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리뷰는 에필로그를 포함한 결말 전체를 다룹니다. 스포일러 주의! 이 작품은 마지막 한 장에서 그 앞의 995매가 통째로 다시 읽히도록 설계되어 있으므로,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반드시 먼저 읽고 오시기를 권합니다. 완결까지 하룻밤이면 충분합니다.
※ 작중에 스토킹·강제추행 혐의, 정신질환, 자살, 성적인 표현이 등장합니다.
주관적인 별점
스토리 구성: ★★★★★ (마지막 한 장이 앞의 전부를 다시 쓰게 만든다. 그 설계가 목차에까지 심어져 있다)
인물 매력도: ★★★★☆ (주연 둘만이 아니라 곁을 스쳐가는 인물들까지 전부 동질의 병을 앓고 있다)
표현 및 묘사: ★★★☆☆ (인물의 목소리는 살아 있으나, 구성상 서술자가 인물을 대신 설명해버리는 대목이 잦다)
진입장벽: ★★☆☆☆ (문장은 빠르게 읽힌다. 다만 시점이 예고 없이 바뀌는 부분에서 걸리는 독자가 있을 수도 있다)
1. 주제에 대한 이야기
라틴어에는 사랑을 가리키는 말이 여럿 있다. 흔히 셋을 꼽는다.
아모르(amor), 끌림이고 정욕이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덮쳐버리고야 마는, 원초적인 사랑에 해당한다.
카리타스(caritas), 조건 없이 내어주는 사랑으로, 종교에서 말하는 자비에 가깝다.
딜렉티오(dilectio), 골라낸다는 뜻의 동사 diligere에서 온 말이다. 알아보고, 고르고, 계속 고르기로 하는 사랑.
서 로안이 제 치골에 새겨 넣은 문장은 이것이다.
“퀴아 포르티스 에스트 우트 모르스 딜렉티오.”
Quia fortis est ut mors dilectio.
—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니.
구약 아가서 8장 6절, 라틴어 불가타 성경의 구절을 찾았다. 원문은 이렇게 이어진다.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질투는 무덤처럼 잔인하다.
여기서 내가 오래 붙잡고 있었던 건 작가가 성경에서 아주 멋들어지는 문구를 찾았다는 느낌 때문이 아니라, 이 문장에 놓인 단어가 아모르가 아니라 딜렉티오였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로안은 제 몸에 “정욕은 죽음처럼 강하다”라고 쓰지 않았다. “알아보고 골라낸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다”라고 썼다. 무신론자라고 밝히면서도 성경 구절을 몸에 새긴 주인공은, 그 뜻을 묻는 엄수에게는 끝까지 알려주지 않는다. 두 번을 묻는데 두 번 다 딴소리로 넘기면서, 이런 말을 남긴다. 그건 침대 위에서 알려줄 거니까.
그러나 그런 밤은 오지 않았다. 아니, 오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지, 침대라는 말이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관련해서, 내가 주제라고 꼽은 것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사랑의 조건을 묻는 이야기.
이 작품은 그렇게 읽혔다. 작가가 의도했으리라 생각한다. 26화 끄트머리에, 그 조건을 직접 아래 문장으로 적어두었으니까. (물론, 언제나 마찬가지인 건, 아님 말고!)
“사랑을 주고 받는 소중한 존재, 인간. 제가 원하는 건 그저 끌리는 상대와 입맛에 맞는 섹스인 줄만 알고 살았던 서 로안이 짐승 중에서도 가장 강한 동물인 진정한 인간이 된 날이었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과 주고 받을 수 있는 가장 뜨거운 것은 몸과 마음이 연결된 사랑이라는 걸 깨닫게 해준 혁명의 날, 이 밤.”
짐승과 인간, 몸과 마음. 이 대립쌍을 세운 건 내가 아니라 작가(라고 주장해본)였다. 그러니 이 소설이 하려는 말을 한 줄로 줄이면 이것이다.
사랑은 몸만으로는 부족하고, 몸과 마음이 연결되어야 비로소 사랑이다. 라고.
사랑에 육체 말고 무엇이 더 있느냐는 반문도 있을 법하다. 영화를 같이 보고,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고, 생각을 나누는 일은 친구와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 오직 연인과만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섹스뿐이라는 냉철한 정리도 괜한 분석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정리가, 모두에게 받아들여지진 않는다.
