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비평

대상작품: 미궁 사변 (작가: 창궁, 작품정보)
리뷰어: 엘티그레, 3시간 전, 조회 24

내가…… 왜!

 

창궁 – 미궁 사변 평론

 

※ 스포일러 주의! 작품의 결말과 핵심 반전을 전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미궁 사변]은 정통 판타지의 외피 안에 수사 미스터리, 행정극, 법정극, 관료제적 공포와 정체성의 비극을 함께 넣은 소설이다. 왕국과 마법, 마물과 미궁석이라는 익숙한 재료를 쓰지만, 어느 하나를 장르의 장식으로 두지 않는다. 미궁의 법칙은 수사의 논리가 되고, 행정 절차는 재난이 퍼지는 시간을 만들며, 기억을 먹는 마물은 한 인간의 동일성을 심문한다. 여러 장르가 나란히 놓인 것이 아니라 서로의 원인으로 물려 있다.

작품의 완성도는 세계관의 크기보다 세계관을 사용하는 방식에서 먼저 드러난다. 작가가 설계한 설정은 설명된 뒤 버려지지 않는다. 전서구가 쉬어야 하는 거리, 보고서에 쓰인 종이와 필체, 미궁석과 설계자의 관계, 누군가가 알고 있는 사무실의 위치까지 나중에는 모두 추리의 증거나 생존의 수단이 되고, 처음에는 사소한 정보였던 것이 뒤에서 행동으로 돌아온다. 하나의 설정은 처음에는 단서로 등장하고, 다음에는 위협이 되며, 끝에서는 해결책이나 윤리적 질문으로 바뀐다. 이 소설에서 설정을 안다는 것은 세계를 구경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세계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고, 더 나아가 체험했다는 뜻이다.

작품의 인물들은 설정을 전달하기 위해 세워둔 말판에 머물지 않는다. 누구도 전체를 알지 못하고, 각자 자기 직무와 경험과 편견만큼 본다. 같은 사건을 보면서도 도착하는 진실이 다르다. 그래서 많은 인물이 움직여도 한 사람의 목소리를 여러 입에 나눠 넣었다는 느낌이 적다. 각자의 불완전함이 다른 사람의 능력과 맞물릴 때 비로소 사건이 풀린다. 작품은 독자들에게 장르극의 순수 재미를 제공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언급한 모든 장르 요소를 어떠한 시각으로 접근하든 ‘읽는 재미’를 보장한다는 말이다.

소설은 세 방향에서 같은 재난으로 걸어 들어간다. 늘파란평원에 미궁이 출현하고, 늘초롱성은 정해진 절차에 따라 조사대를 보낸다. 중앙에는 도착 경로도 내용도 수상한 편지 두 장이 날아들고, 왕립대학으로 돌아온 야이샤는 감정갈귀 영수림과 함께 북부로 향한다. 한편 미궁 안으로 들어간 답파대는 바깥의 누구도 아직 모르는 재난을 몸으로 먼저 겪는다. ‘출현’, ‘수색’, ‘답파’라는 세 갈래는 서로 다른 시간에 출발해 같은 진실로 모인다.

세 갈래를 번갈아 보여주는 구성은 단순히 비밀을 오래 감추기 위한 장치가 아니다. 독자는 어떤 갈래에서는 인물보다 먼저 재난을 알고, 다른 갈래에서는 인물보다 늦게 원인을 안다. 알고 있는 정보의 양보다 그 정보가 어느 시간에 놓였고 누구의 행동과 이어지는지가 중요해진다. 수수께끼를 푸는 재미와 이미 벌어진 파국을 향해 사람들이 걸어가는 비극적 긴장이 동시에 생긴다. 알고 있던 사실의 주어가 바뀌는 순간 같은 장면이 다른 죄와 다른 선택으로 읽힌다. “내가 왜”에서 무너진 주어가 작품의 형식 전체에도 퍼져 있다.

이처럼 많은 정보를 다루다 보면 이야기가 설정집처럼 딱딱하게 굳기 쉽다. 그러나 작가는 인물들을 계속 이동시키고, 조사하고, 싸우고, 편지를 쓰고, 서로의 말을 의심하게 하면서 어느 한쪽으로 굳는 것을 막는다. 핵심 철학적 질문 역시 관념만으로 먼저 주어지지 않는다. 미궁에 삼켜진 몸과 돌아오지 않는 조사대, 피해자의 옷과 목을 겨누는 단검을 거친 뒤에야 질문이 생긴다. 개념이 먼저 인물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끝까지 따라간 자리에 개념이 남는다.

이 소설의 문장이 가장 정확해지는 때도 복잡성을 과시하지 않고 행동과 대사를 앞세울 때다. 설명은 인물의 말버릇과 관계 안에서 움직이고, 참사와 농담은 같은 인물의 몸에서 함께 나온다. 공포에 떠는 사람이 우스운 말을 하고, 우스운 말투를 가진 사람이 결정적인 진실을 드러낸다. 희극은 긴장을 잠시 쉬게 하는 부록이 아니라 인물을 한 가지 기능으로 굳지 않게 하는 장치다. 이 덕분에 철학적 무게가 장르적 속도를 잡아먹지 않는다.

그 진실의 한가운데 야이샤가 있다. 사건을 해결하러 온 수사자가 실은 사건의 바깥에 있지 않다는 것. 소설은 이 반전을 단순히 범인의 정체로 쓰지 않고, 한 사람이 과거의 자기를 어디까지 자기라고 부를 수 있는가의 문제로 밀고 간다. 반전은 장르적 기능에 머물지 않을 만큼 깊고 흥미로운 주제의식으로 이어지며, 이 평론이 가장 오래 머물 대목이기도 하다.

한 여자가 자기를 공격하는 단검을 막는다. 이 장면은 이 작품의 백미다. 물론 작품 전체가 이 장면 하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장면 하나에 작품의 여러 길이 겹쳐 들어온다. 기억과 행동, 피해와 가해, 미궁과 설계자, 영수림과 야이샤의 관계가 한마디 안에서 충돌한다.

“내가…… 왜!”

죽고 싶지 않은 사람의 비명으로 들린다. 실제로도 그렇고, 연출 역시 그런 의도다. 과거의 자신이 “죽어”라고 외치며 칼을 밀어 넣고 있는데 무슨 철학을 말하겠는가. 살고 싶은 사람은 살고 싶다고 말한다. 내가 왜 죽어야 하느냐고. 그게 먼저다.

그런데 나를 공격하는 상대도 자기 자신이다. 그러니 “내가 왜” 안에는 “네가 왜”가 함께 울린다. 나를 죽이려는 네가 왜 그러느냐는 말이 되고, 네가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느냐는 말이 되고, 나는 왜 그런 사람이었느냐는 질문이 된다. 한 발 더 나아가 내가 왜 지금의 내가 되었느냐는 질문까지. 문법은 분명한데 주어가 무너진다.

기억과 감정과 행동 가운데 무엇이 사람을 그 사람으로 만드는가. 기억하지 못하는 죄를 자기 죄라고 부를 수 있는가. 감정이 사라진 뒤에도 과거의 약속은 유효한가.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를 증오한다면 어느 쪽이 진짜 나인가. 그리고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 가운데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가.

