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때문에”가 “나 때문에”가 되기를 공모(비평)

대상작품: 흑돼지 (작가: 용복, 작품정보)
리뷰어: 윤휘, 1시간 전, 조회 5

※ 이 리뷰는 결말을 포함한 전체를 다룹니다. 71매짜리 짧은 글이고 15분이면 다 읽으실 수 있으니, 부디 먼저 읽고 오시기를 권합니다.

※ 작중에 아동에 대한 체벌 묘사가 나옵니다.

 

 

 

주관적인 별점

스토리 구성: ★★★★☆ (첫 문장이 사건이 되고 마지막 문장이 그것을 회수한다.)

인물 매력도: ★★★★☆ (초점화자의 설계가 정교하다. 여섯 살의 대사는 특히 무섭다)

표현 및 묘사: ★★★☆☆ (담백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다만 표기가 흔들리는 자리가 여러 곳 있다)

진입장벽: ☆☆☆☆☆ (문장이 쉽고 사건이 단순하다. 걸리는 데가 거의 없다)

 

 

 

 

1. 주제에 대한 이야기

호러를 읽을 때 우리는 대개 무서운 것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귀신이든 괴물이든 살인자든, 하다 못해 분위기 묘사라도 무언가 무서운 것이 나와야 비로소 무서워진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 끝까지 나오는 것은 흔한 밤의 이미지조차 없는 한낮의 돼지 뿐이다. 그것도 제주도 관광지의 체험농장에서 흙을 파며 풀을 뜯는, 세상에서 가장 안 무서운 축에 드는 짐승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너무나도 서늘하다. 사람이 짐승이 되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건 오히려 기괴하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무서운 것은 따로 있었다. 아니, 사실 서늘하다거나 무섭다기보단, 너무나도 안타깝기 그지없는 부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먼저, 이유종은 이 소설에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여섯 살 지유에게도 대사가 있다. 해주에게도, 프런트 직원에게도, 보안팀장에게도, 순경에게도, 심지어 저편에서 “아이 씨, 영업 방해되게” 하고 투덜대는 농장주에게도 대사가 주어진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실종자이자 사실상의 주인공인 유종에게는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인용된 말이 하나도 없다.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을 때 나오는 소리는 이것뿐이다.

“꿀꿀!”

이 소설에서 유종의 유일한 대사다.

 

 

그러니 우리가 읽은 유종은, 전부 해주가 요약해준 유종일 뿐이다.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말투로 했는지, 우리는 한 번도 직접 듣지 못한다. 초점화자가 해주 한 사람으로 고정되어 있고, 작가는 그 시점을 끝까지 잃지 않는다. 나는 이것이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설계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바로 그 설계 때문에, 나는 리뷰에서 처음으로(물론 리뷰를 많이 쓴 것도 아니지만), 작중 인물이 보이는 태도를 지적하고 공격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는, 유종에게는 문제가 전혀 없었다는 면죄부를 주겠다는 말이 아니다. 해주의 서술에 따르면 그는 가고 싶은 곳이 없느냐고 물어놓고, 막상 해주가 알아오면 ‘사람이 많다’거나 ‘비싸다’며 물리거나, ‘왜 그렇게 관심이 없느냐’고 핀잔을 주기가 “기본 값” 이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유종에게도 마땅히 책임이 있다. 의견을 물어놓고 매번 기각하는 사람과의 대화는 일절 유쾌하지도, 유익하지도 않다.

다만 우리는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유종에게는 목소리가 없고, 이 진술은 오직 해주의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진술이 어느 자리에서 나오는지를 보면 성격이 더 분명해진다.

남편이 사라진 밤, 해주는 휴가 계획이며 예약이며 항공권까지 전부 남편에게 맡겨두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그리고 이렇게 이어진다.

“잠깐 자신이 너무 했나 하는 미안함이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해주는 곧바로 입을 뿌루퉁하게 내밀었다.”

미안함이 스쳐 지나가는 데 한 문장, 그것을 물리는 데 겨우 또 한 문장이 걸린다. 그리고 자기가 여행을 싫어한다는 사정, 혼자만의 시간이 없다는 사정이 이어지다가, 마침내 “게다가” 라는 접속사와 함께 남편의 죄목을 추가한다.