다른 누군가들은, 몸을 섞기 전에도, 또는 몸을 섞은 뒤에도, “나 아닌 존재와 나라는 존재가 있는 그대로 포개어지는” 순간에야 비로소 편안해지고 안정되고 사랑받는다고 느끼기도 한다.
물론, 뒤집어 보면 육체적인 만족이 극에 달하는 상황이 있다고 치면, 결국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알고(또는 몰랐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숨김없이 드러냈을 때(혹은 드러내게 되었을 때) 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사랑을 육체로만 정의하든 육체와 정신의 복합적인 작용으로 정의하든,
‘온전히 내보이고, 받아들여지는 것’ 이라는 지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이 작품이 아주 기똥찼다고 여겨진 까닭은, 이 조건을 다 채워놓고 난 뒤에, 거기에 하나를 더 요구한다는 데 있다.
아니, 하나를 더 요구한다는 게 아니라,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일깨워주었다는 점이라고 해야 더 옳겠다.
우선, 프롤로그를 다시 보자. “박 엄수”의 목소리로 쓰인 그 글은 이 밤을 이렇게 요약한다.
“둘 다 살면서 남들에게 보여주기 싫어서 꽁꽁 숨겨둔 밑바닥까지 들통났고요. 겨우 5시간 같이 있었을 뿐인데 살아온 전부를 나눈 거 같더라니까요.”
12화에는 이런 대사도 있다. “서 로안”이 자신은 기계치라며 부러워하자, 엄수가 대꾸하는 말이다.
“기계치는 기계치라서 좋은 거죠. (…) 아, 서 로안은 서 로안이라 좋다는 뜻이에요.”
이 작품에서 가장 다정한 문장을 꼽으라면, 둘 중에 하나를 꼽고 싶다. 상대방을 평가하지도 거부하지도 않고, “그냥 너라서 좋다”라는 말. 앞에서 말한 조건을 이보다 정확하게 옮긴 말이 또 있을까 싶다.
그런데 여기에 작가가 한 가지를 더 얹는 것이다.
그게 바로 에필로그의 아홉 번째 문서, 디지털 포렌식 분석 결과 보고서다.
보고서에는, “서 로안”의 휴대전화 메모장에서 발견된, 망자 본인이 작성한 글의 제목이 「프롤로그_ 엄수의 이야기」 라고 나온다.
그러니까 “살아온 전부를 나눈 거 같더라니까요” 를 쓴 사람은 엄수가 아니었다는 얘기다. “서 로안은 서 로안이라 좋다는 뜻이에요” 라는 대사를 받아쓴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즉, 로안은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상대의 입에 직접 써넣었던 것이다.
나는 너무나도 절묘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얼핏 보기에, 로안은 조건을 다 채웠다. 몸도 마음도 다 내놓았고, 다 받아들여졌다. 26화의 그는 아홉 살 어린 연인에게 제 본명까지 꺼내 보였다. 그리고 상대는 그 상처 많은 이름을 두 번씩 불러주겠다고 답까지 했다. 자기를 온전히 내보이고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장면으로, 이보다 서정적이고 이보다 편안한 장면이 또 있을까.
그런데, 문제는 이거다. 그 상대를 자기가 썼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의 주제에 담겨 있던 진짜 중요한 조건은 바로 이것이다.
받아들이는 쪽은, 내가 아니어야 한다. 는 것.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쉽사리 알 수도 없는 대상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딜렉티오가 골라내는 사랑이라면, 고르기 위해서는 애초에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존재가 거기 있어야 한다. 내가 빚어낸 상대에게 골라지는 것은, 골라지는 것이 아니다. 작중의 ‘이 밤’이 서늘한 이유는, 스토킹의 밤이어서가 아니라, 지나치게 완벽한 딜렉티오로 포장된 밤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작품의 사랑을 미완성이라 부를 수밖에 없다. 실패라고 하면 잘못이다. 로안은 자신이 창조해낸 세상 안에서는 사랑에 필요한 조건을 전부 다 알고 전부 다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 하나, 타인의 실재라는 조건만은 갖지 못했다. 그러니 그가 몸에 새긴 것도 완성된 딜렉티오가 아니라 뜻을 끝내 완성되지 못하는 딜렉티오일 뿐이다. 그는 그 뜻을 침대 위에서 알려주겠다고 미뤘고, 그 밤 속에서 나가지 않으려 했다.
