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의 발자취를 따른 품격 있는 변주 <Bless my homeland forever> 의뢰(감상)

대상작품: [림버스 컴퍼니] Bless my homeland forever (작가: 윤주안, 작품정보)
리뷰어: 소나기내린뒤해나, 8시간 전, 조회 8

 

“그래서 넌 책을 읽는 거고, 난 총을 쥐는 거고.”

– 먼지속의 목소리 中

 

 

목차

1.그들의 팬심은 또 다른 세상을 창조하기 마련이죠.

2.이 작품을 맛보기 위한 키워드는 확장

3.누군가도 이 작품을 사랑할 수 있기를.

 

 

<본 리뷰는 윤주안님으로부터 의뢰를 받아서 작성한 리뷰이며, 연재된 회차의 400매 가량을 정독 후 작성되었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1.그들의 팬심은 또 다른 세상을 창조하기 마련이죠.

 

게임과 만화를 비롯한 장르를 사랑하는 팬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에 대해 ‘2차 창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애정을 표출하는 것이 당연해진 세상입니다. 이처럼 팬픽(Fan Fiction)’으로 재탄생되는 여느 장르를 이끄는 원동력은 역시, 해당 작품에 대한 ‘애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선대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고 작품을 빚는 여느 예술가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마스터피스(Masterpiece)’라고 평가하는 작품들 또한, 그 이전에 있던 또 다른 ‘명작’으로부터 받은 영감을 뿌리로 두고 있기 마련입니다. 명작과 명작을 이어주는 그 틈새를, 저는 이 글에서 선행 작품을 닮고 싶어 하고 나아가 그것을 넓히고 싶어 했던 누군가의 애정이었다고 감히 정의하고자 합니다.

 

수집형 RPG 게임 <림버스 컴퍼니>는 이런 애정 넘치는 소비자들을 보유하고 있는 유명한 작품 중 하나입니다. 기업들이 지배하는 가상의 세계 ‘도시(The City)’를 배경으로 한 이 게임은 뛰어난 배경설정과 복합적인 인물들을 내세우며 고유한 매력으로 두터운 팬층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읽은 <Bless my homeland forever> 또한 이 <림버스 컴퍼니>라는 게임에 대한 헌정격인 작품으로서, 이 작품이 그리는 세계에 참여하고 싶은 작가의 의도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습니다. 한국과 영국이 모종의 초월적인 힘으로 해당 세계로 통합된다는 가정을 그린 이 소설은, 뛰어난 해군 고증과 권력자에 대한 비판, 그리고 역사라는 하나의 줄기에서 관측되는 불편한 고찰들을 멋지게 그려내며, 단순히 작품에 대한 편승재편을 넘어 또 다른 확장을 시도합니다. 그것이 앞서 말한 팬픽(Fan Fiction)’이라는 개념과 어긋나는 무언가는 아닙니다. 오히려 특정 작품에 대한 영감과 애정이 어떤 식으로 작품을 빚어내는가에 대한 적절한 예시라고 한다면, 이 소설이야말로 이상적이고 완성도 높은 팬픽(Fan Fiction)’의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자면, 저는 <림버스 컴퍼니>라는 게임을 즐겨본 경험이 없는 상태로 이 소설을 접했습니다. 때문에 작품 내에서 관측될 법한 원작 게임을 계승하는 요소에 대해 크게 감지하지 못 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것이 작품을 100% 읽어내지 못 했다는 비판으로 이어진다면 변명이 없겠지만, 역설적으로 이는 원작의 틀에 갇히지 않고 텍스트 그 자체의 순수한 문학적 가치와 서사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원작의 요소를 감안하지 않고 읽어냈을 때 모호한 밑그림으로 남겨두고 흘려보내야하는 요소가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이 작품은 많은 정보 면에서 독자를 가리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으며, 역사와 군사적 요소에 한해서도 그 흔한 각주 하나 없는 불친절함 때문에 해당 지식이 없으면 독해가 불가능한 면도 있습니다. 해당 감평문은 선술한 모든 요소들을 장애물로 놓아둔 채 정독했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2.이 작품을 맛보기 위한 키워드는 확장

