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소행성1
우리가 사는 별은 너무 작아서
의자만 뒤로 계속 물리면 하루종일 석양을 볼 수 있다. *
우리가 사는 별은 너무 작아서
너와 나는 이 별의 반대편에 집을 짓고 산다.
내가 밤이면 너는 낮이어서
내가 캄캄하면 너는 환해서
우리의 눈동자는 조금씩 희미해지거나 짙어졌다.
우리가 사는 별은 너무 작아서
적도까지 몇 발자국이면 걸어갈 수 있다.
금방 입었던 털외투를 다시 벗어 손에 걸고 적도를 지날 때
우리의 살갗은 급격히 뜨거워지고 또 금세 얼어붙는다.
우리는 녹아가는 얼음 위에서 서로를 부둥켜안는다.
나는 네게 하루에 하나씩
재미있고 우스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네가 못 보고 지나친 유성에 대해
행성의 반대편에만 잠시 들렀다가 떠난 외계인들에대해
너는 거짓말하지 마, 라며 손사래를 친다.
바다가 있으면 좋겠다.
너와 나 사이에
너에게 한없이 헤엄쳐갈 수 있는 바다가
간간이 파도가 높아서 포기해버리고 싶은 바다가.
우리는 금세 등을 맞대고 있다가도 조금씩 가까워지려는
입술이 된다.
지구의 둘레만큼 긴 칼로 사람을 찌른다고 해서 죄책감
이 사라질까.
죄책감은 칼의 길이에 비례하는 것일까.
우리가 사는 별은 너무나 작아서
네 꿈속의 유일한 등장인물은 나.
우리는 마주보며 서로의 지나간 죄에 밑줄을 긋는다.
*생텍쥐페리, 『어린왕자』
1.
우리가 사는 별이 너무나 작아서 네 꿈 속에 유일한 등장인물로 등장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리단과 마누가요. 서로의 체온을 더듬으며 서로 쏘고 물린 곳을 핥아주며 지냈으면 좋겠어요.
모두가 입을 모아서 인어에 홀리듯 이 작품에 홀렸다고들 했습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도망쳤어야 했는데!
결국은 마누가 인어에게 홀려 허덕이듯 저는 이 작품에 홀려 허덕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끈끈이 주걱처럼 놔주질 않네요.
읽는 동안 목이 마르고, 산산이 흩어지고, 비산하는 것만 같았어요. 리뷰를 쓰려고 앉아있는 지금도 이 글을 하나로 엮을 수 있는 단어를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끝없이 갈라지고, 흩뿌려지는 것만 같아요. 거울이 바닥에 떨어져 부숴지기 위해 갈라지는 그런 틈 같달까요. 물안개 속에서 잠시만 뜨는 무지개 같달까요.
그런 순간과 찰라를 놓치면 영원히 엿볼 수 없는 이세계로의 숨박꼭질하는 것 같은 작품입니다.
몽환의 숲에서 헤맨지 오래라 마니의 말은 잊고 아린처럼 생각하는 법만 배웠습니다.
2.
이 작품은 기타와 공지에 있는 총 28편의 왕들의 역사를 먼저 읽고 난 후에 읽으면 더 재미있습니다. 읽지 않아도 이해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지만, 왕들의 역사와 사제들의 이야기가 겹치는 부분이 있어 주인공보다 한 발 앞서 이해할 수 있는 장점이 있죠. 물론 아주 거대한 밑그림이 있지만 이건 아마도 본편을 다 읽고 난 후에야 아차 싶을 반전이라 본편을 읽는 동안은 눈치를 못챌거라 생각해요. (그러고보니 작가님이랑 제 댓글의 그 부분 스포처리해야겠어요!)
대부분의 왕은 광기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좋은 쪽으로건 나쁜 쪽으로건. 그런 광기가 마니의 역사와 문화, 생활을 만들죠. 그 광기의 역사를 후에 사제들이 찬가로 부르는데 이 언어가 그 때와는 달라서 태고어가 있고 마니어가 있어요. (작가님이 낯선 언어를 창조해내셨습니다….!!!!)
여기에서 의문이 들었었어요. 마니는 태고어를 누구보다 잘 알죠. 찬가를 잘 안다는 말은 태고어를 잘 안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니까요.태고어로 찬가를 부르는데 있어서 그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면 과연 마누가 찬가를 잘 부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도 성악을 배울 때는 독어나 이태리어를 배우곤 하는 것처럼요. 하나 더, 지나치게 허례허식에 매어있는 사제집단이라면 태고어를 더 잘 활용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요. 일부러 마니들 앞에선 태고어를 써서 대화한다던가..
그러니까 태고어-마니어 사전은 그 이전부터 도서관 사제들에 의해 연구가 되어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죠. 만약 아린이나 인어와 대화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연구를 금했다고 하더라도 왕들의 역사를 공부하려면 어쩔 수 없이 공부해야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루가라가 처음 마누의 방에서 찬가대결을 했을 때 마누의 말을 떠올려 보면 태고어를 아예 공부하지 않는 건 아닌 것 같은데..