야이샤의 기억은 서랍 하나가 통째로 비어버린 식의 기억상실이 아니다. 야이샤는 정신적으로 무너진 사람도 아니다. 다만 기억과 현재의 의식을 잇던 길이 끊겼고, 가라앉은 기억은 그때 품었던 감정이 되살아날 때마다 일부씩 끌려 올라온다. 그래서 과거를 안다는 것과 과거를 자기 일로 느낀다는 것이 일치하지 않는다. 정보는 돌아오는데 실감은 돌아오지 않고, 몸은 기억하는데 마음은 남의 기록을 읽듯 멀다. 이 장치 때문에 과거는 설명으로 정리되는 뒷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심장을 조이고, 위액을 끌어올리고, 악몽 속에서 칼을 들고 현재를 공격한다. 지나간 나는 회상되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찾아온 사람이다.

야이샤를 공격하는 눈앞의 ‘야이샤’는 샤를로 살았던 6년의 야이샤다. 시린골 미궁에 들어갔던 차림 그대로. 기억을 잃기 전의 사람. 증오를 품고, 복수를 약속하고, 자기를 무시한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증명하려 했던 사람. 지금의 야이샤는 그 시간을 모른다. 그 증오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도, 그 결심이 얼마나 절실했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실감하게 할 감정의 연결 자체가 잘려 있다.

과거의 야이샤는 그래서 현재의 야이샤를 배신자로 볼 수밖에 없다. ‘네’(내)가 품어온 증오를 집어삼킨 괴물과 왜 웃느냐. ‘네’(내) 복수를 망친 괴물과 왜 함께 다니느냐. 영수림은 현재의 야이샤에게는 동료지만 과거의 야이샤에게는 기억과 감정을 강탈한 존재다. 현재에 새로 생긴 관계가 과거에는 강탈자와의 강제 화해가 된다.

영수림이 한 일은 단순한 포식도, 단순한 구조도 아니다. 그는 야이샤를 죽이는 대신 그녀의 의식에서 6년의 기억을 끊어 미궁이 더는 그녀를 설계자로 인식하지 못하게 했다. 야이샤는 살아남았고 미궁과 분리됐다. 그러나 살아남기 위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목숨을 구한 행위가 정체성을 훼손한 행위와 같다.

둘의 동행을 가해자와 피해자의 화해라고만 부르면 모자라고, 구조자와 생존자의 우정이라고 부르면 더 어색하다. 그렇다고 적과의 동침이라 이름 붙일 수도 없다. 현재의 친밀함은 과거의 폭력 위에서 생겼고, 과거의 폭력은 현재의 친밀함 때문에 없어지지 않기에, 이 관계에는 정산이 없다. 다만 같이 움직이는 현재의 시간이 쌓인다.

그럼 이건 치유인가, 배신인가, 혹은 구원인가. 야이샤는 자기 과거의 상처를 ‘인지’한 뒤 놓아주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고통을 나눌 수가 없다. 상처를 느낄 기관을 빼앗겼다. 용서한 것이 아니라 용서하지 못하게 하던 감정이 사라졌다. 평온은 얻었지만 그 평온에 자기 동의는 없었다. 고통이 사라졌다면 무조건 구원인가.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증오를 제거당한 뒤 더 나은 인간으로 살게 되었다면, 결과를 근거로 과정의 폭력을 면책할 수 있는가.

과거의 야이샤는 안 된다고 말하며 칼을 든다. 현재의 야이샤는 그 칼을 막으며 외친다.

“나더러…… 어쩌라는 건데!”

완결된 윤리적 답변은 아니다. 과거의 자신을 설득하지도 못하고, 영수림을 변호하지도 못하고, 자기 결백을 주장하지도 못한다. 실제로 선택 가능한 깨끗한 답이 없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감정을 되살릴 수도 없고, 현재의 관계를 거짓이라고 할 수도 없고, 과거의 고통을 모른 척할 수도 없다. “나더러 어쩌라는 건데”는 답변이 아니라 모순을 거짓말로 봉합하지 않겠다는 고백이다. 이 장면에서 야이샤의 말은 힘이 없다. 과거의 야이샤가 복수와 증명을 되풀이하는 동안 현재의 야이샤는 제대로 된 논리를 세우지 못한다.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는 말조차 단검에 끊겨 두 번에 나뉘어 나온다. 옷이 찢어지고 날이 피부에 닿은 뒤에야 문장이 끝난다. 현재의 야이샤는 과거를 논파해서 이기는 게 아니다. 몸을 비틀어 빠져나와 도망치고 계단 위에서 흐륀과 라카바 사이로 얼굴이 흔들리는 남자를 만나 외친다.

“미친년이 절 죽이려 하거든요. 비키세요!”

완벽한 블랙코미디다. 당장 칼을 든 사람을 가리키는 욕설로는 너무나 일상적인데, 그 미친년이 자기다. 살기 위해서는 상대를 우선 남으로 타자화해서 불러야 한다. ‘나’라고 부르는 순간 도망치는 사람과 쫓아오는 사람이 같은 문장 안에 갇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흐륀의 “당신을요?”라는 되물음이 우스우면서도 정확하다. 야이샤는 결국 “제가 잃어버린 저요!”라고 답한다. 문법적으로는 터무니없는 변명 같지만, 이 인물의 상태를 그보다 정확하게 요약할 문장도 없다. 그 말을 받아내는 사람의 얼굴이 흐륀과 라카바 사이에서 계속 바뀐다는 점도 중요하다. 자기 얼굴이 없는 자가 둘로 갈라진 야이샤 앞에 서 있다. 그는 신분을 벗고 갈아입을 수 있지만 야이샤는 과거의 자기를 벗을 수 없다. 여러 사람이 될 수 있는 자와 한 사람이면서 둘로 찢어진 자가 계단에서 마주한다. 이때 남자가 “우선 당신 자신부터 구하셔야죠”라고 말한다. 당장의 목숨부터 구하라는 말이면서, 과거의 자기에게서 현재의 자기를 구하고, 갈라진 두 자아 가운데 앞으로 살아갈 한 사람을 만들어내라는 말이 된다. 그런데도 끝내 심장을 찔린다. 그제야 야이샤는 악몽 밖에서 눈을 뜬다. 살아남은 건 승리가 아니라 생각을 계속하기 위한 조건이다. 혹은 굴레. 야이샤는 답을 완성해서 다음 선택권을 얻는 것이 아니라, 답을 못한 채 깨어나 다시 생각함으로써 그 권리를 놓치지 않는다.

기억상실은 여기서 정보 은폐 장치가 아니라 재판정이 된다. 판사와 검사와 피고인이 전부 같은 사람인데 서로의 기록을 공유하지 못하는 재판정. 야이샤는 과거의 행동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미궁석과 공범과 설계와 희생자는 남아 있다. 자기는 백지가 되었는데 세계에는 이미 자기 필체가 가득하다.

나는 하지 않았다.

내가 했다.

둘 다 맞다. 현재의 의식으로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몸과 이름에 이어진 시간 속에서는 분명히 했다. 체험의 주체로 보면 타인이고 인과의 주체로 보면 자기다.

“기억하지 못하니 무죄”라고 하면 피해자에게 거짓말이 되고, “내가 모두 했고 진심으로 뉘우친다”고 하면 현재의 자기에게 거짓말이 된다. “내 죄다”라고 말하면 감정이 따라오지 않고, “내 죄가 아니다”라고 말하면 결과가 따라온다. 어떤 문장을 완성해도 절반은 거짓이다.