 

이 작품처럼 팬픽이라는 장르는 원작에 편승하며 제작되는 애정의 산물에 가깝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만, 그 결과물로 가는 방향성에는 다양한 배경이 관측되곤 합니다. 우선 저는 그 배경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

 

첫째, 기존 이야기의 시공간과 인물을 변주하여 재조립하는 재편의 단계

둘째, 재조립된 세계관 위에 새로운 주제 의식과 인문학적 깊이를 더하는 확장의 단계

 

이렇게 두 부류를 가정하고 살펴볼 때, 이번에 읽은 <Bless my homeland forever>야말로 원작의 무대를 영리하게 재편한 뒤, 이를 역사적 순환이라는 묵직한 담론으로 확장하는 지적인 설계를 보여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국, 한국을 잇는 유일한 길목이 바로 이 부두였다. 그리고 이 부두는, 두 개의 거대한 철벽 사이에 끼여 있었다. 서쪽의 철벽은 영국의 것이었고, 동쪽의 철벽은 한국의 것이었다.

아스마엘은 트립을 처음 목격한 날을 기억한다. 스코틀랜드 북부와 한반도 휴전선 너머가 동시에 뒤틀리며, 양국의 경계가 이 세계로 밀려들어왔다.

 

트립이라는 모종의 초자연적 현상은 이 작품이 팬픽으로 원작을 재편하기 위한 장치로 해석됩니다. 서사적으로는 영국과 한국이라는 두 국가가 원작의 세계로 편입되기 위한 통로이며, 기술적으로는 이 작품이 원작에서 창조해놨던 기존의 세계를 마음에 드는 재료로 조립할 수 있는 가장 큰 바탕이 되어줍니다. 이 과정에서 트립이라는 단어가 정확히 무엇인지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두 국가가 원작의 세계로 편입되는 모종의 계기라는 것은 어렵사리 이해할 수 있지만, 그 현상의 이유와 과정은 거의 소명되는 바가 없습니다. 이 의도적 모호함은 트립이라는 현상을 배제하고 오로지 본편에서 재편되는 이야기의 행방에만 집중하는 효과를 낳기도 합니다. 영국과 한국이 원작의 세계로 편승되는 이 결과물에는 특별한 이름이 없습니다. 그것은 이 작품이 시작되기 위한 시발점,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면 안 됩니다.

 

목록에 없는 물건이 사라졌다더군. 이번엔 책이래.

이란 말은 전날 주인의 입에서도 나왔었다. 하루 만에 두 번이면, 이건 우연이 아니었다.

손끝에서 미묘하게 느껴지는 질감과 무게가, 이 책이 위험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 책을 버릴 수도, 계속 들고 갈 수도 없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무겁게 등을 짓눌렀다.

 

해당 이야기는 배경을 뒤로 한 채 주인공 이스마엘에게 초점을 맞추며 작가가 재편한 세상을 탐험합니다. ‘책’은 그 탐험의 선택적 이정표입니다. 냉정히 말하자면, 이스마엘이 왜 이 이라는 물품에 신경이 집중되는지는 개연성 측면에서 문제의 여지가 있습니다. 이 을 손에 넣고 책을 강탈하려는 자들로부터 도망치는 모든 과정이 거의 본능적인 감과 경계에 의존하는 인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이 작품에서 어떤 인물적인 개연성과 사건의 인과를 눈여겨보는 것은 작품이 보여주고 싶은 의도와 빗겨가는 듯한 불편한 동행이 될 여지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이 작품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에 따릅니다. 이것은 재편된 이야기를 확장하기 위한 창구라고 해석하는 것으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그 미소는 3년 전인 2027년을 기록한 책 내용과 똑같았다.

