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한달 전, 처음 리뷰 공모에 뜬 이 소설의 소개글과 첫 페이지를 읽은 기억이 난다.
그녀가 잠든 동안에만 깨어나는 연인, 현과 한 몸을 공유하는 이서. 두 사람은 편지와 사진, 서로가 남긴 생활의 흔적으로 사랑을 이어간다. (작품 소개글에서 발췌)
거의 한달이 지나고 리뷰 마감 기한이 임박해왔는데, 문득 관심이 생겼다. ‘나의 부재중 연인’이라…무슨 내용일까? 가슴 절절하게 아파오는 비극 로맨스인가? 제목에서 그런 느낌이 있긴 하다. 해시태그에 ‘로맨스릴러’, ‘심리스릴러’라고 되어 있는데, 한 몸을 공유하는 두 연인의 로맨스라…궁금증에 시간을 내어 끝까지 정독했다. 그리고, 다시 처음부터 재독했다. 선입견을 가지고 읽지 않았던 것은 오판이었다.
로맨스와 치유/성장이라는 이중축으로 정교하게 설계된 이야기
주인공 이서는 어렸을 적 고모의 집에서 키워지면서 학대당한 여성이다. 뜨거운 물과 찬 물 속에서 학대받고, 먹기 싫은 파를 억지로 먹이고자 며칠을 굶기는 등 고모에게서 아동학대를 당한 트라우마가 있다. 그 과정에서 이서는 내면으로 회피하고, 새로운 인격이 전면에 등장한다. 무의식 속에서 출현한 이 자기보호 본능의 인격은 이서의 내면에 숨어 있던 남성성이다. 이서와 무의식은 편지로 소통하기 시작하고, 이름을 묻자 그는 ‘현’이라고 답한다. 이 두 존재 간의 로맨스는 보호, 고백, 애착, 감시, 가스라이팅, 질투, 간섭, 개입 등 남녀 간 로맨스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단, 육체관계만 제외하고.
이서와 현의 로맨스는 특수하다. 해리성 인격 장애라는 설정이 이 로맨스의 구조를 굳건하게 받친다. 두 사람은 하나의 몸을 공유하지만 동시에 현전할 수 없으며, 따라서 비동시성을 갖는다. 한 사람이 깨어 있을 때, 다른 쪽은 나타나지 않고, 두 사람이 교신할 수 있는 것은 편지나 사진 같은 매개를 통해서다.
고모로부터 주거를 독립하면서 이서는 중소기업에 취직하게 되고, 새 직장에서 도윤이라는 남자가 이서에게 다가온다. 도윤은 친절하며 배려심이 깊어보인다. 이서가 도윤에 대해서 편지에 언급하자, 현과 이서의 관계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현은 이서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사실은 질투하기 시작한 것이다. 급기야 도윤에게 문자를 보내 이서와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이서가 정신과 상담을 예약한 것도 취소해버린다. 현은 이서가 자신을 소멸시키려 하는 게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한다. 이 지점부터 두 연인의 로맨스는 스릴러로 변모한다.
상실의 두려움과 고통을 넘어 성장하는 서사
이 소설에서 이서는 현과 직접 조우하진 못하지만, 소설의 후반부 꿈 속에서 현을 만난다. 무릎까지 물이 찬 공간에서이다. 물은 심리학에서 무의식을 상징한다. 현은 이서의 무의식 안에서 발현된 인격이므로, 꿈 속에서 조우하는 것은 가능했을 것이다. 현은 묻는다.
“후회 해?”
그가 다시 물었다.
이서는 울었다. 한참을 울고 나서야 대답했다.
“…아니.”
목소리는 잘게 부서져 있었다.
“후회 안해.”
현은 이서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그럼 됐어.”
현은 이때 이서에게 통합되며 사라진다. 현이 떠맡고 있었던 이서의 두려움, 고통, 공포는 모두 이서의 것이 되었다. 갈라졌던 인격이 이서의 것으로 온전히 통합되는 순간. 이것은 이서가 회피했던 과거의 트라우마를 껴안으면서 치유되는 순간이면서 동시에, 사랑했던 연인, 현과 영원히 작별하는 상실의 순간이다.
이 소설은 비극적인 로맨스와, 내면의 치유, 통합, 성장서사를 동일한 층위에서, 해리성 인격장애라는 구조 위에 정교하게, 유기적으로 결합시켰다. 현은 이서 안에서 발현된 자기보호본능일 뿐이었을까?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듯 하다. 현은 자의식을 가지고 아래와 같은 깨달음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고통을 대신 겪는 것만으로는 이서를 행복하게 할 수 없다.
현과 이서의 사랑이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은 이 두 사람이 별개의 몸을 가진 다른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분열이 끝나자, 연애도 끝이 난다. 둘의 사랑이 이어지는 한, 분열은 계속될 것이며, 이서는 계속 회피하게 될 것이다. 온전히 자기 앞에 놓여지는 삶 속의 수많은 위험과 고통들을 직면하지 못할 것이며, 현에게 위임하면서 반쪽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이서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현을 사랑했으므로, 그에게 그 고통들을 홀로 짊어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삶의 주권을 되찾고자 하는 열망에 각성했다.
