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파 테크노 스릴러 SF라니… 마치 취향을 제대로 간파한 종합 선물 세트 같다.
리뷰에 이모지를 쓰는 건 또 처음이지만 이만큼 취향을 저격한 이야기는 오랜만이라 너무 기쁘다. 같은 사회파 SF를 쓰는 입장에서 이 소설이 얼마나 날카롭게 현실을 해부하고 있는지 기쁘게 줄줄 말하고 싶다.
SF는 때때로 ‘과학’이라는 키워드에 꽂혀 이해하기 어려운, 우리의 현실과 현재로부터 동 떨어진 이야기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그러나 SF만큼 우리의 가장 가까운 곳을 파헤치는 장르는 드물다고 말하고 싶다. 이솝우화가 동화의 탈을 쓴 풍자와 비판의 서사라면, SF 역시 그런 장르 중 하나다. 다만 개인적으로 이솝우화는 친근함의 탈을 쓴 날카로움이고, SF는 날카로움의 탈을 쓴 다정함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므로 역설적이게도 가장 냉소적으로 보이는 다정함을 십분 활용한 이 이야기를 읽고 나면 생각할 거리가 많아질 것이다.
*스포 주의. 소설 감상 후 열람을 권장드립니다.
줄거리 요약
윤재혁 교수는 스승인 서정운 교수의 장례를 치린 직후 서정운 교수를 대신하여 ‘제3차 근지구자원체 회랑관리 및 책임배분 국제회의’에 자문으로 참석하게 된다.
중대한 국제 회의의 도마에 오른 것은 바로 ‘2036 GJ2’라는 금속성 소행성으로, 지구와 충돌 위험이 없던 소행성을 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궤도를 바꾸는 프로젝트를 계획 중이다.
각국은 소행성이 가진 자원의 천문학적인 가치와 위험 요소를 저울질 하여 자국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도 최대의 이익을 얻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다. 그들은 ‘위험회랑’이라는 것을 정의하여, 소행성으로부터의 금전적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필수 불가결하게 내어 놓아야 할 손해를 산정한다.
그리고 이러한 파이 싸움에서 한국 역시 빠질 수 없기에, 재혁이 자문으로 불려온 것이다.
그래서 이전 입장은 조건부 유보.
나는 그 말이 싫었다. 반대하지 않겠다는 말도 아니고, 찬성하겠다는 말도 아니었다. 문서가 회의장 안에 남기 위해 만든 애매한 태도의… 일종의 이중 자세였다.
한국은 좁은 국토와 원전으로 인해 위험회랑을 제공할 수 없지만, 반도체 등의 자원 확보를 위해 완전히 물러설 수도 없는 ‘조건부 유보’ 입장을 취하고 있던 상태였다. 위험회랑 제공국의 사전동의, 독립적인 궤도 검증, 국제배상기금의 선설립, 회수권과 책임분담의 연계를 조건을 걸면서.
“끼지 않는 것과 밖에 서 있는 건 다릅니다.”
“동의가 없으면 사고나 재해의 원인을 못 씁니다.
윤재혁 교수는 자신이 소행성 충돌의 위험성을 계산하는 일로 자문이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2036 GJ2가 대기권을 통과한 후 어느 정도의 질량을 유지할 수 있는지’에 관한 질문을 받는다.
“자연재해인지, 궤도조정 실패인지, 동의한 위험인지가 갈립니다. 이 셋은 보상 지급 구조가 다릅니다.”
“즉 동의가 없으면 배상기금이 아니라 소송이 먼저 걸릴 겁니다. 기금은 사고원인이 정해진 뒤에 움직입니다.”
윤재혁 교수는 구체적인 잔존 질량 및 충돌로 인한 피해를 추산하며 소행성을 끌어오는 프로젝트를 전면 반대한다. 그러나 대표단은 계산 값을 들은 후 윤재혁 교수를 부른 진짜 이유는 ‘반대 의견을 검토함’이라는 일종의 절차를 수행하기 위함이었음을 밝힌다. 더불어 스승인 서정운 교수는 ‘회의장 안에서만’ 반대 의견을 냈으며 한국 대표단에게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내어주지 않았다고 답한다.
“윤재혁 교수의 우려는 이미 대표단 내부 검토에서 제기되었고, 해당 우려를 반영하여 독립검증, 회랑국 사전동의, 배상기금 선설립, 책임분담 연계 조항을 문안에 포함했다.”
“그냥 반대로 남지는 않습니다. 검토로 남습니다.”
“윤 교수님은 내일 반대하셔야 합니다.”
윤재혁 교수의 회의장 밖에서의 반대 의견은, 결국 대표단의 입장을 견고하게 해주는 꼴만 되고 만 것이다. 일종의 함정에 빠진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도마 위에 올라간 숫자는 더는 데이터가 아니게 되는가?
한 번 도마에 오른 숫자는 더는 데이터가 아니라, 어떠한 정치적 수단으로 변모한다. 꿈보다는 해몽이라는 말처럼, 연구의 목적은 때론 그것을 활용하기 위해 억세게 쥔 이들에게 좌우되기도 한다.
그들에게 ‘위험회랑’은 더는 위험 요소가 아닌, 그저 ‘기회비용’에 불과할 뿐이다.
“구매자는 가격을 봅니다. 회랑 제공국은 사고도 같이 볼 테지요. 이익 그리고 책임분담이 필요할 겁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책임분담 문구를 같이 붙이는 겁니다.”
37조 원.
내가 아는 재난의 숫자와 달랐다. 재난은 보통 사망자 수, 이재민 수, 피해 면적, 복구비로 적혔다. 이 표는 아직 아무것도 떨어지지 않은 돌을 두고, 먼저 가격표를 붙이고 있었다.