2027년 사진 속, 광장 한쪽에서 체포되는 사람들의 모습과 오늘의 장면이 하나로 이어졌다.

이스마엘의 시야 속에서 현재와 과거가 완벽하게 겹쳤다.

책 속의 기록과 방금 본 현실이 완벽히 겹쳐 있었다.

 

작품은 마치 이 을, 관습적인 표현으로 예언서와 같은 사물로 표현하는 듯합니다. 실제로도 독자에게 다가오는 인상도 미래를 기록한 예언서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400매 분량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에, 그 의 역할은 예언과는 미묘한 결의 차이를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미래를 예측한다는 소재를 다룬 매체들을 살펴보면 그 예측이 곧 다가올 미래를 대처하는 무기로 작용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장치와 구별되는 이 책의 본질은 소설 내에서 미래가 아닌 과거를 기록한 역사서라고 정의되는 데서 비롯됩니다. 이스마엘은 미래를 살피기 위해 책을 펼치는 것이 아닌, 현재를 다시 보기 위해 책을 펼칩니다. 책 속에 기록된 역사는 지금 눈앞의 벌어지는 일과 기이하리만치 겹쳐 있습니다. 주요인물, 사건, 관련 영향까지 대부분 동일하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야기는 단순한 게임 팬픽을 넘어 역사의 순환과 인간 권력의 본질에 대한 성찰로 ‘확장’됩니다. 시간은 흐르고 세계는 바뀌었으나, 인간이 저지르는 비극의 꼴은 기이하리만치 닮아 있다는 서늘한 진실을 병렬적으로 포착하는 과정입니다.

 

폭도라 불린 이들 중 다수는 단지 다른 목소리를 냈을 뿐이었다. 그러나 왕의 미소는 그 목소리를 지우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이 기록은 후대에 전한다. 도시의 기초는 피로 세워졌고, 그 피가 누구의 것인지를 잊는 순간, 도시는 다시 목마르게 될 것이다.”

 

어쩌면 이 트립이라는 경계로 과거의 사건이 현재에 재현되고 있다는 시간적 모순이 작품의 주제라고 해석될 여지도 있습니다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작품은 명확히 날짜를 명시하고, 어디까지나 그 안의 기록이 과거라고 단정되며, 그것이 현재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설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작품은 역사의 재현이 아닌 역사의 재현을 강조한다고 보는 쪽이 타당합니다. 원작으로 편입되고 재편되고 있는 이 공간을 기점으로, 작가는 역사를 재현한다는 현상의 의미를 되살리고 있습니다.

 

80년대, 대처가 효율이란 이름으로 공장과 탄광을 닫아버렸을 때우리 마을도 끝장났지. 아버지는 탄광이, 어머니는 공장 일이 전부였는데, 하루아침에 둘 다 사라졌어. 남은 건 실업수당이랑 값싼 주류뿐이었지.

대처는 적이었어. 대놓고 우리를 버렸으니까.”

난 대처가 했던 짓을 똑똑히 기억해. 광부 마을을 죽이고, 노동자를 거리에 내몰고, 우리 쪽 땅도 그 예외가 아니었지.

산업 재건이라는 명분 아래 점령지 자원을 이전했다. 불만은 폭도라 불렸고, 진압은 안전 확보라 기록됐다.”

아버지는 런던 정치인들을 욕했고, 어머니는 탄광 마을에서 굶주리던 시절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매번 그 중심엔 대처라는 이름이 있었다.