이 추상적인 형벌은 바이류드의 옷을 통해 육체를 얻는다. 두메초롱성에서 야이샤는 눈에 띄는 왕립대학의 고급 로브를 벗으려 한다. 빈민촌에서 희락초를 조사하려면 신분을 감춰야 한다. 여관집 소년 바이로드에게 남는 여자 옷이 있느냐고 묻자 소년은 누나가 쓰던 옷을 건넨다. 허락은 받지 않아도 된단다. 누나는 사라졌으니까. 야이샤가 펑퍼짐한 원피스와 누더기 같은 후드를 입고 나오자 바이로드가 말한다.

“누나 옷이 딱 맞네요.”

피해자가 돌아와 입어야 할 옷을 가해자가 대신 입는다. 사라진 사람의 빈자리에 그 사람을 사라지게 만든 몸이 정확히 들어맞는다. 바이로드는 아무것도 모른 채 누나의 유품을 누나의 죽음에 책임 있는 사람에게 건네고, 야이샤 역시 아무것도 모른 채 그 옷을 입는다. 우연이지만 형벌처럼 정확한 우연이다. 야이샤는 고인의 옷을 빌린 만큼 최소한의 도리를 하려고 누나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묻는다. 이름을 묻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해서. 그러나 대답을 들을수록 ‘도리’는 감당할 수 없는 빚이 된다.

미궁 수사관 바이류드. 시린골에 나타난 미궁의 1차 구출대에 들어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바이로드의 누이.

6년의 기억이 거세 된 야이샤. 미궁의 설계자. 1차 구출대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한 장본인.

야이샤는 바이류드의 옷만 빌린 게 아니다. 야이샤는 바이류드가 살아 있었다면 계속 살아냈을 시간을 빌려 입는다. 가족에게 돌아와 다시 입었어야 할 원피스를 입고, 바이류드가 걸었어야 할 거리를 걷는다. 피해자에게서 빼앗긴 이후의 삶을 가해자가 잠시 대신 산다. 야이샤는 이 사실을 깨달은 뒤에도 제대로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 기억은 사슬에 묶인 액자처럼 떠오른다. 바이류드의 얼굴도, 그녀의 식탐도, 1차 구출대의 죽음도, 자기가 시린골 미궁을 만들었던 일도 돌아온다. 몸은 비틀거리고 심장은 조인다. 야이샤는 토한다. 그러나 아무런 죄책감이 없다. 기억을 끌어올린 감정은 미안함이 아니라 당시 구출대와 미궁부를 향해 품었던 원망과 분노다. 자기를 미궁에 들여보내지 않은 사람들을 미워한 감정이 그들이 자기 때문에 죽은 기억을 되살린다. 감정을 토해내고 싶지만 식도를 찌르는 위액밖에는 내놓지 못한다.

몸에는 피해자의 옷이 꼭 맞는데, 마음에는 가해자의 죄책감이 맞지 않는다. 가장 가혹한 형벌은 여기서 완성된다. 사실은 아는데 감정이 없고, 몸은 반응하는데 마음은 따라오지 않는다. 처벌받으면 죄를 기억하지 못하는 현재의 야이샤가 받고, 용서받으려 해도 죄를 저지른 과거의 야이샤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무죄를 주장하면 바이류드를 배신하고, 유죄를 고백하면 느끼지도 못하는 죄책감을 연기하게 된다.

오이디푸스는 역병의 원인을 추적하다가 자기가 그 원인이었음을 알아낸다. 진실 자체가 형벌이고, 그는 그 진실을 느낄 수 있기에 자기 눈을 찌른다. 야이샤도 사건을 수사하다 자기 죄를 발견하지만 오이디푸스에게 허락된 죄책감과 자기처벌의 카타르시스조차 갖지 못한다. 진실은 돌아왔는데 진실을 받아낼 감정은 돌아오지 않았다.

헤라클레스는 반대편에서 같은 자리를 비춘다. 그는 광기에 사로잡힌 동안 자기 손으로 가족을 죽이고, 제정신으로 돌아온 뒤 그 행위를 떠안는다. 죄를 지은 정신과 죄를 떠안는 정신이 다르다는 점에서는 야이샤와 같다. 다만 순서가 뒤집혀 있다. 헤라클레스는 제정신이 아닌 동안 저지른 일을 제정신으로 상속하고, 야이샤는 제정신으로 저지른 일을 전혀 다른 제정신으로 상속한다. 그래서 헤라클레스에게는 광기라는 이름의 방벽이 있다. 그때의 나는 내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는 자리.

야이샤에게는? 그 자리가 없다. 그때의 그녀는 온전한 정신의 자기 자신이었다.

오이디푸스와 헤라클레스의 두 비극 모두 인식과 고통이 만나는 순간 완성된다. 눈을 찌르는 손과 그 죄를 알아본 눈이 같은 사람의 것이다. 야이샤에게는 그 만남이 없다. 그러니 이 소설은 고전 비극을 한 단계 더 밀어붙인 것이 아니라, 비극이 성립하기 위한 조건 하나가 빠진 자리에서 무엇이 남는지를 보게 한다. 남는 것은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절차다. 느낄 수 없어도 해야 할 일이 있고,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니 가장 지독한 형벌은 가장 심하게 아파하는 일이 아니다. 마땅히 아파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아픔에 영원히 도달하지 못하는 일이다. 법은 같은 몸을 처벌할 수 있고, 사람들은 같은 이름을 비난할 수 있다. 그러나 회개와 용서는 감정적으로 이어진 한 사람을 전제한다. 야이샤는 바로 그 전제에서 밀려나 있다. 야이샤에게는 자기 구원이 허락되지 않는다.

바이류드의 옷은 야이샤에게 묻는다. 네가 우리에게 무슨 짓을 했는가.

과거 야이샤의 옷은 야이샤에게 묻는다. 네가 나를 어떻게 버릴 수 있는가.

가해자로서의 죄를 묻고, 피해자로서의 상처를 묻는다. 야이샤는 어느 옷도 벗을 수 없다. 바이류드의 옷을 벗는다고 바이류드가 돌아오지 않고, 과거의 자기 옷을 벗는다고 자기 상처가 사라지지 않는다. 악몽의 칼은 옷자락을 가르고 피부에 닿아 마침내 심장을 찌른다. 피해자와 가해자, 샤를과 야이샤, 과거와 현재가 외투처럼 갈아입을 수 있는 역할이 아니라 한 몸의 통증으로 들어온다.

두 옷의 배치도 정확하다. 낮의 야이샤는 죽은 타인의 옷을 자기가 누구인지 모른 채 빌려 입는다. 밤의 야이샤는 죽어버린 과거의 자기가 입었던 옷과 강제로 마주한다. 하나는 몸에 꼭 맞고, 하나는 칼날에 찢긴다. 하나는 바깥의 피해자를 현재 안으로 들이고, 하나는 안쪽의 피해자를 현재 앞으로 끌어낸다.

옷은 몸과 세계 사이에 걸쳐 있는 물건이다. 내 것이면서 내가 아니고, 벗을 수 있지만 입고 있는 동안에는 내 모습을 결정한다. 소설은 기억과 동일성이라는 추상적인 문제를 옷으로 옮겨놓는다. 죄를 완전히 내 몸이라고도, 잠시 걸친 남의 옷이라고도 할 수 없는 상태. 야이샤가 입은 비극은 바로 그 중간에 있다.

처음에는 과거의 야이샤가 피해자로 보인다. 대학에서 배척당했고, 영수림에게 기억과 감정을 빼앗겼다. 그 분노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신천마궁과 시린골 미궁, 늘파란평원 미궁의 진실이 드러나면 장면은 다시 뒤집힌다. 칼을 든 과거의 야이샤는 피해자이면서 자기 상처를 거대한 구조물로 바꾸려 한 가해자다.