 

미안함이 들 때마다, 오히려 상대의 죄목을 붙이는 구조. 그러니 이 대목은 유종의 잘못을 알려주는 문장이라기보다, 해주가 자기 무죄를 조립하는 또는 자기 죄에는 모두 사정이 있음을 피력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부분일 뿐이다.(아주 유명한 말을 인용하고 싶다. “사연 없는 악인 없다”는 말이다.)

그 조립의 결론도 적혀 있다. “결론적으로 여행을 다니게 되는 곳은 모두 유종이 선택하고 예약한 곳이었다. 유종에게 돈과 기동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같은 일이 한 번 더 일어난다. 텅 빈 호텔방에서 해주는 방이 참 좋다고 인정하고, 이 모든 것을 남편이 예약했다는 것을 떠올리고, “새삼 고마움을 느끼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고마움의 수명은, 채 한 문장을 버텨내지 못한다.

 

 

 

우리말 단어 하나가 떠오른다. “헤아리다” 라는 말이다.

이 말에는 뜻이 둘 있다. 하나는 수량을 세다이고, 다른 하나는 짐작하여 미루어 생각하다이다. 하나의 낱말이 계산과 공감이라는 얼핏 보기엔 정반대의 일을 동시에 가리키고 있는 셈인데, 나는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우기고 싶다. 사람은 세어지기도 하고 헤아려지기도 하는 존재이며, 둘 중 어느 쪽으로 대해지느냐에 따라 사람이 못 되기도 하고 사람이 되기도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소설의 주제가 곧, “헤아림”이라 읽힌다.

조금 거창하게 말하면, 사람으로 헤아려지느냐, 껍데기만 사람으로 헤아려지느냐. 이것이겠다.

 

 

해주가 남편을 서술하는 문장들은, 내가 헤아려보건대 단 한 번도 첫 번째 뜻(셈)을 벗어나지 않는다.

종일 돌봄을 한 자신과 퇴근 후 놀아주는 남편으로 “부부는 육아 역할을 분담하고 있었다” 는 것. 여행지가 늘 남편 뜻대로 정해지는 이유는 “유종에게 돈과 기동력이 있었기 때문” 이라는 것. 남편이 사라진 자리에서 해주가 세어보는 것도 결국 그 목록에 지나지 않는다. 예약과 운전과 항공권. 이 목록에는 유종이 하는 일만 있고, 유종이라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유종의 마음이 서술되는 대목은, 내가 헤아려보건대 오직 한 군데이다.

해주가 여행을 싫어한다고 할 때마다 남편이 했다는 그 말이다.

“해주에게는 오로지 아이 얼굴만 보며 똥 기저귀만 가는 여행이더라도, 아이에게는 처음 맛보는 세상의 공기이자 앞으로 차곡차곡 쌓아갈 소중한 삶의 경험이자 추억인 것이었다. 자신을 위해서 부모님도 그렇게 해주었던.”

자기가 부모에게 받은 것을 자식에게 물려주려는 마음. 작가는 그것을 문장으로 적어두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문장이 이렇다.

“그랬기에 유종은 해주를 설득하며 이곳까지 끌고 왔던 것이다.”

여행을 준비한 마음이, 곧장, 여행을 실행시킨 역할로 뒤집힌다.

해주의 시선에서, 남편은 공감을 얻을 만한 사람이었음에도, 곧바로 껍데기로 넘어가 버린 것이다.

 

 

이 시선은 남편에게만 향하는 것도 아니다.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 호텔 직원들에게 분개하며 해주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 직원들은 월급을 받고 일을 하는 건지 아니면 쉴 시간을 누리려고 일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건, 월급이라는 대가와 노동이라는 기능을 저울에 올리는 문장이고, 남편을 대하는 방식과 정확히 같은 종류의 문장이다.

 

 

 

그리고 그런 해주의 시선이 정점에 달하는 존재가 있다.

진짜 무서운 존재는, 이 작품이 호러인 이유가 바로, 여섯 살짜리 지유다.

 

 

지유가 아빠를 부르는 말은 둘뿐이다.

“돼지”, 그리고 “이 바보야”.

그리고 이 아이가 하는 말들을 모아놓고 보면, 전부 사람을 껍데기로 판정하는 문장들이다.

아빠가 두 시간째 보이지 않는다는 말에 아이는 이렇게 답한다.