 

반복되고 재현되는 역사적 비극에 있어서, 작가는 명백히 탐욕에 눈이 멀고 도덕적 개념이 마모되었던 여느 권력자들을 범인으로 지목합니다. 작중에 비중 있게 언급되는 대처라는 인물은 이런 역사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비극을 생산하던 대표처럼 그려집니다. 그녀는 고향의 일족들을 배신하고 권력을 탐했던 전형적으로 부패한 위인입니다. 그런 그녀가 했던 일은 주변 인물들의 언급으로만 남아 있지만, 그 목소리에서 발견되는 흔적은 계급을 분산하고 자유를 통제했던 여느 권력자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지나치게 평면적인 권력의 단편을 묘사했다는 비판의 여지가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역사에 이름을 남긴 권력자들의 모습이 정형화되어 있다는 현실을 지적하는 듯한 인상으로도 다가옵니다. 역사의 반복과 재현이라는 주제에 있어서 이 점은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결국 인간을 통제하고 갈취하는 인간의 모습이란 역사의 면면 속에서 그 형태와 악취가 일정했다는 의미일 테니까요.

 

대통령님, 핵무장은 통치의 심장과도 같습니다. 점령지에 대한 통제력은절대적일 것입니다.”

핵은 쓴다고 해서 가치가 있는 게 아니지요. 존재 자체가 힘입니다.”

우리에게도 명분이 필요했지요. 대처가 망쳐놓은 이 나라를 다시 세울 기회입니다.”

 

이후 트립이라는 이름으로 현 세상으로 편입된 한국과 영국의 지도자들의 모습은, 대처라는 인물로 대표되었던 역사적 수탈의 재현이자 더 커다란 혼란의 전조로 비춰집니다. 그들은 전형적인 힘과 부를 손에 주무르는 악인처럼 묘사됩니다. 핵이라는 무기를 들고 힘을 만족시키며, 경제를 조종하여 그 중심에 머무르고자 합니다. 근현대사에서 목격되는 독재자와 권력자의 모습이 그대로 이식되는 셈입니다. 그 명분이 대처라는 인물이 망가뜨린 사회질서의 회복이라는 것은 마치 모순처럼 느껴집니다. 독자 입장에서는 이것이 대처의 만행이 현실에 재현이 되리란 것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고립을 피할 수 없습니다. 도시와 맞닿은 이 시계는, 더 이상 현실 세계의 질서가 닿지 않는 곳이 되었지요. 살아남으려면, 단순한 교역이나 협정이 아니라절대적 보장이 필요합니다.”

네 부모가 떠나온 그때나,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이나다르지 않네. 누군가 경계선 위에서 판을 짜고, 아래 사람들은 거기에 맞춰서 살거나 무너지는 거지.”

 

이처럼 트립이라는 이름으로 재편되었던 이야기는 역사라는 이야기로 확장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정점에 오른 인간의 일그러진 본성을 지적하기에 이릅니다. 이 작품은 팬픽이라는 일련의 장르를 탐하면서도 그 주제적인 지점을 노련하게 더듬고 있습니다. 역사라는 이름으로 기록되는 인간의 시대는 간혹 그 시간선의 결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의 무자비한 보편성을 보여주곤 합니다. 작품은 그 보편성의 근원이 질서를 무너뜨리는 인간과, 질서를 바로 세우겠다는 주장하는 인간들의 모습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셈입니다. 인간이 지배하는 시대에 반드시 반복될 수 없는 역사의 단면인 셈입니다.

 

역사는 같은 얼굴을 바꿔 쓰고 돌아오는군.”

 