판사가 피고인이다.

피해자가 가해자다.

이 구도는 사람을 선과 악으로 가르는 대신 시간으로 가른다. 한 인간 안에서도 피해를 입은 시간과 피해를 주는 시간은 다를 수 있다. 상처받았다는 사실이 이후의 폭력을 정당화하지 않지만, 이후의 폭력이 과거의 상처를 가짜로 만들지도 않는다.

“나는 상처받았다.”

“나는 상처를 주었다.”

두 문장을 함께 견디는 것이 야이샤의 책임이다. 과거의 자기를 지우면 죄와 상처를 함께 지우게 되고, 현재의 자기를 죽이면 변화의 가능성이 사라진다. 어느 한쪽을 제거하는 대신 둘을 한 사람의 시간으로 묶어야 한다. 과거를 짓밟는 것이 아니라 그 무게를 발밑에서 느끼며 몸의 중심을 다시 잡는 일. 그것이 야이샤의 발돋움이다. 그래서 살아남는 일은 무죄 선언이 아니다. 과거의 야이샤는 증오를 잃고 살아가는 너는 내가 아니므로 죽으라고 한다. 과거의 동일성을 지키기 위해 현재의 생명을 없애려 한다. 그러나 현재의 야이샤는 끊어져 나오는 말로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고 맞선다. 과거의 상처가 하찮아졌다는 뜻이 아니다. 그 상처를 증명하기 위해 더는 누군가를 파괴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복수를 포기해도 상처는 진짜다. 계속 불행하지 않아도 과거를 배신한 것은 아니다.

야이샤의 성장은 과거를 극복하는 데 있지 않다. 과거는 지워지지도 완전히 이해되지도 않는다. 그녀가 해야 할 일은 과거의 상처와 오만, 현재의 무지와 선택을 한꺼번에 감당할 만큼 과거의 자기보다 커지는 것이다. 다만 소설은 야이샤가 이미 그만큼 커졌다고 쉽게 인증하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영수림의 윤리가 야이샤에게 돌아온다. 감정갈귀인 영수림은 인간의 내면을 훼손하는 괴물이면서 200년 동안 왕국에 충성한 미궁수사관이다. 카르엠은 그의 충성을 인간의 경의를 흉내 낸 껍데기라고 조롱한다. 영수림은 말의 근거는 행동에 있고, 오랜 시간 남는 행함이야말로 진심이라고 답한다.

야이샤는 과거의 죄를 감정으로 느낄 수 없다. 그렇다면 책임도 가짜인가. 영수림의 기준에서는 아니다. 진심이 먼저 있고 행동이 뒤따르는 것만은 아니다. 행동이 오래 쌓여 진심이 되기도 한다. 앞서 언급했던 카타르시스 대신 남은 ‘절차’가 바로 여기서 이름을 얻는다.

영수림은 인간다운 감정을 가졌기 때문에 충성하는 것이 아니다. 충성하는 행동을 반복했기 때문에 충성스러운 존재가 된다. 야이샤 역시 죄책감을 복원했기 때문에 책임의 자리에 서는 것이 아니다. 책임지는 행동을 선택하면서 그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둘은 기묘하게 닮았다. 영수림은 감정을 먹는 자이고 야이샤는 감정을 먹힌 자다. 한쪽은 타인의 내면을 빼앗아 살아왔고, 다른 한쪽은 내면을 빼앗긴 채 살아간다. 바로 그 둘이 함께 수사하며 현재의 행동으로 새로운 윤리를 만든다. 관계는 용서나 화해로 깨끗하게 정산되지 않는다. 빚과 불편함과 친밀함이 함께 남는다. 중요한 것은 관계가 어떤 과거에서 시작되었는가만이 아니라 앞으로 무엇을 반복하는가다.

후반부에는 이 관계를 한 번 더 뒤집는 장면이 있다. 카르엠의 미궁에 삼켜진 사람들은 살아 있으면서도 미궁의 장치로 변해 있다. 야이샤는 영수림에게 자기에게 했던 일을 한 사람에게 다시 해보라고 요구한다. 의식과 미궁의 연결을 끊어, 미궁이 그 사람을 더는 같은 존재로 알아보지 못하게 만드는 일이다. 영수림은 그러려면 감정 대부분을 삼켜야 한다고 말하고, 야이샤는 미궁의 장치로 사는 것이 생명의 존엄한 형태는 아니라고 답한다. 자기를 훼손한 방식이 다른 사람을 구하는 방법이 되는데, 구하는 방식이 훼손이라는 사실 자체는 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야이샤는 검은 촉수가 아이의 귓구멍으로 파고드는 것을 지켜보다 묻는다. 저한테도 똑같았느냐고. 귀여운 비명을 질렀다는 대답을 듣고 그녀는 뒤돌아 헛구역질한다. 자기 몸에 일어났던 일을 눈으로 처음 보면서도 그것을 기억으로는 되찾지 못한다. 바이류드의 옷 앞에서와 같은 반응이다. 정보는 도착하는데 실감은 위액으로만 나온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 일을 하기로 한다.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가장 깊이 아는 사람이기에 그 원리를 구조의 기술로 전환한다. 피해의 기억을 복수의 설계도로 쓰지 않는 쪽을 고른다. 이것이 과거의 자기보다 커져야 한다는 말의 실제 내용이다.

이 질문은 미궁이라는 설정을 통해 세계 전체로 확장된다. [미궁 사변]의 미궁은 몬스터를 넣어둔 던전이 아니다. 욕망이 물질이 된 건축물이다. 현대의 미궁은 하나의 미궁석과 하나의 설계자, 하나의 욕망이 일대일로 대응하고, 고대의 마궁은 여러 미궁석과 수많은 사람의 잠재의식이 뒤섞여 만들어진다. 이 세계에서 마음은 사적이지 않다. 한 사람이 품은 욕망이 벽과 길과 함정이 되고 타인의 죽음이 된다. 힘과 매개를 만나면 생각은 구조가 되고, 구조는 사람을 움직이고 가두고 먹는다. 야이샤는 자기 머릿속의 이론을 타인이 죽는 공간으로 번역했다. “나는 생각만 했을 뿐”이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생각이 설계가 되고 설계가 세계가 되었으니까. 그 죄가 곧 미궁을 해체할 능력이 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야이샤가 아무 관련 없는 깨끗한 영웅이라면 선한 사람이 악한 구조를 파괴하는 단순한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구조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그 구조의 공범이다. 미궁을 해체하려면 자기가 한때 무엇을 욕망했는지 이해하고 자기 죄의 문법을 읽어야 한다. 설계자였던 사람이 자기 작품을 비평하는 사람이 된다. 늘파란평원의 미궁은 개인의 밀실에 머물지 않는다. 사람과 땅을 집어삼키며 늘초롱성까지 확장되고, 그 안의 주민은 살아 있는 자원과 장치로 치환된다. 그 일을 벌인 카르엠은 모사꾼이다. 본래 남의 몸짓과 말과 의도를 읽어야 하는 자가 마침내 읽는 일 자체를 버리고, 타인을 자기 안으로 동화시키는 방법을 택한다.

카르엠의 동화는 이 구조의 반대편에 있다. 그는 사람을 죽이는 데서 멈추지 않고 몸과 바닥, 의복과 살, 개인과 미궁의 경계를 허문다. 그가 꿈꾼 하나됨 안에는 타인이 없다. 타인의 의지는 재료가 되고 다른 욕망은 제거할 변수가 된다. 그는 세계를 이해하지 않는다. 세계를 자기로 만들어 이해할 필요 자체를 없앤다.