어찌 보면, 자신의 꿈에서 깨어나기 싫으니, 침대 위에서 눈을 감은 채로, 영영 눈을 뜨지 못 하는 채로 끝을 맞이하길 바랐던 것 같다.
그러나 사랑은 또 이렇게 단순히, “타자로부터의, 있는 그대로의 인정”으로만 정의할 수는 없을 터다.
로안이 엄수라는 사람을 처음 인지한 경위는 라스베이거스에서 보게 된 사진 한 장이었다지만, 실제로는 응원석에서 우연히 마주친 게 맞았을 것이다. 내 개인적인 추측으로는, 로안은 그때 엄수에게 육체적으로 홀라당 빠져버린 듯하다.
그런데 그 육체적인 끌림에는 이유가 너무나도 분명했다. 에필로그에서 동생은, 사진으로 박 엄수 씨를 봤을 때, 커플 타투까지 했다던 오빠의 죽은 첫사랑과 너무 닮아서 저도 헷갈릴 지경이었다고 언급한다. 로안이 사랑한 것은 처음부터 엄수라는 존재가 아니라, 엄수라는 껍데기이자, 그 위에 둘러진 자신의 이미지. 즉, 상(像) 이었던 셈이다.
그러니 사랑의 조건에는, 정말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은, 자신이 그리는 “상”이어야 한다는 육체적인 조건도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겠다.
실제로 사랑의 양상이란 그런 듯하다. 우리는 누군가를 알게 되면, 먼저 상을 만들 뿐이다. 그리고 진짜를 알아가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즉, 상을 지나고 지나서 나중에야 그 사람 자체를 만난다. 그리고 만난 사람이 그 상과 다를 때, 우리는 상대가 변했다는 시간적인 감각을 느끼기도 한다. 정작 변한 건, 아무 것도 없는데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로안의 밤은 병리의 기록이라기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앓게 되는 마음아픔의 기록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되면, 이 작품은 그걸 이겨내지 못한 로안이라는 한 유약한 인간의 기록이기도 할 것이다.
더 나아가, “나는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을 모두에게 던지는 작품이기도 할 것이다.
사랑이 무엇인지,
혹은, 사랑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구태여 번듯한 정의를 내려야 하는 것도, 그럴 재간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꼭 한 번은 사랑이 무엇인지 한 문장으로 정리하고 싶었던 나이기에,
이 작품은 사랑의 어느 단면만은 확실히 정의해준다고 기어코 우기고 싶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존재가, 내가 미처 다 알 수 없는 존재가,
나의 가장 은밀한 것까지
아무런 거부도, 평가도 없이 순전히 받아내주는,
그렇기에, 내가 나 자신이라는 자유를 맛보게 해주는,
지상 최고의 예속.
나는 그리 말해두고 싶다.
아, 그리고, 리뷰를 쓰다 보니 생각이 든 것이 하나 있다. 사랑이 결국, 상대가 내 마음에 응답해주는 세계를 보는 과정 내지는 보게 되었을 때의 감정이라고 한다면, 연애나 로맨스를 다루는 장르라는 건, 언제나 미완성의 딜렉티오 그 자체가 아닐까 싶다. 상대방의 응답이란 것이, 언제나 작가가 써준 대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물론 작중 인물이 개별적인 서사를 갖추어서 나름의 반응을 보이는 모양이 되는 것도 맞겠지만, 냉철히 본다면 결국 설정된 대로 움직이는 미완성의 딜렉티오인 것은 맞는다.
(관련해서 다시 원문을 찾아보니, 12화에서 로안 자신이 중얼거린 문장을 찾았다. “근데 영화나 소설에선 왜 이런 관계도 사랑이라고 할까. 그래야 팔리니까?”)
2. 좋았던 점에 대한 이야기
① 가장 좋았던 것은, 작품 구성 자체가 복선이라는 점이었다.