“내가 나가있으라고 했잖아. 그래서 나간 거야.”

걱정이 없다. 아빠의 실종은 아이에게 자기 명령이 이행된 결과일 뿐이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말이 “그게 뭐! 난 언니랑 더 놀 거야! 언니는 안 가잖아!” 다. 처음 만난 아이를 “안 가는 사람” 이라는 기능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곧이어 지유는 그 언니의 어깨를 붙들고 “제 아빠에게 하듯이” 매달린다. 그 때문에 언니는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물에 빠지며, 곧 제 가족에게 돌아간 뒤에 눈총을 보내고 지유를 새까맣게 잊어버린다.

 

아빠만이 그 무게를 감당해주던 사람이었다는 것이, 아빠가 없는 자리에서 증명된다.

그러나 여섯 살은 그것을 알 리가 없다. 모르는 게 당연하다.

나아가, 이 아이는 정말 무서운 일을 해낸다. 아빠가 친척집에 갔다는 엄마의 거짓말을 듣고 아이가 하는 말이 이것이다.

“돼지 할아버지야? 아빠 돼지잖아. 그러니까 할아버지도 돼지잖아.”

본 적도 없는 사람에게 낙인을 상속시킨다. 그것도 삼단논법의 꼴을 갖춰서.

여섯 살에게 이만한 추론이 가능하다면, 그건 재능이라기보다 익숙함 탓이라고 봄이 타당하다. 사람에게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으로 사람을 정리하는 일을, 이 아이는 이미 자연스럽게 한다.

 

 

 

그러면 아이는 그것을 어디서 배웠겠는가.

 

작가는 그 답을 한 문장으로 적어두었다. 그것도 아주 이상한 자리에서.

해주가 지금까지 딸을 몇 번 때렸다는 것. 그 체벌이 주로, 자기 몸이 아플 때나 기분이 나쁠 때 이루어졌다는 것.

“분노가 자신을 휩쓸고 지나가면 해주는 늘 손에 남은 아픔을 곱씹으며 반성 또 반성했다. 하지만 낮의 집에는 늘 해주와 지유 둘 뿐이었다. 그리고 힘은 압도적으로 센데 항상 비위를 맞추고 절절매는 것도 해주였다. 그러다 이성의 끈이 끊어지곤 했다.”

변명이다. 면피를 위한 비겁함이다. 그리고 증거이다.

낮의 집에 둘뿐이었다면, 지유가 사람 보는 법을 배울 곳도 해주뿐이었다는 뜻이 된다.

 

 

이것이 이 소설의 형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해주가 스스로를 변호하려고 내놓는 문장들이, 하나같이 해주의 탓임을 가리키는 증거가 된다. 초점화자를 해주 하나로 묶어둔 이유도 여기 있으리라 생각한다. 만약 이 소설에 유종의 시점이 한 번이라도 끼어들었다면, 결코 성립하지 않을 구조일 수 있다. 끝까지 한쪽의 진술만 듣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 진술이 스스로를 배반하는 꼴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이 소설에는 그 배반이 가장 크게 일어나는 자리가 있다. 나는 이 대목이 이 작품에서 가장 안타깝다고 생각한다.

 

남편이 사라진 다음 날 아침, 아이가 “아빠는?” 을 두 번 묻자 해주는 이렇게 쏘아붙인다.

“너 때문에!”

그리고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자 곧바로 끌어안고 이렇게 말한다.

“아니야. 지유 때문 아니야. 미안해.”

 

이 짧은 두 마디 사이에 이 소설의 모든 문제가 들어 있다.

 

 

책임전가. 여섯 살에게 어른의 실종을 뒤집어씌우는 말이고, 해주 자신도 곧바로 그것을 안다. 그런데 뒤의 말은 면죄다. 아이의 말이 계기였다는 것을 이 집에서 유일하게 아는 사람이 해주인데, 그것을 통째로 덮어버린다.

 

 

왜. 해주는 왜, 아이 탓을 했을까. 그리고 왜 그걸 다시 거두어들였을까.

다른 이의 마음을 추론해내지 못하는 아이, 돼지 할아버지를 추론하는 아이.

사람의 껍데기를 보고, 껍데기를 이름으로 불러버리는 아이.

그 아이는 누구의 손에 의해 길러졌는가.