왜 대화하겠는가. 삼키면 되는데.

왜 설득하겠는가. 조종하면 되는데.

왜 사랑하겠는가. 소유하면 되는데.

카르엠은 차이를 견디지 못한다. 그러나 모사꾼은 본래 차이를 읽는 사람이다. 나와 남이 다르고, 상대가 내가 모르는 것을 알고 있으며, 얼굴과 말과 의도가 어긋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읽는다. 카르엠은 모든 사람을 자기로 만들면서 더는 속일 남도 읽을 남도 없는 세계를 만들고 만다. 이 파국은 작품 중반의 모사꾼 비평에 이미 예고되어 있다. 모사꾼은 어디까지나 외피를 흉내 내고, 그 외피를 통해 내면을 묘사한다. 작품은 이를 미궁의 외형에서 설계자의 욕망을 읽는 미궁 비평과 같은 일이라고 짚어준다. 그리고 “모사꾼의 정신은 모사꾼 고유의 것입니다”라고 못 박는다. 남의 정신까지 그대로 모사할 수 있다면, 외피를 선택하고 배열하며 해석하는 고유한 주체가 사라져 더는 한 개인으로 성립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사꾼에게도 기호가 있다. 무엇이든 흉내 낼 수 있다는 사실보다 무엇을 골라 흉내 내고, 그 외피를 어떤 무대에 올리며, 거기서 무엇을 얻으려 하는지가 그 사람을 드러낸다. 카르엠의 화려한 광대 복식과 끊임없는 연극 비유, 관객과 대본에 대한 집착은 진짜 내면을 감춘 무의미한 껍데기가 아니다. 수많은 껍데기 가운데 그것을 거듭 고르는 취향이야말로 카르엠의 필체다. 남의 말과 몸짓은 빌릴 수 있어도, 무엇을 빌릴지 결정하는 욕망은 그의 것이었다. 카르엠은 바로 그 한계를 뛰어넘는 일을 자기의 완성이라고 착각한다. 타인의 외피를 읽고 재현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타인의 몸과 의식을 자기 안으로 들인다. 그 순간 모사는 비평이 아니라 흡수가 된다. 남을 바라보는 자기와 바라보는 대상 사이의 거리가 사라지고, 모사꾼의 유일한 고유 영역이던 정신까지 수천, 수만 명의 의식에 점령당한다. 물론 이것이 저절로 일어난 것은 아니다. 직접적인 역전은 카르엠이 야이샤를 동화하면서 벌어진다. 카르엠은 야이샤를 또 하나의 변수처럼 자기 안에 넣지만, 야이샤의 몸은 이미 야이샤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영유기의 신체가 퍼져 있다. 카르엠의 동화가 영유기에게까지 닿자 영유기는 그 연결을 타고 카르엠에게 묶인 수많은 영혼에 접촉하고, 미궁과 동화망의 주도권을 빼앗는다. 모든 의식의 중심이라고 믿었던 카르엠이 그 순간 자기가 삼킨 사람들과 같은 위치로 내려간다.

이 서사적 원인과 모사꾼의 정신에 관한 주제적 원인은 정확히 맞물린다. 카르엠은 모두를 자기에게 종속시키기 위해 자신과 미궁과 타인의 경계를 하나로 묶었다. 그래서 중심의 소유권을 빼앗기는 순간 자기 정신을 지킬 마지막 경계도 함께 열린 것이다. 자신을 세계 전체로 확장한 것이 아니라, 자기라는 자리를 더 강한 다른 존재가 빼앗을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놓은 셈이다. 영유기는 그가 만든 통로를 이용했을 뿐이다.

이 똑똑해서 멍청한 모사꾼은 특별한 자신을 확장하려 했지만 수많은 타인 때문에 평범한 감각을 갖는다. 모두가 되려다가 모두를 모사할 ‘나’부터 없애버린다. 그런 뒤에 “난…… 이제 모사꾼이 아니라는 건가?”라고 묻는다. 이것은 죽기 직전의 의문이 아니라 이미 내려진 판결의 확인이다. 카르엠은 육체가 죽기 전에 모사꾼으로서, 그리고 한 개인으로서 먼저 죽었다.

야이샤는 자기 안의 분열을 견딘다. 기억하는 나와 기억하지 못하는 나, 가해자인 나와 피해자인 나, 샤를과 야이샤를 어느 하나 지우지 않는다. 카르엠은 분열을 견디지 못해 모든 것을 하나로 만들고, 그래서 자기가 사라진다. 야이샤는 불완전해서 살아남고 카르엠은 완전해지려다 무너진다. 그를 무너뜨리는 힘 역시 한 사람의 완전함이 아니다.

[미궁 사변]의 핵심 재난은 누군가가 단순히 무능해서 키운 사고가 아니다. 첫머리부터 “절차 위에서 매끄럽게 흘러갔다”라고 못 박는다. 사람들은 보고하고 추론하고 기억하고 정보를 남긴다. 미궁부는 조사대를 보내고, 성주는 성문을 닫고 명단을 만들며, 경비대는 이상을 확인한다. 1차 조사대가 돌아오지 않자 더 숙련된 2차 조사대를 보내고, 그들마저 사라지자 미궁에 진입하지 않고 멀리서 위치만 확인할 3차 조사대를 준비한다. 성주는 출입을 통제하고 밖으로 나간 주민의 명단을 만들며 중앙에 보고한다. 핵심 대응에서 멍청해서 놓친 단계가 없다. 오히려 단계마다 합리적이다.

그런데도 무너진다. 공포는 여기서 발생한다. 해야 할 일을 했는데도 닿지 못하는 공포. 절차는 매끄럽게 흘렀고 바로 그 절차 바깥에서 미궁이 자랐다. 시스템은 자기가 아는 재난에 맞춰져 있다. 새로운 재난은 시스템이 가장 성실하게 움직이는 동안 빈틈으로 들어온다.

중앙에 도착한 두 편지. 하나는 3차 조사대 파견과 지원을 알리고, 다른 하나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적는다. 필적도 종이도 진짜인데 내용만 양립할 수 없다. 전서구가 쉬어야 하는 거리와 편지가 도착한 시간까지 계산하면 전달 방식도 불가능하다. 여기서 행정 정보는 설정 설명이 아니라 추리의 증거가 된다. 독자는 괴물의 얼굴을 보기 전에 보고 체계에 난 작은 오차부터 본다. 그래서 행정과 절차가 배경에 머물지 않는다. 편지의 도착 시각, 전서구가 쉬어야 하는 거리, 어느 성이 우선 대피처인지, 사무실의 위치가 사람을 살리거나 죽인다. 판타지에서 세계를 구하는 힘이라고 하면 검기와 마법을 떠올리지만, 여기서는 주소를 아는 것도 힘이고 보고서의 문체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알아보는 것도 힘이다.

인물마다 진실에 도착하는 방법도 다르다. 퀜티마는 확인된 사실을 믿고, 야이샤는 이론과 가능성으로 아직 보이지 않는 구조를 만든다. 영수림은 오래 반복된 행동을 보고, 르르헨은 사람을 본다. 카르엠은 통제하면 안다고 믿고, 그림자의 남자는 타인을 타인으로 둔 채 기만을 통해 읽는다. 누구도 완전하지 않다. 그 누구도 완전히 ‘안다’고 할 수 없다. 사실만 보는 사람에게 상상하는 사람이 필요하고, 이론으로 멀리 가는 사람에게 현장을 기억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사람을 믿는 자의 편지가 의심하는 자에게 도착한다. 전지성은 한 머릿속에 모든 정보를 넣는 일이 아니라 서로 다른 머리들이 서로 다른 채 연결되는 일이다.

