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이 잠드는 곳 감상

대상작품: 태양이 잠드는 곳 (작가: Seoyeon, 작품정보)
리뷰어: 은율e, 1일 전, 조회 36

이 이야기를 맨 처음 읽게 한 건 ‘고대 이집트’, 이 단어 때문이었다.

역사 덕후라 자부하던 난 고대 이집트 역사를 모른다. 성경에 나온 조금(출애굽기)과 뒤에 연관된 수많은 이야기로 얼핏 스쳐 지나간 정도이다. 그래서? 과연 고대 이집트 역사로 소설을 쓸 수 있는가? 모호한 역사를 작가는 어떻게 풀어갔을까? 기록이 많이 있으니 내가 모르는 역사도 많이 있는 것인가? 이런 궁금증으로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역사 덕후의 비판적 꼼꼼함으로 읽기 시작했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리고 조금 읽다가 자게에 소개도 했다. 왜? 재미있으니까! 재미있으니 최신화만 나오면 내 글 쓰다 말고 읽고 있다. 처음 부분이 법정 드라마로 시작해서 검사나 변호사, 아님 법원 관계자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다. 왜냐? 너무 친절하셔서. 저쪽은 태생적으로 친절하지 않다.

《태양이 잠드는 곳》은 고대의 연인들이 현대에 다시 태어나 사랑을 되찾는 평범한 환생 로맨스가 아니다.

이 작품에서 아케나텐과 네페르티티, 호렘헤브는 여러 생을 윤회한 사람들이 아니라 삼천삼백 년의 긴 잠 끝에 현대에서 다시 깨어난 존재들이다. 그러나 같은 방식으로 부활했음에도 기억이 열린 정도는 모두 다르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휘성, 꿈과 최면으로 과거를 복구하는 원영, 아직 아무것도 모른 채 영혼만 반응하는 태형. 이 차이가 세 사람의 관계를 단순한 삼각관계 이상으로 만든다.

처음에는 김승현 살인미수 사건을 다루는 법정 미스터리로 시작한다. 심장약과 혈압약, 허위 자백, 불공정계약과 기업 인수 음모가 이어지면서 전문직 스릴러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건의 배후에 있는 휘성이 원영을 발견하는 순간부터 법정 사건은 삼천삼백 년 전의 비극으로 들어가는 문이 된다. 슬러리온 인수, 대양의 영입 제안, AKH 파견까지 모두 휘성이 원영을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이기 위해 설계한 일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현실의 기업 서사와 고대의 권력 서사가 겹쳐지기 시작한다.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고대의 관계가 현대에 그대로 반복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원영은 네페르티티의 기억을 되찾고 있지만 자신을 네페르티티와 동일시하지 않으려 한다. 네페르티티가 누구를 사랑했고 어떤 죄를 저질렀든, 현재의 자신은 최원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기억은 단순한 정보로 머물지 않는다. 헤브의 눈빛을 보면 가슴이 아프고, 아케나텐의 향기를 맡으면 몸이 먼저 반응한다. 원영은 과거와 현재를 분리하려 하지만, 이미 두 삶의 감정이 한 사람 안에서 뒤섞이고 있다.

휘성은 가장 강렬하면서도 가장 위험한 인물이다. 열 살 때부터 아케나텐의 기억을 지닌 채 살아왔고,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삼천삼백 년 전의 경험을 평생 혼자 감당했다. 그가 마침내 원영을 발견했을 때 느꼈을 안도와 갈망은 충분히 이해된다. 그러나 그 기다림이 원영을 소유할 권리가 될 수는 없다. 휘성은 원영의 직장과 치료, 기억의 범위, 태형과의 거리까지 통제한다. 원영을 위해 AKH라는 세계를 만들었다고 말하지만, 그 세계에는 원영이 자유롭게 나갈 문이 보이지 않는다.

24화에서 원영은 네페르티티가 아니라 현재의 최원영으로서 휘성에게 다가간다. 휘성만 보였기 때문에 그의 위스키룸에 왔다고 분명히 고백한다. 하지만 휘성은 그토록 기다린 선택을 받고도 믿지 못한다. 가장 먼저 태형이 호렘헤브의 부활이라는 사실을 꺼내며 원영의 마음을 의심한다. 휘성의 비극은 사랑받지 못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아도 그것을 믿을 수 없다는 데 있다.

25화에서 두 사람은 결국 연인이 된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원영은 태형을 해치지 않겠다는 약속부터 받아낸다. 휘성에게는 이것마저 삼천삼백 년 전의 반복이다. 네페르티티는 자신을 선택하면서도 늘 호렘헤브의 목숨을 보호하려 했고, 최원영 역시 휘성의 품 안에서 태형의 안전을 걱정한다. 휘성이 원영을 얻은 장면이 완전한 승리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육체적으로는 가까워졌지만, 신뢰의 거리는 오히려 선명해졌다.

태형의 사랑은 휘성과 정반대다. 그는 삼천삼백 년을 기다렸다는 기억도, 운명이라는 명분도 내세우지 않는다. 원영이 말하는 것이 세상과 다르더라도 믿겠다고 하고, 전생보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원영에게 무엇을 요구하기보다 자신이 필요한 순간에 불러달라고 기다린다. 그래서 태형이 아직 호렘헤브의 기억을 갖지 못했다는 점이 오히려 중요하게 느껴진다. 태형이 원영을 사랑하는 이유는 네페르티티를 기억하기 때문이 아니라 현재의 최원영을 오래 지켜봤기 때문이다.

