입니다. 그러나 허난설헌의 ‘망선요’는 동경이 담긴 게 아니었습니다. 예술가가 되고 싶은 그녀를 가로막는 현실을 원망하는 노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얼른 ‘선녀와 나뭇꾼’을 떠올립니다. 사슴은 나뭇꾼에서 선녀가 하늘로 날아오르지 못하도록 무조건 아이 셋을 낳으라고 합니다. 이 이야기가 말해주듯, 아이란 선녀가 자신이 꿈꾸는 이상을 향하여 날아오르지 못하도록 만드는 발목에 단단히 매달린 무거운 추와 같습니다. 주인공의 엄마는 ‘망선요’를 들려주면서 사실은 주인공 때문에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는 원망을 쏟고 있었던 것입니다.

[너 같은 거 낳지 말 걸.]

주인공이 화장실에서 나오려 하지 않는 초희의 모습을 보고 울어버린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했습니다. 자신 역시 그 때 초희와 같았다는 것을 기억해낸 것입니다. 현실에 얽매여 자신의 꿈을 포기해버린 엄마가 오로지 그로 인해 받은 자신의 상처를 무디게 할 목적으로 만든 원망의 감옥에 갇혀서 나오지 못하게 된 것은 초희나 주인공이나 똑같았으니까요. 한 마디로 초희는 주인공의 분신이었습니다. 지금의 초희는 주인공에게 과거 자신의 모습을 인화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때 입었던 상처, 그러나 살면서 자기도 모르게 잊고 있었던 통증을 주인공은 초희를 통해 문득 상기하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인공이 엄마에게 초희 이야기를 하는 것은 사실 그 때 자신을 초희로 만든 엄마에 대한 고발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엄마가 주인공이 말할 때마다 텔레비젼 프로그램 이야기나 하는 둥 딴청을 피우는 것도 당연합니다.

‘망선요’는 상처에 대한 이야기 같습니다.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입은 상처만 신경 쓴 나머지 무심코 혹은 고의로 주변 사람에게 상처 입히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특히나 부모의 경우, 자식이 그 대상이 많이 됩니다. 그저 자신의 가슴을 내리누르는 돌덩이를 치우는 데만 급급하다 보니 그 덜어낸 돌덩이 때문에 다시 또 타인의 마음이 크게 상처 입는 것을 미처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것이 더 큰 파문이 되어 결국 영영 열리지 않을 상처의 감옥 속에 가둬버린다는 것을 말이죠.

초희는 바로 그런 것의 상징입니다.

낙원에 닿고자 하는 마음만 있고 주변 사람의 마음을 신경쓰지 않는 것은 장미와 같습니다. 장미는 자신의 아름다운 꽃봉오리를 지키기 위해서 가시로 타인에게 상처입히는 일을 사양하지 않으니까요. 깊이 박힌 가시는 쉽게 뺄 수 없습니다. 이와 똑같이 화장실에서 나오지 못하는 초희 역시 언제까지나 반복적으로 생겨날 것입니다. 소설 속 초희가 그러하듯, 쉽사리 따스한 햇살 속으로 데려올 수 없는 초희들이 말입니다. 소설 속 엄마처럼 그 때는 누구나 그 그랬으니까 하는 상황 논리는 변명이 되지 못합니다. 시간이 다 해결해주겠지 하는 막연한 희망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문득 탈레스의 이야기 하나가 생각납니다. 늘 밤하늘을 보며 세계의 근원을 사색했던 탈레스는 어느날 하늘만 보고 걷다가 우물에 빠져 버렸습니다. 트리키아의 하녀가 그 모습을 보고 이렇게 비웃었다죠.

“하늘의 이치는 그렇게 잘 헤아리는 분이 발 밑은 왜 그리 못 헤아리시나요?”

‘망선요’의 상처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므로 보다 현명한 태도는 자신의 이상을 위하는 만큼 주변 또한 잘 헤아리고 신경쓰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탈레스처럼 어떤 때는 아래를 보는 게 더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거기에 있다면 더욱 그러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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