아이는, 주양육자를 닮게 마련이다. 양육자와 부양자가 나뉜 가정에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고로,

해주는, 스스로를 너무 닮아버린 지유를 탓한 것이다.

해주는, 그러니까 자신 스스로를 탓한 것이다.

해주는, 그렇기 때문에 자신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준 것이다.

해주는, 그래서 지유에게 면죄부를 준 것이다.

 

 

 

실제로 지유는 그 뒤로도 달라지지 않는다. 돼지 할아버지 소리를 하고, 아빠를 찾으러 가겠느냐는 물음에 고개를 젓고, 애니메이션을 보며 까르르 웃는다. 면죄부의 효과는, 자신을 향해 붙인 그 면죄부의 효과는, 특히나 여섯 살 아이에겐 너무나도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필요했던 말은 “나 때문에”가 아니었을까.

 

 

내가 네 말을 말리지 않아서, 내가 아빠가 하는 일을 한 번도 너에게 알려주지 않아서, 내가 아빠 편이 되어준 적이 없어서. 그렇게 자기 몫을 먼저 말하는 어른이었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반성하는 인간. 그런 어른이 되었어야, 아빠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고, 사람에게 함부로 이름을 붙이면 안 된다고, 네가 매달릴 때마다 받아준 사람이 있었다고 말할 자격이 서지 않을까.

 

“나 때문에”라고 말하지 못하는 어른은, “그러면 안 된다”고 가르칠 자격이 없다.

자격 없는 가르침은, 외려 “자격이 없어도 남을 탓할 수 있음”만을 가르치게 된다.

 

실제로 이 소설에서 해주가 딸을 때리려던 손을 멈추는 장면의 이유가 그렇다.

“하지만 이곳은 공공장소였다. = 아이의 마음을 헤아려서가 아니라 남이 보고 있어서다.

그리고 딱 한 번 지유의 말을 제대로 자르는 장면도 그렇다.

“그 돼지라는 말. 그만하라고.” = 자격이 없다. 해주는 작품 초반에서 남편의 뒷모습을 보며 이렇게 생각하다 만다. “전체가 까만 차림에 둥글고 구부정한 등이 어쩌면.” 문장이 끝나지 않는다. 해주도 이미 남편을 그렇게 보고 있었다.

그러니, 오히려 해주는 자신을 먼저 탓하고, 돌아보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았던 해주는, 스스로도 이렇게 말한다.

“이번에는 해주도 반성하지 않았다. 할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너무 늦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스스로 “늦었다”고 말한다.

이 문장에서 반성은, 마치 지유를 혼쭐낸 것을 말하는 듯 보이는 위치에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문장이, 작가가 짚은 주제라고 본다.

반성했었어야 함을.

헤아리려 했어야 함을.

껍데기가 아닌 사람을 보려 했어야 함을 말이다.

 

 

그랬어야, 지유가 새까맣게 잊어버린 아빠 유종을,

새까만 껍데기의 흑돼지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음을.

 

 

 

새까만. 유종은 첫 장면부터 온통 검은 차림이다.

검은 모자, 검은 래시가드, 검은 반바지.

 

 

그런데 농장에서 남편을 발견하는 장면은 이렇게 되어 있다.

“까만 돼지들 사이에서 뭔가 허옇게 빛나는 것. 그것은 사람의 종아리였다. 흙에 덮여있던 것이 불시에 드러난 것이었다. 구부리고 있던 그것이 펴지자 검은 흙이 떨어지며 흰 살이 드러났다.”

(마지막 문단에서 한 번 더 나온다. “흙 묻은 반바지 아래 드러난 희고 굵은 종아리가 햇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검은 껍데기 안에 흰 살이 있다. 그리고 그 흰 살은 끝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흙에 덮여 안 보일 뿐. 해주가 남편을 알아본 단서도 얼굴이 아니라 그 종아리였다. 그러니 유종의 흰 살은, 새까만 껍데기와는 정반대로, 사람임을 상징할 것이다. 여전히 사람인 채로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지유의 말이 맞았다. 유종은 한 마리의 흑돼지였다.”

흰 살을 보고 남편을 알아본 사람이, 결론으로는 “흑돼지였다” 고 적는다. 끝내 완성된 낙인이고, 심지어 그 낙인의 저작권을 딸에게 돌려주기까지 한다. 지유의 말이 맞았다고.