25화에서 드러난 호렘헤브의 과거는 태형의 위치를 더욱 무겁게 만든다. 아케나텐은 헤브를 폭염과 전염병, 반란이 들끓는 누비아로 보낸다. 사실상 살아 돌아오기 어려운 유배이자 제거 시도였다. 그러나 헤브는 자신의 피를 제단에 바치면서까지 병사들을 지키고, 반란을 진압한 뒤 막대한 황금을 가지고 귀환한다. 아케나텐과 네페르티티가 꿈꾸었던 태양의 세계는 실제로는 헤브가 흘린 피 위에 세워진 셈이다.

이 회차의 ‘밤의 파라오’라는 제목도 인상적이다. 공식적인 태양은 아케나텐이지만, 군대와 전쟁터를 지배하며 이집트의 현실을 떠받친 사람은 호렘헤브였다. 그는 태양의 검인 동시에 태양이 두려워할 만큼 강해진 또 하나의 파라오였다. 휘성은 현대에서도 태형을 제거하지 않는다. 대신 런던 로펌의 CEO와 대표변호사 자리를 주어 멀리 보내고, 자신의 세계 안에 묶어두려 한다. 고대에는 누비아 원정이었던 것이 현대에는 런던 파견으로 바뀐 것이다. 휘성이 과거를 기억하는 만큼 오히려 같은 잘못을 반복하고 있다는 점이 섬뜩하다.

고대 이집트의 기억이 열리는 방식도 좋다. 최면 장면은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는 삽화가 아니다. 새로운 기억이 하나 나타날 때마다 현재 인물에 대한 판단이 달라진다. 처음에는 네페르티티가 아케나텐을 이용한 악녀처럼 보이지만, 그녀가 그의 사랑을 잃는 것을 두려워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호렘헤브는 왕비를 탐낸 배신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두 사람의 세계를 자신의 피로 지탱한 인물이었다. 키야 역시 네페르티티를 밀어낸 연적으로만 여겨졌지만, 24화에서는 네프티사트가 친동생처럼 사랑했던 어린아이였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 작품에서는 누구도 처음 알려진 모습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

25화 마지막에 등장한 트레이시 켈리도 강한 기대를 남긴다. 북아프리카와 중동 전문 변호사인 그녀의 사진을 본 태형은 이유를 알 수 없는 한기와 끌림을 느낀다. 아직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휘성이 원영을 처음 알아봤을 때나 원영이 태형에게서 헤브의 흔적을 느꼈을 때와 닮은 반응이다. 트레이시가 키야인지, 혹은 호렘헤브와 얽힌 또 다른 고대 인물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지금까지 휘성만 알고 있던 부활의 세계가 더 많은 인물에게 확장될 것이라는 신호처럼 보인다.

물론 초반의 빌드업은 긴 편이다. 법정 사건과 기업 관계, 고대 이집트의 인명과 신화 설정이 함께 등장해 처음에는 어느 쪽이 중심 이야기인지 파악하기 어렵다. 현재와 과거가 자주 교차하고, 기억이 완전하게 공개되지 않기 때문에 답답함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20화 이후부터는 초반에 뿌려진 단서들이 빠르게 하나로 모인다. 법정과 기업 서사도 별개의 곁가지가 아니라, 고대의 왕국과 권력관계가 현대의 법과 자본으로 재현되는 구조였다는 사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작품의 초반 흐름이 느리다고 말할 처지가 난 아니다. 내 소설은 사람들이 초반 12화까지 좀 어떻게 줄여 보라고 너무 많이 말한다. 그런데 세계관이 특이하면 그 세계관을 독자에게 이해시키고 필연적으로 보이게끔 끌고 가는 힘이 필요하다. 그래야 그 이후에 독자가 몰입하고, 다 읽고 난 후에 남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작품의 작품성은 초반의 튼튼한 도입부에 있다고 생각한다.

25화까지 읽고 나면 가장 궁금한 것은 원영이 결국 휘성과 태형 중 누구를 선택할지가 아니다. 아케나텐은 왜 사랑하는 네페르티티를 끝내 믿지 못했는지, 네페르티티는 왜 태양의 세계를 떠나 호렘헤브를 찾아갔는지, 키야는 어떻게 사랑받는 동생에서 두 사람을 갈라놓은 존재가 되었는지가 더 궁금해진다. 그리고 과거를 모두 기억하는 휘성과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태형 중 누가 이번 생에서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지도 궁금하다.

현실에서 3000년의 사랑인지, 집착인지. 저 정도면 병이다. 스토커!

난 저 중 한명은 불멸의 설정이면 더 좋을 것 같다.

《태양이 잠드는 곳》은 삼천삼백 년의 사랑을 낭만적으로만 포장하지 않는다. 오래된 사랑이 집착이 될 수 있고, 충성이 착취가 될 수 있으며, 구원을 명분으로 만든 세계가 감옥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태양은 모든 것을 가졌지만 단 한 사람의 마음을 믿지 못했고, 밤의 파라오는 모든 것을 바쳤지만 끝내 선택받지 못했다. 이제 그들 사이에 선 최원영이 네페르티티의 선택을 반복할지, 아니면 과거의 저울을 깨뜨리고 자신의 답을 내릴지가 이 이야기의 가장 큰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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