이처럼 한국과 영국의 편입(재편)’으로 시작된 가벼운 상상력은, 어느덧 시대를 불문하고 반복되는 인간의 일그러진 통제욕과 역사의 잔혹성(확장)’이라는 정교한 인문학적 주제 의식에 도달합니다. 사실 이 작품에 있어서 역사라는 소재는 양날의 칼처럼 작용하는 감도 있습니다. 그 주제는 최대한 사변적인 방식을 통해 소설을 지배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이스마엘을 비롯한 인물들의 서사는 흐려지고, 또 사라지는 듯한 인상을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구체적이지도 않은 서사를 구태여 읽어내는 것보다는, 작가가 <림버스 컴퍼니>라는 원작을 재료로 하여 꺼낸 순수한 가치만을 읽어내는 것이 이 작품을 접하는 독자로서 바람직한 자세일 수도 있습니다. 모든 작품은 저마다의 의도와 설계를 자랑합니다. 당연히 읽는 방식과 느끼는 방식도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을 어떻게 읽는가에 관해서는 <림버스 컴퍼니>라는 원작을 어떤 주제로 확장시켰는지에 대한 고찰과 그를 엿보는 자세가 필수적으로 동반됩니다. 현재 이 소설에서 보여주고 있는, 원작의 편승과 재편에서 멈추지 않고 확장으로 구체화된 역사의 순환 고리야말로, 설령 <림버스 컴퍼니>에 대한 지식이 없는 독자들조차 한 번 머리를 조아리며 의견을 나누게 만들 수 있는 강력한 울림이 아닐 수 없습니다.

 


 

3.누군가도 이 작품을 사랑할 수 있기를.

 

앞선 목차에서 팬픽을 원작에 대한 깊은 애정의 산물이라고 표현했습니다만, 그것은 곧 같은 과정으로 집필 된 2차 창작물 팬픽또한 깊은 애정을 요하는 일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그 작품을 집필할 수 있던 원동력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하나의 ‘작품’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원작이 소비자들로부터 애정을 구할 수 있었던 그 일련의 요소들을 매끄럽게 재현하는 힘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독자들을 압축시키는 단점이자, 독자들을 확보하는 장점이라는 이면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내가 애정 했던 원작이 재편되었다는 이유만으로도, 기꺼이 그 작품에 흥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입니다. 만족스럽게 감상했던 영화의 후속편을 타인의 평가와 관계없이 능동적으로 접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입니다. 이 장르는 특정 부류들에게 있어서 원작이라는 우상이 가장 만족스러운 무기가 되는 셈입니다. 그것이 어떤 결과물로 어떤 평가를 받는지는 후의 일입니다.

 

어쩌면 팬픽은 이런 완성된 재료와 검증된 조미료를 바탕으로 만드는 익숙한 요리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관련 맛을 아는 이들은 그 재료가 응용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꺼이 시식에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고, 지나친 재해석으로 원작의 맛을 잃지 않는 이상 맛있다는 한 마디를 올릴 수 있는 마음가짐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림버스 컴퍼니 : Bless my homeland forever>라는 소설이 어떤 독자들을 위한 작품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림버스 컴퍼니>라는 제목을 앞서 보여줬듯, 해당 게임을 즐기고 애정 했던 이들을 위한 작품이며, 원작을 즐겼다는 이유만으로 기꺼이 이 작품과 만나볼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을 위한 작품입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다소 특별한 인상을 줍니다. 원작의 요소가 어느 정도 가미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그 내부에서 발골 되는 이야기들은 역사의 흐름과 인간의 본성을 비롯한 어두운 부분을 파고드는 것을 시도하며 색다른 고찰로 삐져나옵니다. 어떤 이야기는 원작에 편승하며 기쁨을 나누고, 어떤 이야기는 원작을 뛰어넘어 자신의 색을 보여주곤 합니다. 이에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있는 이 소설의 인상이야말로, 작품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온전한 매력을 갖춰보겠다는 하나의 노력으로 읽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 결과물이 누군가에게는 원작에서 느껴보지 못 했던 허기를 채울 수 있는 만족스러운 부록이 될 수도, 또 누군가에게는 소설 그 자체에서 보이는 서사적 사건의 모호함과 사변적인 주제만 강조되는 아쉬운 모사작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소설이 시도하고 있는 형태야말로 원작에 대한 예우이자 애정에서 비롯된 고찰이라는 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이 소설이야말로 인상적인 확장의 모범사례라는 헌사를 작게 남겨두며, 부족한 감평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멋진 집필 활동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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