한편으론 제가 반야심경을 외울 때 “마하반야바라밀다 심경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 시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이라고 한다고 해서 이 뜻이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다섯가지 쌓임이 모두 공한것을 비추어보고~” 의 뜻인 것을 모르는 것과 같은 원리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뜻을 모르지만 외울 수는 있는 것처럼요.
“아사라리아”를 말할 수는 있지만 “환속”같이 신전에서도 쓸 일 없는 생소한 단어를 태고어로 말 할 수는 없었겠죠. 그렇지만 태고어로 찬가를 불렀었으니 다른 사제들보다는 훨씬 빠르게 익힐 수 있었겠죠. 아마 하리단에게 사랑의 노래를 만들어 부르는 최고의 로맨티스트가 됐었을 수도 있었을거란 생각을 합니다.
3.
빗소리에 뮤이타(갖고싶어), 뮤이타(갖고싶어)가 섞여서 들리는 곳, 신을 경배하기 위해 사후세계 없이 신께 바쳐진 제물로 사는 사제들이 살아가는 곳, 마니와 아린의 증인인 인어가 존재하는 곳, 죽으면 별이 되는 아린이 사는 곳. 그래도 삶이 있고 죽음이 있고 기쁨과 슬픔이 홍수같이 넘쳐나는 곳에서 감정이 없는 사제를 보는 독자는 되려 많은 감정에 휩쓸리곤 했습니다.
신은 있는가하는 원론적인 질문에서부터 생명의 경중, 옳은 것과 바른 것, 관계 맺는 것과 관계를 끊는 것, 약속의 중요성(?) 같은 물음이 끊임없이 던져지는데 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글을 읽다보면 왜 나는 한낱 인간인가 싶은 소외감도 느끼게 되고 그렇습니다.
바람 불면 영혼과 함께 날아갈 것 같은 마누에게 나하 라하?(괜찮니?)라고 물어줄 수 있는 하리단이 없어서 루루메 라고 말해줄 딸이 없어서 그런 마누를 너무 담담하게 그려서 독자는 안쓰러운 마음으로 목놓아 울 수가 없었습니다. 숨죽이고 울어야 될 것만 같았어요. 들키면 안될 것 같았죠. 심지어 마누 자신에게도.
결국 아주 담담하게 지낼 것을 강요받으며 살던 마누가 하리단을 만나고, 사화인이 호노리를 만나고, 반리은은 조금 모호한데 하심을 만나고 난 후로 완벽해지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감정이 없는 마니는 있을 수가 없죠. 이렇게 감정에 치이며 살아도 잘 다룰 줄을 모르는데 사제들 사이에 있다가 감정이 미세한 균열로 새어들어오는 순간 봇물 터지듯 터지고 말아서 그 감정을 유랑가객으로서 농사꾼으로서 그리고 부모로서 다뤄가는 이야기. 결국 신이 있는가에 대한 해답은 찾지 못했지만 한 개인의 삶이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완벽해지는 걸 봤으니 만족스럽습니다.
4.
전제사장과 바밀란은 아버지와 아들 같은 느낌이 있어서 함연의 결론은 필연적이라고 생각했는데 보면 현제사장과 모위의 관계는 잘 그려지고 있지 않아서 조금 궁금했어요. 현제사장의 라인은 모위에서 반리은으로 이어지는게 아니라 스타카토를 그려 넣은 것처럼 끊어가며 이어지네요.
그런데도 전제사장의 라인과 견줄 수 있었던 건 그만큼 반리은이 뛰어났기 때문이겠죠.
사실 중심부에 있는 이야기는 ‘사제가 인어에게 홀렸다.’ 정도일텐데 이런 중요 사실이 1화에 나와 버리고 말아요. 아린에 대한 이야기나 인어, 사제에 대한 이야기나 인어에게 홀린 사제이야기나. 그런데도 불구하고 81화까지 끌고 오는 힘을 뭘까요. 인어에 홀리고 신전에선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오히려 제물로 올리던 아린에게서 위안을 찾고 자신을 구하는 내용까지 물 흐르듯 막힘이 없어요. 호흡도 빠른 편이고 중간 중간 사건이 빵빵 터지는 것도 아닌데도 계곡의 급류를 쭈욱 타고 내려오는 듯이 놓을 수가 없어요. 가히 기호지세라 할만 하네요.
5.
그래서 결국은 무슨 단어로 정리하기는 반강제적으로 포기한 상태에서 사랑 얘기는 하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려 봅니다. 사랑이란, 살고 싶게 하는게 사랑이겠죠. 마누의 말처럼.
마누의 성장담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요. 감정이 커져가는 걸 보고, 그렇게 완성되어가는 걸 봤습니다. 정치 머리가 여물어가는 반리은도 봤고요.
이런 기묘하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짧은 추억이 길고 긴 인생을 지탱시켜 줄 이야기.
그러니까 여러분, 사랑이에요. 아이처럼 안기고 싶고, 놓치고 싶지 않은
그저 보고 싶어서 왔어, 라고 말할 수 있는 신기루 같은 사랑 이야기 읽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