치밀하다. 그렇게 말해두고 싶다. 각 회차의 소제목은 전부 시각 표기였다. 처음 읽을 때 이건 그냥 실시간 진행이라는 걸 알려주는 장치로 보였다. 그런데 에필로그의 여덟 번째 문서, CCTV 영상 확인 보고서의 타임라인이 그 시각들을 하나도 어긋남 없이 그대로 되짚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소름이 돋았(을 뻔했 – 나는 소름이 잘 돋지 않는다)다.
12:55에 벽에 락카 칠을 시작하고, 01:17에 혼잣말을 하며 주변을 살피고, 03:26에 5분간 영상 통화를 하고, 04:13에 유 제이가 방문했다가 배웅하고, 05:01에 순찰대와 대화한 뒤, 05:20에 일출을 보고, 07:47에 현장을 정리하는 흐름.
아주 영리하고 치밀한 작가가 아닐 수 없다. 복선을 본문 안에 심어두면, 반드시 티가 나게 마련이다. 그 문장은 처음부터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있는 것 같은 문장들이 꼭 있다. 그런데 도리어 작가는 본문 속의 문장들은 그저 사건을 진행시키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작가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그게 바로 제목이었다. 작가는 복선을 문장이 아니라 구조에 넣어서, 재독의 부담 없이 재독의 쾌감만 남겼다.
증거를 하나만 더 대자면, 13화부터 16화까지만 시각 표기가 (CET)다. 유럽 중부 표준시, 곧 독일에 있는 김 다준의 시간이다. PM 08 : 26 (CET)는 한국 시각으로 AM 03 : 26이고, CCTV 타임라인의 03:26 항목은 이렇게 적혀 있다. 5분간 영상 통화(김 다준). 시간대 표기 하나까지 맞춰둔 것이다. 아주 지독한 설계꾼이다.
② 그러면서도, 에필로그의 형식이 매우 독특했다.
에필로그는 공소장·진술서·소견서·탄원서·합의서·사망보고서·CCTV 분석·포렌식·참고인 진술로만 되어 있다. 소설이 갑자기 서류 뭉치가 되는 셈인데, 이 독특한 전환이 뜬금없지 않은 이유는 26화에 이미 그 형식의 뿌리가 심어져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요한은 체벌을 받고 골방에 갇힐 때마다 제 머릿속에 가상의 법정을 열었다. 저와 똑 닮은 꼬마 요한들을 피고와 원고로 나누어 세워두고 공방을 시켰고, 그걸 다 듣고 나서야 판단을 내렸다. 스물아홉의 로안도 마찬가지의 과정을 한 차례 보여준다.
그러니 에필로그의 열 번째 문서가 법정의 무언가로 끝난 것이 그리 놀랍지도 어색하지도 않게 된다. 또, 내용상의 연결성도 압도적이었다. 유 제이의 참고인 진술은 이렇다. 당시 망자가 다중인격처럼 보였다고 진술함. (망자는 혼자서 두 사람이 말하듯이 중얼거렸다고 함.)
혼자서 두 사람 몫으로 말하는 것. 그게 로안이 평생 해온 일임을 줄곧 보여왔다. 그러니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이 법정 문서의 형태를 하고 있는 것은 장르 반전을 위한 장치이기도 하지만, 로안이라는 인간이 세상을 버텨온 방식이 마침내 겉으로 드러나게 해준 최고의 장치이기도 한 것이다.
③ 작중 인물들이 주제를 보여주는 데에 아주 성실하게 그려진다.
이 소설에는 자기를 온전히 내보이는 데 성공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김 다준은 커밍아웃을 강요하다 결국 이렇게 소리친다. “왜 내가 나로 있을 수 없게 하는 건데! 다들 왜!!”
박 엄수는 선수 생명을 끊어놓은 입스를 담당의 말고는 가족에게도 교수에게도 친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처음 입 밖에 내고서 “후, 쪼금 시원하네” 라고 한다.
서 로안은 어땠나. “로안은 다정함을 꾸며내는데 도가 튼 가짜였다.” , “겉으로는 뭐든 수용하고 젠틀한 것처럼 행동하지만 그건 일종의 사회적 가면일 뿐이었다.”고 서술된다.