그 중심에 르르헨이 있다. 그는 뛰어난 마법사도 강한 기사도 아니다. 판단이 빠른 사람도 아니다. 오랜만에 상상력을 발휘하려니 두통이 오고, 카르엠 앞에서는 몸의 통제권을 빼앗기고 자기가 어떤 꼴로 죽을지를 울부짖는다. 그는 끝까지 울고 더듬고 공포에 떤다. 손이 뜯긴 뒤에도 엉엉 운다.

그래서 용감하다. 용기는 두려움이 사라진 얼굴이 아니라 두려워하는 몸으로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르르헨은 자기가 카르엠을 이길 수 없다는 걸 안다. 대신 왕립대학 에르빈의 사무실과 두메초롱성 퀜티마의 사무실 위치를 안다. 표면적으로 사소한 정보지만 카르엠의 마법은 편지를 그곳으로 보낼 수 있다. 르르헨은 자기를 조종하는 적의 마법을 빌려 경고를 보낸다.

마법보다 더 마법 같은 것은 상상력이다. 두통을 일으키던 상상력이 마지막에는 도시 바깥으로 편지를 보낸다. 더 중요한 것은 르르헨이 자기가 해결할 사람을 정확히 고른다는 점이다. 그는 퀜티마처럼 싸우거나 에르빈처럼 미궁을 알지 못한다. 대신 그들이 해낼 수 있다는 걸 안다. 사람을 본다는 건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을 남이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 승리의 모양도 르르헨답다. 그는 편지를 쓰라는 카르엠의 명령에 따르는 척하다가 자기가 아는 두 사무실의 위치를 큰소리로 말한다. 카르엠의 마법은 쓰지 못한 내용을 채우고 편지를 복사해 두 곳으로 전송한다. 르르헨은 적보다 강해진 것이 아니라 적의 힘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한 번 더 상상한다. 힘의 소유권은 카르엠에게 있지만 사용법의 마지막 한 칸은 르르헨이 빼앗는다. 카르엠은 모든 사람을 자기 부품으로 만들지만, 르르헨은 자기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순간에도 다른 사람이 해낼 몫을 남긴다. 카르엠은 서 있는 채 무너지고 르르헨은 울면서 이긴다. 르르헨이 중요한 이유는 다만 용감해서만이 아니다. 그는 끝까지 자기 안에서 하나가 되지 못한다. 똥오줌을 지린 채 죽을 거라고 울부짖는 자기와 조상 앞에 부끄럽지 않으려는 성주가 화해하지 않은 채로 같은 몸에 있다. 그런데도 편지는 간다. 카르엠은 자기 안의 이물을 전부 삼켜 하나가 되려다 자기를 잃었고, 야이샤는 둘로 찢어진 채 걷기로 했으며, 르르헨은 갈라진 상태 그대로 손이 뜯기면서 할 일을 한다. 이 소설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은 통합이 아니라, 통합되지 않은 채로 움직이는 능력이다.

이 작품이 행동으로 진심을 증명하는 방식은 거대한 결단에만 머물지 않는다. 늘초롱성의 참사에서 가장 오래 남는 것은 사망자 수가 아니라 샌드위치다. 나무꾼 궨트가 집에 돌아왔을 때 아내는 피부 가죽만 남아 있고 아들은 그 옆에서 운다. 아내는 마지막 순간까지 남편을 위한 샌드위치를 만들려 했다. 수천 명이 죽었다는 문장은 크지만 멀다. 돌아올 사람을 생각하며 샌드위치를 만들다 죽었다는 사실은 작지만 가깝다. 재난은 인구가 줄어드는 사건이 아니라 끝나지 못한 행동을 남기는 사건이 된다. 먹지 못한 저녁, 건네지 못한 한 끼, 돌아오지 못한 사람. 아내가 남편을 사랑했다고 설명할 필요도 없다. 샌드위치를 만들고 있었다. 그 행동 하나가 관계를 증명한다. 영수림의 200년짜리 충성과 죽기 직전의 한 끼가 같은 문법을 가진다. 그런데 샌드위치는 아무도 구하지 못한다. 궨트가 이틀 뒤 그것을 챙겼을 때, 누가 먹지도 않았는데 이미 반이 사라져 있다. 숲에서 다시 꺼내자 반의반만 남아 있다. 아들은 배고프다고 하고, 궨트는 도끼를 들었다가 나무에 내던지고 아들을 업어 집으로 돌아온다. 그래도 아들은 사라지고, 궨트도 나중에 침대 위에서 사라진다. 아내에서 아들로, 아들에서 남편으로 소멸이 옮겨가고, 살리려고 만든 음식까지 재난 안에서 줄어든다. 그러니 이 샌드위치를 ‘먹여서 살리는 인간’의 승리로만 읽으면 장면의 절반을 잃는다. 이것은 구원에 성공한 음식이 아니다. 재난에게 자신까지 먹히면서도 끝까지 다른 사람 쪽을 향하고 있는 음식이다. 돌봄은 패배한다. 그런데 패배했다고 해서 포식과 같은 행위가 되지는 않는다.

이 소설에는 먹는 존재가 많다. 영수림은 기억과 감정을 먹고, 미궁은 사람과 공간을 삼키고, 카르엠은 타인의 의식을 자기 안으로 동화시킨다. 반면 인간은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육포를 나누고, 으깬 감자를 먹이고, 샌드위치를 만든다. 그러나 그 차이는 누가 실제로 살았는가에서만 생기지 않는다.

상대를 없애기 위해 먹는 것. 상대가 계속 존재하길 바라며 먹이는 것.

카르엠의 동화는 너를 내 안에 넣어 너를 없앤다. 궨트 아내의 샌드위치는 내가 만든 것을 네게 건네 네가 살기를 바란다. 한쪽은 다른 존재를 자기 안에서 소거하고, 한쪽은 자기 밖의 존재가 계속 자기 밖에 남기를 바란다. 결과가 아니라 방향이 다르다.

궨트의 가족 중에 그 샌드위치를 기억할 사람이 없다. 아무도 남지 않았다. 작품 속의 누구에게도 보고되지 못한 그 끝나지 않은 저녁을 서술자와 독자만 받아든다. 그래서 샌드위치는 그 가족이 남긴 말 없는 보고서가 된다. 편지와 비석에 이름이 남기 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향해 하던 일이 있었다는 기록이다. 이처럼 사건의 진실은 칼보다 기록과 말에 오래 남는다.

편지는 자리에 없는 사람의 행동이다. 쓴 사람은 보이지 않지만 필체와 종이와 문장과 도착 경로가 그를 대신한다. 기억을 잃은 야이샤가 흔적으로 과거의 자기를 추적하듯 수사관들은 문서로 보이지 않는 발신자를 찾는다. 미궁 역시 설계자의 욕망이 쓴 거대한 편지다. 벽과 함정과 동선이 필체다. 미궁수사는 공간을 읽어 보이지 않는 사람을 추론하는 비평이 된다.