끝까지 “나 때문에”가 나오지 않는다.

 

 

정작 지유는 그 자리에 없다. 같이 가겠느냐는 물음에 고개를 저었고, 애니메이션 성우의 익살스러운 목소리를 듣고 까르르 웃을 줄만 알았다. 아이는 아빠의 최후를 보지 않았고, 앞으로도 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이 무섭다. 짐승이 된 아버지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채 남겨진 여섯 살이. 사람을 보는 법이 이미 정해져 있는 그 여섯 살이.

 

 

 

한 걸음만 더 나가보고 싶다.

 

 

예전에는 세탁기도 밥솥도 보일러도 없이 아이를 키웠고, 지금은 그 모든 것이 있는데도 육아가 더 어렵다고들 한다. 나는 이것이 채워주어야 할 목록이 계속 길어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것도 해줘야 하고 저것도 해줘야 하고. 육아가 어렵지 않다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육아의 방향이, 결핍 없는 사람을 만들어내는 일이 되어버리는 것 같다는 지적만 하고 싶을 뿐이다. 사람에게 결핍이 없을 수는 없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그 목록을 채우는 동안, 목록에 없는 한 가지가 비어버리는 일이 생기는 것 같다.

부모가 각자의 자리에서 너를 사랑하고 있음을, 아이가 알게 하는 일이 그것이다.

 

물리적인 결핍은, 결코 물리적인 결핍을 무조건 선물해주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지만, 사랑을 아는 아이라면 견뎌낼 수 있다. 그런데 사랑을 모르는 아이는 아무리 채워주어도 채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주 양육자와 부양자가 나뉜 집이라면, 곁에 없는 쪽의 사랑을 아이에게 전해줄 수 있는 사람은 결국 곁에 있는 쪽뿐이다. 이 소설의 해주가 하지 않은 일이 정확히 그것이라고 본다.

 

그러니 돼지라고 부르면 돼지가 된다는 지유의 엄청난 마법이 소설의 공포가 아니다. 그렇게 부르는 법을 누가 가르쳤는가, 그리고 그것을 자기 책임으로 짊어질 수 있는 사람이 끝내 없었다는 것. 결국 사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 아주 거대한 인격낙인 내지 인격살인을 길러낸다는 안타깝고도 서늘한 공포인 것이다.

 

 

부디, “나 때문에”라고 말할 수 있는 어른들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2. 좋았던 점에 대한 이야기

① 가장 좋았던 것은, 초점화자를 한 사람으로 묶어둔 판단이었다.

이 소설에는 시점이 흔들리는 곳이 한 군데도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해주의 눈과 머릿속만 따라간다. 남편이 왜 사라졌는지, 그 순간 무슨 생각을 했는지, 농장에서 무엇을 겪었는지 — 독자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작가 자신은 알고 있는 바를, 독자에게 알려주지 않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알려주지 않은 부분을 궁금하게 만들어버리면(그러니까, 사건이 추가되면), 초점이 흔들릴 가능성은 늘 커지게 마련이다. 그러니 독자가 궁금해할 수 없도록 한 사람의 시점에 묶어두려면, 그 사람의 시선에서 말해주거나 보여줄 것들을 아주 조밀조밀하게 배치해놓아야만 한다.

워낙 군더더기 없게 글을 잘 쓰는 작가 덕분에, 이 소설은 집요한 초점을 가졌고, 또 그 덕분에 초점화자의 진술이 스스로를 배반하는 효과를 얻게 된다. 앞서 1절에서 길게 이야기했으니 여기서는 한 줄만 다시 적어두겠다. “하지만 낮의 집에는 늘 해주와 지유 둘 뿐이었다.”는, 변명으로 쓰인 문장이 증거가 되는 자리가 이 소설에는 여럿 있고, 그건 시점을 하나로 묶어두었기 때문에만 가능한 일이다. 미친 설계다.

 

 

② 그러면서도, 유종에게 대사를 한 줄도 주지 않은 것.

이건 ①의 연장이지만 따로 적어두고 싶다. 이 소설에는 단역까지 포함해 거의 모든 인물에게 큰따옴표가 주어지는데, 정작 주인공에게만 없다. 그리고 71매를 다 지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그가 처음으로 입을 연다.