게다가 유 제이는 어땠나. 나는 필시, 악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받은 상처를 가리기 싫은 사람들이라고 이해하곤 한다. 물론 행위를 두둔할 마음까지는 추호도 없지만. 유 제이는 계속해서 자신이 편히 마음을 붙여둘 짝을 만나지 못한 채로 작품이 끝난다.
주인공은 물론 주변 인물들까지 기능적으로만 소모시킨 게 아니었다. 이 소설의 곁가지 인물들도, 전부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로 묘사되어 있다. 주제를 설명하지 않고 등장인물들만으로 구현한 셈이다. 인물 매력도에 별을 넷 준 이유가 여기 있다.
뭐, 이건 여담일 수 있지만, 심지어 마지막에 등장하는 서 주희도 마찬가지다. 에필로그 다섯 번째 문서의 제목은 「변호사 코칭을 받고 버려진 탄원서」인데, 사촌 동생이 오빠를 위해 쓴 그 글은 문법도 어긋나 있고 자기 이야기가 자꾸 끼어들지만, 그래서 이 소설에서 가장 정직한 글이다. 그런데 문서의 말미에 변호사의 말이 그대로 붙어 있다. 주희 씨, 이거 그냥 전부, 다시 쓰시는 것이 낫겠습니다. (…) 자꾸 본인 얘기 쓰지 말고요.
진심으로 쓴 글은 버려지고, 코칭받은 글이 제출되는 것이다. 주제를 은은하게 깔아놓는 기법들이, 정말 극치라고 생각한다.
3. 아쉬웠던 점에 대한 이야기
① 가장 아쉬운 건, 스마트 워치가 어떻게 로안의 손에 들어갔는지가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준 것과 훔친 것은 정반대로 배치되는 사실들이다. (심지어, 이 대비는 “허물없이 주고받는 관계로 서술된 것이, 실제로는 일방적으로 가져간 것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소설의 주제를 와장창 깨버리는 대목이다.) 소설의 다른 어긋난 부분들은 전부 객관적인 자료가 뒤를 받쳐준다. 프롤로그의 저자 문제는 포렌식이 밝히고, 그 밤의 동행 여부는 CCTV가 밝힌다.(사실 핸드폰 안에 찍었다던 동영상도 궁금했지만) 그런데 시계만은 본문의 서술 대 진술서의 주장이라, 판독할 다른 자료가 없다.
물론 작가가 판단 불가를 의도했을 수도 있다. 어차피 이 에필로그는 무엇 하나 확정해주지 않고 서로 어긋나는 문서를 늘어놓기만 하는 방식이니까. 그럼에도 아쉬운 까닭은, 다른 어긋남들과 무게감이 완전히 소멸해버렸기 때문이다. 시계는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물리적으로 둘 사이를 이동한 물건이고, 그래서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될 수도 있는 중요한 물건이다. 취득 경위를 알 수 있는 단서가 파편적으로라도 본문에 흩어져 있었다면, 이 물건 하나로 밤 전체가 재구성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② 두 번째로 아쉬운 것은, 유 제이와 순찰대가 등장하는 장면에 “위화감”이 묘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 제이의 진술은 로안이 혼자서 두 사람처럼 중얼거렸다는 것이고, 순찰대원 두 명도 같은 성격의 진술을 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본문의 해당 장면들에서 세 사람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적어도 나는 처음 읽을 때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작가가 왜 이렇게 썼는지는 짐작이 간다. 철저히 로안에 의한 서술이었기에, 로안에게 그 대화는 실제로 자연스러웠을 것이기에. 그럼에도 아쉬운 것은, 이 작품이 다른 자리에서는 어긋남의 흔적을 본문에 흘려두었기 때문이다. 8화에서 엄수가 “나 어떻게 생각해요?” 라고 두 번이나 묻는데 로안이 두 번 다 화제를 돌려버리는 장면 같은 것이. 그 장면은 다시 읽으면 묻는 사람이 없으니 답이 나올 수 없었던 것으로도 읽힌다. 이런 자리가 제이와 순찰대 장면에도 한 번쯤 있었다면 어땠을까 싶다.
③ 세 번째는, 그럴 수밖에 없는 구도이지만서도, 서술자가 인물을 대신 설명해버리는 대목이 잦다.
