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 속에도 웃는 자는 있다 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불법 개조 가이노이드 성기 절단 사건 (작가: 전혜진, 작품정보)
리뷰어: Darlphy, 17년 10월, 조회 369

저는 처음에 이 글이 현대사회에 존재하는 불평등에 대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지금까지 수많은 소설에서 다뤄진 주제이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식상하다고까지 생각했죠. 더군다나 ‘성기를 자른다’는 직설적인 표현은 조금 유치하게 보이기까지 했고요. 사실, 글을 처음 읽었을 때에는 실망까지 했어요. 하지만 두 번, 세 번 다시 읽어보니 처음엔 읽어낼 수 없었던 다른 의미들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일단 표면상, 현대사회에서 사회적 강자를 대변하는 ‘인간’과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가이노이드’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이 시대의 불평등을 말하는 것이 이 글의 주체처럼 보여요. 처음 글을 읽었을 때에는 완독하고 나서도 당연히 이것이 글의 주제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두 번째 읽었을 때에 한 가지 모순을 발견했어요. 글 중간에 나오는 “다만 가이노이드들은 인간에게 봉사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니까” 라는 설정이 바로 그것이에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처럼 스쳐지나가는 이 문장으로 인해 혼란이 왔죠. 이 글을 읽다보면 ‘현실의 사회적 약자=글 속의 가이노이드’라는 공식이 자연스럽게 머리에 들어오잖아요? 그런데 가이노이드의 존재 목적 자체가 ‘글 속의 인간(=현실의 사회적 강자)’에 봉사하기 위해서라는 게 조금 납득하기 힘들었죠. 현대사회의 불평등의 기원이 된 구시대적 남성주의에서 비롯된 사관이 아주 자연스럽게 글의 배경에 깔려있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 말이에요.

 

처음에는 글의 주제와 부합하지 않는 잘못된 설정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댓글로 ‘이 부분은 잘못된 설정이지 않나?’라고 작가님께 말하려고 했죠. 하지만 그렇게 간단히 지적을 해버리면 ‘너는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대충 글을 쓰냐?’고 따지는 것과 다를 바 없기에, 무례를 범하기 전에 혹시 제가 이해하지 못한 다른 의미들이 숨어있지 않을까 다시 한 번 읽어보기로 했죠. 결국 다시 한 번 끝까지 읽어보니 제가 글의 주제를 잘못 생각하고 있던 것은 아닌가 의심하게 되었고, 세 번째로 완독하고 나서야 제 나름의 해석으로 이 글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어요.

 

목적이 장애인들을 위한 것이라고는 하나, 완전하지는 않지만 인간에 준하는 권리를 가질 수 있는 가이노이드에게 성처리를 강요한다는 것은 사실상 성노예와 다를 바 없죠. 그런 가이노이드를 만들고 있으면서 가이노이드들의 권리에 대해 굉장히 신경 쓰고 있다고 하는 회사 측 주장은 대단히 의미심장해요. 말로는 약자들의 권리를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이익만 챙기는 회사. 대놓고 이익을 위해 활동하는 여타 영리업체와 다른 척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다를 것 없는 회사. 그런 회사의 대변인이 이 글의 화자라는 점이 핵심이라고 생각해요. 표면적으로는 타인의 권리를 신경써주는 척하면서 뒤로는 자신의 이익을 취할 생각밖에 없는 현실의 인간(나아가 기업이나 정치단체)들에 대한 비판이 바로 이 글의 결론이 아닐까 생각해요.

 

애초에 글 속의 인간들 중에서도 사회적 강자로 분류되는 인간들은 가이노이드가 필요하지 않을 거예요. 그들은 인간과 유사한 가이노이드가 아니라 실제 인간을 노예처럼 다룰 수 있는 권력과 자본력을 가지고 있을 테니까요. 현실에서도 뉴스를 통해 종종 접할 수 있는 갑질의 사례처럼 말이죠. 이 이야기 속에는 타인에게 사랑받지 못해서 섹스판타지를 이뤄줄 성행위의 상대가 가이노이드 밖에 없는, 인간 중에서도 하류의 인간과, 그보다도 더 아래에 존재하는 열악한 가이노이드들 밖에 나타나지 않아요. 그러나 화자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는 순간, 그 두 존재의 비극 사이에서 이득을 보는 가이노이드 제작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죠. 표면적으로는 권리를 주장해주면서 실상 노예와 다를 바 없는 가이노이드를 계속해서 제작하는 곳이 존재하는 한 가이노이드들을 결코 진정한 의미의 권리를 찾을 수 없을 거예요.

 

이 글의 제목은, 제목만 봤을 때에는 가이노이드의 성기가 잘린 것인지, 가이노이드가 성기를 자른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없는 중의적 표현이에요. 하나의 완결된 작품에서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는 제목에 굳이 이런 중의적 표현을 썼다는 건 작가의 의도가 개입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글을 읽으면 가이노이드가 행위의 주체임을 분명히 알 수 있지만, 그렇다면 제목은 왜 중의적일까요? 저로서는 막연히 추측할 수밖에 없지만, 어쩌면 피해자와 가해자가 언제든 뒤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글에서는 인간과 가이노이드로 명확히 구분되어있죠. 이건 영원히 바뀔 수 없는 강자와 약자, 가해자와 피해자의 포지션이에요.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잖아요? 다양한 상황에 따라 언제든 약자가 강자로, 강자가 약자로 변할 수 있으니까요. 매스컴을 통해 알려진 사건 중에는 ‘알고 보니 피해자가 가해자였고, 가해자가 피해자였다’는 사건도 종종 있으니까요. 글에서 성기를 자른 것은 ‘어떤 가이노이드’일 뿐이고, 성기가 잘린 것 역시 익명의 개인에 불과해요. 이러한 가해자와 피해자의 모호성을 감안하면, 우리는 피해자이면서도 언제든 성기가 잘릴 수 있는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의미한다고 생각해요.

 

성기를 단순히 생식행위를 하기 위한 수단을 넘어, 한 인격체의 자아와 자존감, 각각의 개성으로까지 의미를 확장시킬 수 있다면, 성기가 잘렸다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어요. 가이노이드 제작사가 만들어낸 시스템 속에서 성기가 잘리는 꼴을 당하지 않기 위해선 ‘내가 가해자는 아닌지’, 그리고 ‘비극 속에서 웃고 있는 자는 누구인지’ 생각해보는 비판적 사고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다양한 것들을 시사하는 글이었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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