“꿀꿀!”

말할 기회를 한 번도 얻지 못한 사람이, 마지막에 말이라고 한 것이 말이 아니었다. 이 배치만으로, 말이 아닌 이것이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담아낸다.

 

 

③ 검은 옷과 흰 살의 대비를 첫 장면부터 심어둔 것.

1절에서 다룬 이미지인데, 좋았던 점으로 한 번 더 꼽고 싶다. 유종은 처음부터 온통 검은 차림이고, 발견되는 장면에서는 검은 흙 아래로 흰 살이 드러난다. 껍데기는 검고 알맹이는 희다는 것을 작가는 한 번도 설명하지 않고 색으로만 보여준다.

특히 좋았던 것은 해주가 남편을 알아보는 단서가 얼굴이 아니라 종아리라는 점이다. “방망이처럼 굵은 그것은 익숙한 다리였다.” 얼굴은 흙에 덮여 있었고, 아내가 알아본 것은 굵기와 형태였다. 여기서도 해주는 껍데기를 세는 시선으로 유종을 찾아낸 셈이다. 이마저도 치밀하다고 느껴진다.

 

 

+ 뭐, 이건 여담일 수 있는데 — 남편이 돼지가 되어 사라진 다음 날 아침, 해주가 뷔페에서 무의식적으로 담아온 접시에 담긴 것이 수육과 생 숙주와 고춧가루다. 그리고 스스로 “이게 대체 뭐야” 하고 놀란다. 손이 먼저 움직인 장면인데, 그 손이 무엇을 들었는지를 생각하면, 정말 혀를 내두를 만큼 상징에 집요한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3. 아쉬웠던 점에 대한 이야기

① 가장 아쉬운 건, 유종을 발견한 경찰의 사건 처리방식이다.

이 소설은 다른 모든 곳에서는 현실의 절차를 아주 꼼꼼히 밟는다. 프런트에 안내방송을 부탁하고, 보안실에서 CCTV를 돌려보고, 경찰서에 가서 조서를 꾸미고, 실종 신고가 접수되는 요령까지 등장인물의 입으로 알려준다. 그 성실함이 이 작품의 힘인데, 경찰이 유종을 찾은 뒤에, 영업방해로 체포하지 않고 실종신고자를 차에 태워 현장으로 데려갔다는 점은 현실적이지 못하다. 아. 무능한 경찰을 그린 걸까.

 

 

② 두 번째로 아쉬운(?) 것은, 조연들이 하나같이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아쉬운 점은 아니다. 그저, 나처럼 읽지 않을 독자들이 있다면 “인물들이 왜 이렇게 불친절하지?”라는 의아함을 가질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굳이 쓰는 것이다.

작중에서 프런트 직원, 보안팀장, 순경, 농장주까지 전부 귀찮아하고 사무적이고 무성의하다. “난감하다는 표정”, “귀찮음이 역력한 투”, “사무적인 말투”, “귀찮다는 표정” 이 차례로 나온다.

나는 이것을 해주의 시선이기 때문에 이렇게 보인다고 생각했다. 타인을 기능으로만 보는 사람의 눈이니까.

그런데 그렇게 읽으라는 표지가 사실은 본문에 없다. 이것이 초점화자의 편향인지 작가의 서술인지 구분하지 않고 읽는 독자라면, 조금 평면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대목들이다. 한 사람쯤은 해주에게 친절했다면 — 그리고 해주가 그 친절마저 다르게 받아들였다면 — 앞의 독법이 확정되었을 것 같다.

 

 

③ 세 번째는, 표기가 흔들리는 자리가 여러 곳 있다는 것이다.

문장 자체는 담백하고 잘 읽힌다. 군더더기가 없고 호흡도 좋다. 다만 같은 단어의 표기가 앞뒤로 달라지거나, 주어가 잘못 들어간 문장이 몇 개 있어 아래에 따로 적어두었다. 짧은 글일수록 이런 자리가 눈에 잘 띄기 때문에, 퇴고를 한번 해보시기를 권한다.

 

 

 

4. 제목에 대한 이야기 => 이것은 제1절에서 이미 많이 썼으므로 줄인다.