26화에서 로안이 엄수를 안심시키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 중에 저와 딱 맞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확률은 지극히 낮다는 걸 잘 아는 어른답게. 사랑하는 사람의 불안을 읽고 바로 조치할 수 있는 파트너답게. 엄수를 배려할 줄 아는 형 답게, 맹세에 이어 약속을 했다.”
인물이 한 행동을 보여준 뒤, 그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서술자가 곧바로 세 번이나 반복하며 규정해준다. 이게 로안의 자기 미화라면 오히려 정교한 장치가 맞는다. 다만 그렇게 읽으라는 표지가 본문 어디에도 없어서(아직 반전을 알기도 전이었으니), 나로서는 로안의 자화자찬인지 서술자의 논평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런 문장이 반복되면 인물이 스스로 획득했어야 할 인상을 서술이 미리 정해주는 셈이 된다.
로안의 생각 속에서만 작품 속 세계를 만나게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구도이지만, 그래도 “말해주기”보다는 “보여주기”를 선호하는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아쉬움이 남는다. (개인적인 취향일 뿐이다.)
④ 마지막은 문장 자체에 관한 것인데, 오탈자와 조사 오류가 제법 자주 눈에 걸렸다.
구어체를 그대로 살린 문장이 이 작품의 장점인 건 분명하다. 인물들이 실제로 그렇게 말할 것 같은 리듬이 있다. 다만 그 리듬과 별개로 손봐야 할 자리들이 있어 아래에 따로 적어두었다. 작가님께서 부디 한 번만 소리 내어 읽어보시면 대부분 잡히리라 생각한다.
4. 제목에 대한 이야기
참 절묘하게 잘 지었다. 그래피티 바밍을 끝마쳐야 하는 시간. 김 다준의 진술에 남은 로안이 남긴 말.
나는 처음에 여기까지가 전부인 줄 알았다. 시간 제한이라는 표면, 그 뒤에 숨은 로안의 유언.
그런데 다시 보니 단지 시간 제한뿐만이 아니었다.
이 소설이 그래피티를 선택한 것은 매우 영리했다.
그래피티를 그릴 수 있는 시간이 밤이기 때문이었다.
밤은 분명히 어느 시간대를 뭉뚱그리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래피티와 맞물리면 한 가지 조건이 된다.
낮에는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시간, 곧 들키지 않고 자기를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시간.
그래피티가 그렇고, 마음도 그렇다.
8화에서 엄수는 로안에게 “다 들켜요, 형” 이라고 핀잔을 주면서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차라리 다 들키고 싶었다. 이놈의 그래피티고, 제 마음이고.”
들킨다는 동사가 벽과 마음에 동시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아침이 오자 이 밤에 벌어진 모든 일은 이름을 바꾼다. 장난스러운 스킨십은 강제추행이 되고, 우연을 가장한 마주침은 스토킹이 되고, 사랑 고백은 공소장이 된다. 모든 것이 뒤집힐 수 있는 조건으로도 작용하는 시간대를 제목으로 삼은 것. 우연일지 모르겠지만, 기가 막히는 설정인 셈이다.
여기까지도 아주 탁월한 제목이라 생각하지만, 굳이 한 가지를 더 덧붙여보고자 한다.(어디까지나 나의 욕심으로 인해.)
내가 구태여 신경이 쓰인 척을 하고 싶은 단어는 ‘안에’라는 말이었다. 억지가 있겠지만, 이건 공간에 더 잘 붙는 말이긴 하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밤은 공간이 되기도 하겠다. 굳이 밤을 장소로 보려던 까닭은, 다름 아니라 로안이 마지막으로 “영원히 이 밤 안에서 나가지 않겠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기를 온전히 내보일 수 있는 유일한 장소를 발견했다. 그래서 그 안에서 나가지 않기로 한 작정이었다.
그가 샀다는 건물도, 그가 그래피티로 마음을 드러낸 시간도, 그가 마음껏 한 사람을 사랑한 상상도.
단지 ‘안에’라는 두 글자에서, 그가 미완성의 딜렉티오를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 안에 영원히 머물러 있고 싶다는 욕망이, 불현듯 읽혔다. 진짜 기가 막힌 제목이라는 얘기다.