이쯤에서 효율성과 합리성의 탈을 쓴 현대 사회의 ‘시스템’을 ‘언어의 활용’과 연관지어 보겠다. 정치란 현실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특정 언어와 분류 체계로 재구성하고, 그 과정에서 얼마든지 책임의 주체와 피해의 실체를 흐릴 수 있다. 어떤 데이터든, 어떤 의견이든 의도를 가지고 교묘하게 바꾸는 한 본질은 편리함과 죄책감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달콤한 라벨에 가려져 흐려진다는 뜻이다.
행위자를 지워 수동태로 만들거나, 책임을 과정으로 바꿔 잘못의 강도를 완화시키거나, 책임을 구조 속에 녹여 버리고 사건을 논란으로 만들고, 전문 용어로 본질을 감싸 흐릿하게 만드는 등.
예를 들어 ‘해고’를 ‘구조 조정’으로 바꾸면 사람을 내보냈다는 사실이 하나의 ‘구조’에 녹인 것이고, 더 나아가 ‘인력 효율화’로 바꾼다면 해고라는 개념 자체가 흐릿해지기 마련이다.
이곳에서 ‘위험 회랑‘은 그저 지리적인 범주, 마치 국경선과 같은 이미지로 다가오지만 실상 그 언어를 뜯어보면 이로 인해 산정되는 모든 인명 피해, 자연 파괴 등을 모두 뭉뚱그려 2차원 선으로 납작하게 만들어 버린 것과도 같다.
윤재혁 교수의 반대 의견이 ‘반대’로 남지 않고 ‘검토’로 남은 것은 결과값이 아닌 절차로 속성을 변질시켰기 때문이다.
“모델이 낸 최악조건의 충돌 에너지 상한은 TNT 20에서 60메가톤4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이건 예측값이 아닙니다. 경고값입니다. 그렇게 되리라는 말이 아니라, 그렇게 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입력값을 최악으로 몰아붙였을 때 나오는 경계입니다.”
“가장 많이 남는 시나리오는, 가장 위험한 시나리오와 거의 같은 곳에 있습니다.”
그러나 서정운 교수는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의도적으로 ‘지연’을 택한다
서정운 교수가 ‘회의장 안에서만 반대했다’라는 말이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가?
공식적인 회의가 아닌 한국 대표단의 질문에 반대 의견을 내놓는 것은 ‘자문’이자 ‘공식 협상 자료’가 되지만, 국제 회의에서만 내세우는 주장은 ‘과학자 개인으로서의 입장 표명’이 되기 때문이다. 서정운 교수는 이익을 점하기 위해 움직이는 모든 국가와도 묶이지 않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반대 의견을 정확히 표명했다.
요컨데 서정운 교수는 한국의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비공개 정보 제공이 아니라, 국제 회의에 참여한 과학자로서 공개적인 이견을 내놓은 것이다. 겉으로는 중립을 취하는 척 실제론 신념과 우려를 표하며.
이미 도마에 오른 숫자는 어떻게 되는가?
그렇다면 재혁은 완벽하게 실수했는가?
“서정운 교수님은 참 노련하셨습니다.” “결정적인 질문은 항상 피하셨거든요. 웃으면서.”
“서 교수님은 반대를 회의장 안에서 하셨습니다.”
이 부분에서 서정운 교수가 윤재혁에게 기대한 역할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과학자는 정치적 결정이 과학적 사실을 왜곡하지 못하게 경계선을 그어야 한다.
서정운이 노련하게 뱀 같은 함정을 피해갔다면 그보다 강경한 성향의 윤재혁에게 기대한 것은 경계를 명확히 하는 일이 아니었을까. 당장은 윤재혁이 실수를 했고 서정운이 현명했음으로 귀결될 수도 있겠지만, 판단 유보라는 상태는 영구적인 것이 아니며 필연적으로 완결되어야 한다. 서정운은 그 ‘언젠가’가 윤재혁에 의해 마무리 되길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서정운이 남긴 것은 ‘결론’이 아니라 ‘결론을 내려야 하는 자리’인 것이다.
가능성과 허용은 구분한다. 그렇지 않으면 과학자가 다친다.
이제 재혁에게 남은 과제는 ‘검토된 위험 가능성’을 다시 ‘허용할 수 있는가’라는 ‘결론의 문제’로 되돌리는 것이다.
땅따먹기 같은 가능성들을 도마에서 내려놓기 위해 허용을 도마에 올리는 일.
재혁은 가능성과 허용의 경계선을 그을 것이다.
마치며
사회파 SF를 쓸 때는 ‘얼마나 강하게 찌르는가’가 아닌, ‘얼마나 정확히 찌르는가’가 중요하다. 본질이 아닌 표면을 찌르는 것은 자칫하면 왜곡된 고정관념을 부여할 수도 있고, 나이브한 글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판에는 필연적으로 시니컬함보단 애정이 많이 깃든다. 충분히 관찰하고 품을 들여야만 본질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요령은 없다.
비평만큼 냉소의 탈을 쓰면서도 애정 어린 작업은 없기에, SF와 비판은 유사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작품은 이러한 작업을 아주 정확히 해냈다.
브릿G는 SF 애호가를 위한 뷔페 같은 곳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번 명작들이 나오니 도저히 끊을 수가 없다. 그것도 매번 신규 작가님들이 와서 맛있는 것들을 잔뜩 던져주시니 입을 열고 열심히 받아 먹는 수밖에… 좋은 글을 선보여주신 작가님께 감사를 표하며 리뷰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