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님은 용사이자 군주였다 감상

대상작품: 용과 공주의 대화 (작가: 장창원, 작품정보)
리뷰어: 노르바, 1시간 전, 조회 6

이 소설은 짧은 분량 안에 전형적인 판타지 클리셰를 완전히 뒤집어놓는다(하하하 그렇다 변함없는 내 취향).

표면적 구도는 익숙하다. 용을 죽이면 왕위를 얻는다는 약속,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 검을 든 자, 그리고 그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용. 하지만 이 이야기가 진짜로 하고 있는 일은 ‘영웅담’의 문법을 빌려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공주는 용기를 증명하러 온 것이 아니라, 존재를 증명하러 왔다]

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싸움의 ‘명분’을 이해하지 못한다. 왕이 목을 가져오라 했다는 말도, 그 약속이 지켜지리라는 믿음도 어리석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작 공주 자신도 그 약속이 지켜질 거라 믿지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녀에게 필요한 건 왕이 될 자격의 증거가 아니라, “왕이 될 자격이 없다고 말해온 세상에 던질 명분”이었다. “제가 왕이 될 수 없는데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처럼”이라는 대사는, 이 이야기가 자격의 서사가 아니라 배제의 서사임을 처음부터 밝히고 있다.

용이 공주에게 던지는 질문들은 전형적인 ‘자격 검증’의 말들이다. 하지만 공주의 대답은 그 질문 자체를 무너뜨린다. “전통과 관습이 나의 발을 잡습니다.” 그녀에게 부족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세상이 그렇게 태어난 것만으로 자격을 박탈했을 뿐이다.

 

[용이 승복한 것은 논리가 아니라 태도]

용은 공주의 대의나 이상에 설득당하지 않는다. 용은 끝까지 그녀의 소원을 “무지하고도 허망한” 것이라 부르고, 그녀의 미래를 “불 보듯 뻔한” 파멸이라 말한다. 심지어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대는 왕이 될 수 없어”라고 한다. 즉 용은 공주가 옳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용이 곁에 서기로 하는 이유는 단 하나, “그런 너의 끝이 보고 싶어졌다”는 것이다. 승산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죽음이 예정된 길이라는 걸 알면서도, 두려움 없이 그 길로 걸어 들어가려는 용기 그 자체에 넘어간다.

“죽음으로써 완성되는 삶은 바라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지금을 충실히 여기겠어요”

그녀는 죽으러 가는 게 아니라, 살아서 바꾸러 가는 것이다. 그 확신이야말로 어떤 논리보다 강력한 설득이었다.

 

그녀는 용을 죽이는 용사가 되어야만 왕좌에 앉을 자격을 얻는 존재처럼 등장하지만, 진짜로 증명해낸 것은 검술이 아니라 군주로서의 그릇이다. 두려움을 정직하게 마주하고, 패배가 뻔한 싸움에서도 물러서지 않으며,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조건을 탓하는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 한다”고 말하는 사람. 그것이 이미 통치자의 자질이다. 용을 죽이지 않고도, 용은 이미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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