 

 

 

5. 기타 개인적인 이야기

리뷰를 쓰면서 내내 마음에 걸린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저는 이 리뷰에서 해주라는 인물을 꽤 세게 밀어붙였는데, 그러면서도 이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직장을 그만두고, 돈도 없고, 운전도 못 하고, 낮에는 늘 아이와 둘뿐이고, 남편에게는 물어봐야 어차피 기각당하던 사람입니다. 자기를 헤아려준 사람이 없던 사람이 남을 헤아리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아이에게 그대로 대물림되는 장면을 너무 정확하게 써두셨기 때문에, 저로서는 그쪽을 붙잡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붙잡을 수 있었던 것은, 작가님이 해주를 변호하지도 처벌하지도 않으셨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razz: ) 그냥 이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끝까지 보여주기만 하셨고, 그 덕분에 독자가 스스로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읽을 때까지만 해도,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체리 슬러시」의 작가이심을 리뷰를 쓰다가 알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진입장벽 하나 없이 쉽게 읽히지만, 무거운 생각이 들게 하는 필력에 저항 없이 휩쓸려 읽었습니다. 역시나!

 

 

 

오탈자 및 표현에 관하여 — 작가님의 향후 작업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를 바라며 적어둡니다. 제가 잘못 본 것이 있을 수 있고, 의도가 있는 표기라면 그대로 두셔도 좋습니다.

명백해 보이는 것

  • 유야 전용인 1층 풀“유아 전용”
  • 2층도 그래야 1.2미터라“그래봐야”
  • 해주는 이제 다른 도시에서 물놀이를 온 언니와 함께 놀고 있었다주어가 “지유는”이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앞뒤 문맥상 언니와 논 사람은 지유이고, 바로 다음 문단에서 해주는 그 모습을 따라가 촬영합니다.
  • 순경에 해주에게 물었다“순경이”
  • 해주는 쪼그리고 앉아 유종을 끌어 앉았다“끌어안았다”
  • 그래도 아이는 먹여야했다“먹여야 했다”

표기가 앞뒤로 달라지는 것

  • “래시가드” / “래쉬가드” — 앞부분은 래시가드, 뒷부분은 래쉬가드로 나옵니다. 표준 표기는 “래시가드”입니다.
  • “보안팀장” / “보안 팀 직원” — 띄어쓰기도 다르지만,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인지 다른 사람인지가 조금 헷갈렸습니다. 보안실에서 CCTV를 함께 본 사람은 “보안팀장”이고 경찰서까지 태워다준 사람은 “보안 팀 직원”인데, 팀장이 직접 “가까운 서까지 태워다드리겠습니다” 라고 말한 뒤라 같은 사람으로 읽히다가, 차 안에서 “목소리가 젊었다. 해주 또래일까” 하는 대목에서 다시 헷갈립니다.

띄어쓰기

  • 유종은 움찔 했다 → “움찔했다”
  • 손을 올릴 뻔 했다 → “올릴 뻔했다”
  • 끽 해야 지유보다 10킬로그램쯤 → “끽해야” (또는 “기껏해야”)

어휘 사용

  • “숫제” 가 세 번 나옵니다(“숫제 아빠도 남편도 없는”, “지유는 숫제 악을 썼다”, “귀에 숫제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까지”). 이 말은 “차라리” 또는 “아예”라는 뜻인데, 세 자리 모두에 자연스럽게 붙지는 않는 것 같았습니다. 특히 세 번째는 “아예”나 “급기야”가 더 어울려 보입니다. 다만 화자의 말버릇으로 의도하신 것이라면 그대로 두셔도 좋겠습니다.
  • 예약한 날의 하루가 지났다 → “예약한 날 중 하루가” 정도가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그러나 지금 표기도 오류는 아닙니다.

회수되지 않는 묘사 (오탈자는 아니지만 적어둡니다)

  • 경찰서로 태워다주는 보안 팀 직원에 대한 묘사가 유독 자세합니다. “푹 눌러쓴 모자 아래로 빛나는 직원의 큰 눈이 어쩐지 무섭다”, “수시로 각성음료를 들이켰다. 손도 좀 떨리는 것 같았다.” 처음 읽을 때는 이 인물이 뭔가 할 것 같아 긴장했는데 그대로 퇴장합니다. 의도적인 미끼라면 훌륭하고, 아니라면 조금 덜어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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