편지와 미궁과 모사는 모두 남긴 것으로 남긴 자를 복원하는 일이다. 그래서 늘파란평원의 미궁 앞에서 탈라이라가 무너지는 순간이 무섭다. 그녀는 이 미궁에 인간의 불완전함이 없다고, 그러니 자기가 평생 훈련한 비평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읽을 수 있다는 믿음이 무너지는 자리다. 참새의 마음을 아무리 읽어도 무의미하듯이. 이 소설에서 가장 큰 공포는 괴물이 강하다는 것이 아니라 읽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읽히지 않는 것은 미궁만이 아니다. 이름과 얼굴과 말투도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야이샤는 샤를이었고, 진짜 라카바와 라카바의 삶을 연기한 자, 그를 스승으로 둔 흐륀, 메를롱의 몸과 말을 벗어던지는 이름 없는 남자가 포개진다. 이들은 단순히 한 사람이 얼굴을 바꾸어 다니는 변신술의 사례가 아니다.

외형도 목소리도 신원의 보증서가 되지 못한다. 모사의 규칙마저 누가 그 규칙을 어떻게 우회했는지 알기 전까지는 단서일 뿐이다. 이름 없는 남자는 메를롱의 목소리와 말투를 완벽하게 재현한 뒤 다시 버린다. 그의 지문은 오히려 고정된 지문이 없다는 데 있다. 웃음과 발음마저 옮겨 다니는 세계에서 목소리는 정체의 본질이 아니라, 누군가를 읽기 위한 증거이자 다른 누군가가 뚫어 쓸 수 있는 가면이다.

카르엠은 화려한 광대 복식을 입고 세계를 자기 무대로 만든다. 사람은 관객이거나 배우이거나 소품이다. 대본을 쓰는 사람은 자기뿐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르르헨이 다른 편지를 보내고, 야이샤가 샤를의 역할을 거부하고, 메를롱이 더 완벽한 연기를 보여줄 때마다 그의 세계가 찢어진다. 카르엠의 하나됨은 모든 목소리를 한 소리로 만들지만, 이 소설의 사람들은 각자의 말투와 농담으로 끝까지 시끄럽다. 그래서 구조의 부품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을 역할 안에 배치하는 설계자는 카르엠만이 아니다. 개인의 미궁은 결국 왕국으로 확장된다. 야이샤가 왕국을 거대한 미궁 같다고 말하자 영수림은 모두가 왕국의 미궁석이지만 설계자는 소수라고 답한다. 설계자도 자기 미궁 안에서 죽고, 설계자가 예측하지 못한 요소가 내부에 존재한다는 점까지 닮았다. 왕국은 단순한 악이 아니다. 절차는 사람을 살리고, 미궁부와 대피 체계가 재난을 막으며, 영수림과 곰기와 그림자 같은 위험한 존재도 왕국의 통제 아래 사람을 구한다. 그러나 왕국은 사람에게 이름을 주고 서약을 새기고 역할을 부여한다. 카르엠이 육체를 구조에 붙인다면 왕국은 삶을 제도에 붙인다.

마지막 아이가 이 불편함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늘초롱성에서 살아남은 아이는 감정과 기억의 연결을 빼앗긴 뒤 ‘만물의 그림자’로 들어간다. 그곳에는 빼앗겨서 감정이 없는 아이와 처음부터 다르게 태어난 아이들이 함께 있다. 선생님은 그곳을 미궁이라고 부른다. 먹는 것과 먹이는 것의 대비는 이 아이가 감자죽을 받아먹는 장면에서 한 번 더 복잡해진다. 젊은 여자는 “넌 먹는 게 회복하는 거야”라고 말하고, 이번에는 온기가 아이의 몸에 돌며 실제로 다리에 힘이 들어간다. 먹이는 일이 드디어 한 사람의 몸을 회복시킨다. 하지만 아이를 기다리는 곳은 ‘만물의 그림자’다. 식사는 구호이면서 편입의 시작이고, 아이를 돌보는 손은 아이에게 새 역할을 가르칠 제도의 손이기도 하다. 먹이는 손은 살릴 수 있고 길들일 수도 있다. 소설은 먹는 것과 먹이는 것의 차이를 분명히 두면서도, 먹이는 행위 자체를 무조건 순결한 선으로 놓지는 않는다.

카르엠의 미궁은 무너졌다. 그런데 또 다른 미궁이 아이를 받아들인다. 카르엠은 사람을 물리적으로 동화시키려다 실패했다. 왕국은 비어버린 자리에 교육과 역할을 넣어 사회적으로 동화시킨다. 그러면 영수림의 윤리도 다시 흔들린다. 오래 반복한 행동이 진심이라면, 그 행동을 어릴 때부터 제도가 설계했을 경우 그 진심은 누구의 것인가. 행동이 중요하다는 말은 맞다. 그러나 행동을 누가 설계했는가도 물어야 한다. 이 질문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야이샤에게 이미 한 번 벌어진 일이다. 그녀의 기억을 끊은 것도 영수림이고, 서약을 씌운 것도 영수림이며, 지혜자로 만든 것 역시 윗선이 아니라 영수림 본인의 결정이었다. 야이샤가 직접 물었고 그는 그렇게 답했다. 감정과 기억의 연결을 잃은 사람에게 새 지식과 새 자리를 주어 살게 하는 일. 늘초롱성의 아이는 야이샤를 비추는 거울이 아니라 야이샤에게 이미 일어난 일의 반복이다. 다른 점은 아이 쪽에는 선생님이 있고 교실이 있다는 것, 그러니까 그것이 한 마물의 판단이 아니라 제도의 이름으로 행해진다는 것뿐이다.

그렇다고 왕국과 카르엠을 같은 것으로 놓을 수도 없다. 왕국의 제도는 실제로 사람을 살리고, 혼자서는 살아가기 어려운 아이에게 동료와 자리를 준다. 마지막 장면은 구조인 동시에 편입이다. 아이는 보호받지만 그 보호 속에서 새로운 이름과 역할을 배울 것이다. 소설은 그 양면 가운데 하나를 지워 결론을 편하게 만들지 않는다. 카르엠에게 동화는 타인을 없애는 완성이고, 왕국에게 동화는 타인을 쓸 수 있는 구성원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둘 사이에는 분명한 윤리적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타인을 자기 구조에 맞춘다는 점에서는 불편한 그림자가 겹친다. 미궁을 무너뜨린 뒤에도 설계와 자유의 문제가 남는 이유다.

소설은 ‘0. 미궁 출현’으로 시작해 ‘0. 미궁 사변’으로 끝난다. 출현은 이름 붙지 않은 현장이고, 사변은 제도와 역사가 붙인 이름이다. 현장이 기록이 되고 사람이 사건명이 된다. 그런데 숫자는 다시 0이다. 종결이 아니라 다음 시작점이다. 미궁 하나가 무너졌다고 미궁을 만드는 욕망이 사라지지 않았고, 야이샤가 현재의 자기를 선택했다고 과거의 죄가 소멸하지도 않는다.