5. 기타 개인적인 이야기
995매를 한 시간 반 만에 읽었습니다. 그만큼 술술 잘 읽히더라고요. 그런데 에필로그를 읽고 나서는, 앞의 몇 회차를 다시 열어보느라 시간을 더 썼습니다. 다시 읽게 만드는 소설을 오랜만에 만나서 무척이나 반가웠습니다.
먼저 밝혀둘 것이 있습니다. 저는 BL장르를 즐겨 읽는 독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 작품을 로맨스로서 얼마나 잘 썼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판단할 능력이 없고, 이 리뷰에서도 그 부분은 거의 다루지 못했습니다. 제가 붙잡은 것은 오직, 단지 사랑이 무엇인지였습니다. 그러니 이 글은 BL장르에 대한 감상이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제가 아쉬운 점을 적어놓았지만, 저는 이것들을 적으면서도 계속 마음이 싱글벙글했습니다. 제가 짚은 빈틈이란 것들은, 대체로 이 작품이 스스로 아주 높은 기준을 세워놓았기 때문에 보이는 것들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회차 제목의 시각 하나까지 CCTV와 맞춰놓은 작가에게 시계의 행방을 묻게 되는 것은, 이 작가라면 그것도 맞춰놓았을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앞의 3절은 불만이라기보다 기대에 가까움을 헤아려주시길 모쪼록 바라보겠습니다.
형식으로 복선을 심을 줄 아는 작가님이십니다. 다음 작품에서는 어떤 형식을 골라 무엇을 감춰두실지, 부담을 드리지 않는 선에서 매우 기대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오탈자 및 표현에 관하여 — 작가님의 향후 작업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를 바라며 적어둡니다. 제가 잘못 본 것이 있을 수 있고, 의도가 있는 표기라면 그대로 두셔도 좋습니다.
8화
- 뭐라 떠들던 여전히 정적 → “떠들든”(선택사항을 나타내는 어미)
- 안절부절하는 로안 → “안절부절못하는”
- 곧잘 받아드렸다 → “받아들였다”
- 타인을 돌보는 일이 몸에 베어버린 → “배어버린”
- 로안은 미쳐 보지 못했다 → “미처”
- <엄수는 그렇게 낚였다> 앞뒤로 시제가 과거와 현재를 오갑니다. 회상 구간이라 의도일 수 있으나, 한 번 확인해보시면 좋겠습니다.
12화
- 이제는 받아드려야 한다 → “받아들여야”
- 센터에 들렸었다 → “들렀었다”
- 십년이 넘도록 → “십 년이”
- 제 여친 제이가 지나가는 말로 — 앞 문장과 주어가 겹쳐 잠깐 헷갈립니다.
15화
- 남들 다보내고 → “다 보내고”
- 착찹한 표정 → “착잡한”
- 아랫 입술을 깨물며 → “아랫입술”
- 타투가 무슨 뜻인지는 묻는 질문에는 끝내 대답해주지 않았다 → “무슨 뜻인지 묻는 질문에는”(조사 중복)
- 쉐이커 통 → 표준 표기는 “셰이커”입니다.
- 그 날 → “그날”(반복적으로 나옵니다)
26화
- 결탁해서 호위호식하는 부자들 → “호의호식”
- 결국은 비즈니즈 → “비즈니스”
- 머릿 속 재판 → “머릿속”(여러 번 나옵니다)
- 돌고 돌아 제 자리로 돌아오게 된 → “제자리로”
- 몇대 몇으로 나누고 싶은지 → “몇 대 몇”
- 모기에 잔뜩 물린 제 팔을 사랑하는 엄수의 허리를 감았다 → “제 팔로 … 허리를 감았다”(조사 오류인 것 같습니다)
- <로안이 무섭도록 철저해 보여서> 와 같은 문장에서 주어가 로안과 엄수 사이를 오가는 대목이 몇 번 있는데, 저는 괜찮았지만 다소 헷갈릴 수도 있겠습니다.
전반적으로
- 회상 구간을 여는 * 표시는 일관되게 쓰이고 있어 좋았습니다. 다만 회상 안에서 다시 시간이 이동하는 대목(12화의 라스베이거스 → 이 밤 → 삼 개월 전)에서는 표시가 하나 더 필요해 보이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