사물이 말하는 이야기
이 소설의 가장 정교한 지점은 주제가 아니라 사물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서와 현은 서로를 만질 수 없으므로, 이 소설의 모든 감정은 사물을 매개로만 전달된다.
샤워기 손잡이가 대표적이다. 뜨거운 물을 견디지 못하는 현을 위해 이서가 미지근한 쪽으로 돌려두는 손잡이는,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세 번 다른 의미로 돌아간다. 처음엔 배려로, 상담 이후엔 이서가 현이 견딜 수 있는 온도로 스스로 씻는 순종으로, 그리고 마지막엔 통합된 이서가 이제는 자신의 감각이 된 화상의 기억 때문에 스스로 미지근한 물을 선택하는 장면으로. 손잡이라는 사물 하나가 관계의 시작과 끝을 전부 짊어지고 있는 셈이다.
냉장고 옆 약속 종이도 마찬가지다. 테이프가 뜨고 다시 붙고 결국 말려 올라가는 과정이 소설 곳곳에 점묘처럼 흩어져 있는데, 이는 두 사람의 계약이 무너지는 과정을 대사 하나 없이 추적한다. 그리고 결말에서 이서는 이 종이를 버리지 않고, 현의 편지들과 사진 위에 나란히 넣어둔다. 서랍을 닫는 마지막 소리(딸깍)는, 소설의 첫 문장에서 열림과 닫힘을 구별하지 못했던 현관문 경첩 소리와 조용히 대구를 이룬다. 문은 처음부터 보호와 감금을 구별하지 못하는 소리를 냈고, 서랍은 마지막에 가서야 하나의 방향으로만 닫히는 소리를 낸다.
현의 통제 방식 역시 눈여겨볼 만하다. 그는 한 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너 그 사람 얘기를 네 번 썼어. 싫다는 건 아니고. 그냥 세어봤어” 같은 문장은 왜곡이 아니라 정확한 관찰이다. 그래서 이서는 편지를 쓰기 전에 이름을 세고, 지우고, 다시 고쳐 쓰게 된다. 감시가 어떻게 자기검열로 내면화되는지를, 소설은 설명이 아니라 이 반복되는 사소한 습관으로 보여준다.
다만 아쉬운 지점도 있다. 후반부, 현의 시점으로 전환되는 꿈 시퀀스는 이 소설에서 가장 대담한 형식적 선택이면서 동시에 가장 흔들리는 구간이다. 이서가 현의 기억을 넘겨받는 것이 플롯 사건이므로, 시점이 현으로 옮겨가는 것 자체는 서사적으로 정당하다. 그러나 이 구간에서 이미 앞서 극화되었던 장면들(책갈피 환불, 도윤에게 보낸 메시지, 메모장 삭제)이 현의 동기 설명과 함께 다시 서술되면서, 전반부가 물증만으로 쌓아 올렸던 절제가 잠시 흐트러진다. 다행히 마지막 페이지 — 보여주지 않는 편지, 딸깍 닫히는 서랍, 돌아보지 않는 뒷모습 — 가 그 절제를 다시 회복시키며 소설을 닫는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이 소설을 다 읽은 후, 드는 질문. 사랑이란 과연 무엇일까? 정답은 없을 것이다. 사람마다 다 저만의 정의가 있을 것이므로. 현과 이서의 사랑도 엄연한 사랑일 것이다. 현은 처음엔 왜 자기만 이 고통을 받아야하나 하고 이서를 원망하지만, 웅크린 채 울고 있는 이서를 보며 측은심을 느끼고 그녀가 부서지지 않길 바랐고 그래서 보호하고 싶었다. 하지만 고통을 대신 짊어진다고 해서 그녀가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도 깨닫는다. 이서는 현을 사랑했지만 현이 그녀의 일상을 감시하고, 통제하고 침범해오자 그것에 불편함을 느끼고, 결국 현을 자신의 존재 속으로 통합시키는 결정을 한다. 후회할 거라고 느끼면서도.
사랑은 기본적으로 다른 몸을 가진 두 존재 간의 관계성의 일이다. 이 소설에 나온 현과 이서처럼 하나의 몸을 두고, 비동시적으로 현전하는 존재들은 서로를 껴안을 수도, 만질 수도, 키스할 수도 없다. 상대를 대신하여 고통을 짊어진다 해도 상대를 행복하게 해줄 수는 없는 운명이다. 과연 사랑이란 무엇일까? 상대를 보호하고 구속하고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유로워지게 허용하고 배려하는 것일까?
끝내 현은 이서에 대한 사랑으로 이서에게 통합되는 것을 허용한다. 이서는 현이 홀로 고통을 짊어지지 않도록 현을 흡수하고 전면으로 나서기로 한다. 그들의 사랑은 보호본능과 헌신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자기 희생과 고통을 마주하는 용기로 나아간다. 이 소설의 로맨스는 비극으로 끝났지만, 오직 사랑의 관점에서 본다면 상실에도 무릎꿇지 않은 극복, 승리의 결말일 것이다.
Amor Vincit Omnia.
사랑은 모든 것을 극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