야이샤는 이 소설의 윤리적 척추지만 작품 전체는 야이샤 한 사람의 내면극보다 크다. 르르헨의 편지, 궨트 아내의 샌드위치, 유벤하임의 절차, 퀜티마의 의심은 주인공 서사에 봉사하고 사라지는 곁가지가 아니다. 야이샤에게서 기억과 책임의 문제로 나타난 것이 다른 인물에게서는 신뢰와 직무, 돌봄과 연결의 문제로 변주된다. 한 사람 안에서 시작한 질문이 관계를 지나 도시와 왕국의 구조까지 넓어진다. 사건을 따라 읽는 독자에게는 추진력을 주고, 사건이 끝난 뒤 돌아보는 독자에게는 앞 장면을 다시 해석할 이유를 남긴다. 특히 강한 것은 추상적인 문제를 사물과 행동으로 바꾸는 능력이다. 동일성은 피해자의 옷이 되고, 진심은 200년의 충성과 만들다 만 샌드위치가 되며, 신뢰는 두 사무실의 주소가 되고, 통제는 사람과 바닥이 한 덩어리로 붙는 광경이 된다. 작가는 주제를 설명하는 대신 만지고 입고 먹고 보내고 삼킬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래서 관념이 큰데도 장면은 손에 잡힌다.

이 반복에서 작가의 윤리도 드러난다. 작가는 순수한 마음을 쉽게 믿지 않는다. 선한 의도는 미궁을 막지 못하고, 상처받은 과거는 이후의 죄를 지워주지 않는다. 대신 자기 일을 하는 사람을 믿는다. 보고서를 쓰는 사람, 성문을 닫는 사람, 부하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 편지를 보내는 사람, 겁에 질린 채 다음 사람에게 일을 넘기는 사람.

그러나 냉소적이지 않다. 사람의 내면이 불완전하다고 해서 모든 행동을 위선으로 돌리지 않는다. 오히려 마음이 흔들리고 기억이 끊기고 정체성이 바뀌어도 남을 위해 반복한 행동에는 실제 무게를 더한다. 인간을 고정된 본질로 믿지 않는 대신, 서로에게 건너가는 행위로 믿는다. 윤리는 감정의 빛깔보다 반복되는 동사에 가깝다. 믿는다. 지킨다. 쓴다. 보낸다. 먹인다. 막는다. 그리고 책임진다.

작가에게는 관료제적 상상력도 있다. 괴물의 생김새뿐 아니라 그 괴물이 나타났을 때 누가 첫 보고서를 쓰고, 어느 부서가 조사대를 보내며, 어떤 성이 피난민을 받아야 하는지까지 상상한다. 미궁석의 힘만큼 거리와 보고 체계의 힘을 진지하게 다루며, 사건을 한 인물의 모험이 아니라 여러 직무와 지역과 시간이 물고 물리는 책임의 연쇄로 본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제도를 좋아하는 마음이라기보다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하는 영웅을 믿지 않는 태도다. 작가는 뛰어난 한 사람보다 서로 다른 능력이 이어지는 과정을 오래 본다. 누군가는 현장을 보고, 누군가는 문장의 이상을 알아채고, 누군가는 사람을 믿으며, 누군가는 자기 죄 때문에 구조를 이해한다. 구원은 한 사람의 순결에서 나오지 않고 불완전한 사람들 사이의 인수인계에서 나온다. 그래서 작가의 마음은 여러 인물에게 분산되어 있다. 야이샤에게는 지적 호기심과 자기 의심이 있다. 영수림에게는 감정이 흔들려도 오래 한 행동은 남는다는 윤리가 있다. 르르헨에게는 두려워하고 부족해도 타인을 믿을 수 있다는 인간성이 있다. 카르엠에게는 모든 길과 변수를 한 손에 쥐고 싶은 설계자의 욕망이 있다.

소설가 역시 설계자다. 인물의 길을 만들고 정보를 감추고 독자의 시선을 움직인다. 미궁을 쓰는 작가는 카르엠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러나 [미궁 사변]은 한 명의 설계자에게 승리를 몰아주지 않는다. 작가가 만든 미궁을 여러 인물의 서로 다른 지혜가 무너뜨린다. 자기 설계 안에 설계자를 배반할 변수를 심는다.

다시 “내가…… 왜!”로 돌아간다. 이 말은 처음에는 억울함이다. 내가 왜 죽어야 하는가. 그러나 작품 전체를 지나 돌아오면 답이 아니라 책임을 심문하는 문장이 된다. 내가 왜 그랬는가. 내가 왜 이 죄를 져야 하는가. 내가 왜 살아야 하는가. 내가 왜 이 일을 막아야 하는가.

사변이 끝난 뒤 야이샤는 자기가 살겠다고 카르엠을 엿 먹이려다가 사람들을 죽인 꼴이 됐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름 없는 남자가 묻는다.

“책임을 지고 싶다는 겁니까?”

야이샤가 되묻는다.

“질 수 있긴 해요?”

아무도 답하지 못한다. 이 침묵이 결말을 조금 더 불편하게 만든다. 수만 명의 삶과 여러 도시의 파국을 한 사람이 어떻게 다 질 수 있는가. 책임을 선언한다고 죽은 사람이 돌아오지 않고, 없는 죄책감을 의지로 만들어낼 수도 없다. 책임은 고백하는 순간 완납되는 빚이 아니다. 그래도 야이샤는 질문이 향하는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는다. 영유기에게 당신이 틀렸다고 선포하고, 학살자도 영웅도 아닌 지혜자의 길을 고른다. 퀜티마에게는 일의 내막을 알면 자기를 죽이고 싶어질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퀜티마가 다 듣고 판단하겠다고 하자, 야이샤는 6년 전의 자기부터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기억은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고 서약 때문에 모든 진실을 그대로 말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자기 이야기를 타인의 판단 앞에 내놓는다. 이것이 작품이 보여주는 가장 구체적인 책임의 행동이다. 죄를 다 갚겠다는 장담이 아니라, 내 이야기를 듣고 당신이 나를 판단하라는 태도다. “그건 기억을 잃기 전의 내가 한 일”이라며 더러움을 바깥으로 밀어내지도 않고, “나는 영원히 죄인”이라며 주저앉지도 않는 사람. 아직 완성된 사람이 아니라 그 두 편의 거짓을 피해 걸어가야 하는 사람.

속죄라고 하면 죄를 씻고 원래의 깨끗한 자리로 돌아가는 그림이 떠오른다. 그러나 야이샤에게 돌아갈 깨끗한 자리는 없다. 기억을 잃기 전에도 상처와 오만과 욕망이 있었고, 기억을 잃은 뒤에도 타인의 희생 위에서 살아남았다.

돌아갈 수 없다. 대신 새 길을 간다. 피해자의 옷은 제복도 훈장도 아니다. 죽은 사람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대신 입는 상복에 가깝다. 자기가 누구를 애도하는지 온전히 느끼지 못하면서도 벗을 수 없는 옷이다. 감정이 없는데 애도해야 하고, 기억이 없는데 책임져야 한다. 무죄라고 느끼는데 죄의 결과 앞에 서야 한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

내가 왜 해야 하지.

내가 했으니까.

그러나 이 두 문장 사이에는 여전히 “질 수 있긴 해요?”라는 미해결의 질문이 놓여 있다. 그래서 “내가 했으니까”는 죄를 전부 기억한다는 뜻도, 그만큼 충분히 아파한다는 뜻도, 자기 한 명이 모든 결과를 갚을 수 있다는 뜻도 아니다. 이미 그 결과 안에 서 있고, 다음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지금의 나라는 뜻에 가깝다. 책임을 다 질 수 있다는 답이 아니라, 답해야 할 자리를 떠나지 않겠다는 방향이다. 그러니 야이샤는 이미 과거의 자기보다 커진 사람이 아니다. 커져야 한다는 요구를 받은 사람이고, 그 요구를 다음 행동으로 인계받은 사람이다.

미궁은 무너진다. 죄는 남는다. 사람은 계속 걷는다.

 창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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