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 요약
장마가 계속되는 한양. 포도청 도사 서현록은 사람의 감정을 읽는 저주 같은 능력, 영안(靈眼)을 지녔다. 광통교에서 발견된 시신 넷은 하나같이 같은 각도의 기이한 미소를 짓고 있고, 사인은 익사로 판정되지만 현록의 영안엔 인위적으로 엮인 감정의 흔적이 보인다.
그는 잔기(殘氣)를 읽는 의녀 한설의를 찾아가고, 두 사람은 사건의 배후에 울림벌레—사람의 마음을 먹고 몸을 얻어 사람이 되려는 감정 군체—가 있음을 알게 된다. 용산 옛 무당터에서 현록은 울림벌레의 부름을 직접 경험하며, 자신이 그 ‘그릇’ 후보임을 깨닫는다.
설의는 자신이 어린 시절 용산에서 동생을 울림벌레에게 잃고, 자신도 감정을 빨아 먹혀 “텅 빈 그릇”이 되었다는 과거를 고백한다. 울림벌레의 군체는 이내 둘로 갈라져 각각 현록과 임금을 그릇으로 노리기 시작하고, 두 사람은 궁궐로 향해 이미 울림에 잠식된 임금과 대면한다.
설의가 금기의 옥판으로 자신의 피를 대가 삼아 울림을 흔들고, 현록은 안락으로 유혹하는 울림벌레의 속삭임을 거부와 저항의 감정으로 맞선다. 결국 군체는 절반으로 쪼개져 궁궐을 떠나지만, 나머지 절반은 현록의 몸속에 잠복한다. 이야기는 현록이 언젠가 자신 안의 울림과 다시 마주해야 함을 예고하며 끝난다.
울림벌레는 실체 없이 “감정의 파형”으로만 존재하는 것으로, 공포·앙심 같은 극단적 감정에 기생한다는 설정이 신선하다. 살을 파먹는 대신 마음을 비운다는 발상이 공포스러우면서 동시에 시적이다. 장마, 광통교, 혜민서 약재방 등 축축하고 음습한 배경 묘사가 시종일관 일관되게 유지되어 몰입감도 준다.
근데 리뷰를 쓰다 말고 자꾸 딴 생각이 났다. 내가 좋아하는 게임 ‘데스티니 2’에도 이것과 상당히 닮은 시즌스토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또 ‘지만 아는 얘기 하는 리뷰어’다)
거기엔 ‘군체(Hive)’라는 외계 종족이 나온다. 이들은 자신의 몸에 ‘벌레신(Worm God)’을 키우고, 그 벌레에게 끊임없이 공물을 바치며 그 대가로 영생에 가까운 수명을 보장받는다. 벌레는 숙주의 몸에 깃들어 숙주를 서서히 ‘군체’로 만들어가고, 그 관계는 기생이라기보다 거의 신앙에 가깝다.
그리고 이 시리즈엔 그 군체 왕족 중 하나를 무너뜨리기 위해, 아군 NPC 하나가 자진해서 그 벌레신을 자기 몸에 받아들이는 에피소드가 있다. 그녀는 벌레(와 군체 종족)가 속삭이는 온갖 유혹과 속삭임에 대해 “네놈들이 주는 것은 그 어떤 것도 거부하겠다”고 선언하며(이전 시리즈 에피소드에서 군체들이 그녀의 친구들을 전멸시켰다), 오직 군체 여왕을 쓰러뜨리는 데 필요한 딱 그만큼의 힘만 취하고 나머지는 전부 뿌리친다. (물론 한 번 몸에 들인 것을 완전히 되돌리지는 못해서, 그 대가는 후속 이야기 내내 그녀를 따라다니지만.)
『울림벌레』를 읽으면서 이 장면이 계속 겹쳐 보였다. 하필 ‘군체’에다가 ‘벌레’라는 존재의 이름부터가 그렇고, 그 벌레가 ‘마음’을 먹어치우고 사람을 그릇으로 만들려 한다는 설정, 그리고 그것이 내미는 것이 협박이 아니라 안락과 위로라는 점까지 구조 자체가 놀랄 만큼 닮아 있다.
현록이 임금의 침전에서 울림벌레와 대치하는 장면은 그래서 더 절실하게 읽혔다. 울림벌레는 그에게 “쉬어라, 보는 것은 곧 상처다”라고 속삭인다. 영안이라는 저주에 평생 시달려온 그에게 그 제안은 사실 구원처럼 들릴 법도 하다. 그런데 현록은 그 안락을 발로 걷어차며 “나는 그대들이 바라는 그릇이 아니다”라고 맞선다. 이것은 그 게임 속 NPC가 벌레의 모든 것을 거부하며 오직 필요한 힘만 뽑아 쓰던 그 태도와 본질적으로 같게 보였다. 괴물이 주는 것을 하나도 받지 않으면서, 그 괴물과 맞서기 위한 최소한의 힘만 스스로 짜내는 것. 그게 이런 스토리, 이런 장르에서 가장 매력적인 저항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결말에서 울림벌레의 절반이 현록의 몸속에 남는다는 설정도, 그 NPC가 벌레를 완전히 떼어내지 못하고 계속 그 대가를 짊어지고 가야 했던 것과 겹친다. 이 장르—군체적인, 몸을 잠식하는 존재와 싸우는 이야기—는 결국 “완전한 승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받아들이는 데서 오히려 더 진한 여운을 남기는 것 같다. 현록이 이겼지만 온전히 이겼다고 할 수는 없는 이 결말이, 나에게는 단순한 괴담이 아니라 ‘원치 않는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몸에 무언가를 들인 영웅’의 이야기로 다가왔다.
이야기 구조나 정서를 완전히 베낀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겹쳐 보이는 걸 보면, 아마 ‘괴물이 내미는 안락을 거부하는 인간’이라는 서사 자체가 어느 문화권에서든 통하는 원형적인 공포이자 카타르시스인 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 작품은 그 원형을 조선이라는 배경 위에서, 영안이라는 저주와 감정의 결이라는 소재로 훌륭하게 재현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