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편소설 『고된 희생』을 읽고
- 감각의 연쇄로 직조한 디스토피아의 밑바닥
『고된 희생』의 시작은 시각과 후각을 자극하는 생생한 공간 묘사로 독자를 압도한다. 썩은 음식 냄새와 담배 연기가 뒤섞인 진흙탕 골목, 언덕 위에 군림하는 하얀 대리석의 ‘디미론 모스크’와 그 아래 무너져 내릴 듯한 인부들의 천막촌. 이 극단적인 시각적 대비는 디미론이라는 도시의 구조적 모순과 폭력을 설명조 없이 단숨에 체감하게 만든다.
특히 돋보이는 것은 정서를 전달하는 감각의 연쇄다.
다음은 온기가 전달되는 경로이다.
웃을 때 드러나는 주름 사이에는 따스한 온기가 배어 있었다. -> 노인이 챙겼다가 주인공에게 건네주는 빵조각.(이 자체가 따뜻한 행위) -> 주인공의 목구멍을 지나며 속을 덥혔다.
너무 멋지다. 보기 드문 멋진 연결이다. 보통 작가가 상징으로 깔아주는 복선들 – 예를 들면 ‘병실에 누운 아들의 초록색 입마개’ -> ‘엄마 무당의 입술에 흐르는 녹색 물감’ – 을 그들의 소설 속에서 자주 보지만 이렇게 맛깔스러운 연결 경로를 보여주는 작가의 작품은 보기 힘들다. 프로이건, 아마추어이건. 이건 큰 자산이다. 재능이다.
‘그 몇 입의 빵조각이 찢긴 하루를 간신히 이어주는 힘처럼 느껴졌다.’ -> 시적이고 멋진 문장이다. 그런데 과하다. 찢긴 하루가 무엇인지에 대한 장면이 없는 상태에서 독자의 공감을 얻기는 힘들다. 이전 장면에서 주인공의 찟긴 하루를 설명할 구체적인 장면 묘사 – 배급받는 빵을 받으러 오지 못할 일이 무엇인지? 성벽 쌓기? 그게 하루가 찢길 만한 사건인가? – 가 있다면 이 문장을 빼버려도 독자가 다 이해한다.
물론 뒤이어 노인의 입을 통해 주인공이 누명을 뒤집어썼고, 노인이 사과하는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은 이 노인의 온정을 지켜야만 할 것이라고 결정한다. -> 온정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이 온정을 가진 사람을 지켜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럼 노인? 이전 정면 묘사에서는 아직 온기를 느낄 만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서로의 손가락을 물어뜯는 정도의 굶주린 아이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식적인 상징을 억지로 끼워 맞추지 않고, ‘표정 -> 사물 -> 육체’로 이어지는 유려한 감각적 이동 경로는 작가가 지닌 뛰어난 묘사적 재능을 증명한다.
- 마법의 거세와 잔혹한 아이러니: 희망이라는 덫
이야기는 주인공 탈란의 손목에 ‘특수 억제 수갑’을 채우며 그를 가장 무력한 육체로 추락시킨다. 마법의 차단을 “사지가 절단된 환자“의 감각으로 묘사하며 밑바닥 노동의 고통을 극대화한 서사는, 동료 ‘알 마르단’의 등장과 함께 비극적 전환을 맞이한다.
구원을 위해 띄운 탈란의 편지가 발각되어 알 마르단의 등가죽을 찢는 40대의 채찍으로 돌아오는 순간, 희망은 가장 잔인한 덫이 된다. 침묵해야만 살아남는 군중의 비겁함과, 나 때문에 붉은 피웅덩이를 만들어 가는 동료를 지켜봐야만 하는 탈란의 마비된 발걸음은 묵직한 도덕적 딜레마를 만들어낸다.
- 자본이 집행하는 ‘정의’와 두 송이의 들꽃
알 마르단의 죽음 이후 찾아온 탈란의 해방은 통쾌하기는커녕 서글프도록 차갑다.
“단지 몇 개의 주화가 모든 서류를 뚫고 지나갔을 뿐이다.”
편지 한 장을 건넸다는 이유로 한 인간의 목숨을 짓밟았던 잔혹한 시스템이, 거상의 주머니에서 나온 금화 몇 닢 앞에서는 ‘치안 협조자 사면’이라는 우스꽝스러운 명분으로 문을 열어젖힌다. 이 차가운 자본의 논리 앞에서 작가는 탈란의 내면을 ‘두 송이의 들꽃‘이라는 탁월한 시각적 오브제로 완성한다.
- 첫 번째 들꽃: 진흙투성이 죄수복을 입은 채 이름 없는 무덤에 얹었던 ‘빛바랜 들꽃’
- 두 번째 들꽃: 신분과 번듯한 옷을 되찾은 뒤 다시 찾아가 내려놓은 ‘선명하지만 곧 시들 들꽃’
말끔히 목욕을 마쳤음에도 탈란의 발걸음이 화려한 상업지구가 아닌 흙무덤으로 향할 때, 독자는 그의 가슴에 새겨진 부채의식이 영원히 씻겨 나가지 않을 것임을 직감한다.
- 결말의 울림: “너는 날 팔지 않았구나“
마지막 무덤 앞에서 터져 나오는 탈란의 독백은 이 소설의 백미다.
“진실을 파는 이 도시에서, 너는 날 팔지 않았구나.”
“내가 네 몫까지 증명하겠다.”
온갖 부조리와 배신이 일상이 된 도시에서, 끝끝내 자신을 밀고하지 않고 죽어간 알 마르단의 침묵은 그 자체로 가장 숭고한 ‘고된 희생’이었다. 살아남은 자가 짊어져야 할 ‘증명‘의 무게를 품고 노역장을 나서는 탈란의 단단한 걸음은, 독자에게 깊은 여운과 함께 앞으로 이어질 거대한 반격에 대한 기대감을 남긴다.
[총평 및 제언]
첫 단편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세계관의 조형미와 감각적 묘사, 비극적 플롯의 배치가 탄탄하다.
다만, 중반부 네지르와의 해후 장면에서 다소 가볍게 튀는 대사 톤과 전지적 작가 시점의 부연 설명(“인부 두 명은 착각하고 있었다” 등)을 조금 더 덜어내고 건조한 긴장감을 유지했다면 작품의 밀도가 한층 더 서늘하게 조여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각의 연쇄를 통해 인간의 존엄과 희생의 가치를 묵직하게 길어 올린 이 작품은, 정통 다크 판타지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처절하고도 아름다운 첫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