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가 신을 차로 치여 죽였대”]
프롤로그 시작부터 황당하다. 갑자기 신이 죽었다는 소식이, 지금 막 (죽은)사업가에게 빈티지 면죄부를 팔려던 ‘악마 변호사’ 라비에게 들려온다. 문제는 그 증언을 니체가 했다는 것이다. “신은 죽었다”라고 말한 그 니체가. 정확히는 니체가 자신이 차로 신을 치여서 죽였다고 증언했다는 것이다. 즉, 신은 니체에게 살해당했다.
차는 완전히 폭발했고 신의 시체는 없다. 추측되는 동기는 그 전날 밤에 니체와 신이 주사위 도박을 했는데 그게 사기도박이었댄다.
이게 다 무슨 소리인가. 거기다 하루도 되지 않아 소문은 점점 살이 붙어 신과 니체가 주사위 도박을 하다가 니체가 전 재산을 올인했고, 마지막에 신이 한번 져 줬다, 사고 당시에 니체는 술에 취해 있었다, ‘신은 죽었다’라고 중얼거렸는데 그걸 주요 증언으로 채택했다, 같은 말이 파다하게 퍼지고 있는데 서로 특급 비밀이라고 한다.
이 프롤로그 하나에 소설 전체의 질문이 압축되어 있다. 증거도 시체도 없는 사건이, 왜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하나의 실재가 되어버렸는가.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 그렇게 만들어진 실재는, 진실이라 부를 수 있는가.
이 소설은 이 질문 하나를 SNS식 언론, 여론재판, 피상적 종교, 자본주의라는 네 개의 관점으로 반복해서 되묻는 작품이다.
1. SNS식 언론 — 특종은 어떻게 ‘사실’이 되는가
프롤로그의 정보원은 “이거 아직 엠바고도 풀리지 않은, 진짜 일부 중의 일부만 아는 이야기”라며 전화를 건다. 그리고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그 “일부 중의 일부”는 지나가던 개도 아는 이야기가 된다.
이 확산 속도는 취재나 검증이 아니라 그저 “속삭임”의 물리적 전파다. 정보원의 표현을 빌리면 도미노이자 바이러스다. 라디오 패널들은 “물증이나 시체가 뭐가 중요하냐, 이렇게 심증이 넘치는데”라며 웃고, 신의 죽음이 있던 자리는 순식간에 별점 5개짜리 성지순례 코스가 된다. 팩트체크가 아니라 확산 속도와 서사적 재미가 진실 판정의 기준이 되어버린 세계. 이는 지금 우리가 매일 겪는 뉴스 소비 방식에 대한 정확한 패러디다.
2. 여론재판 — 유죄는 논리가 아니라 합의로 확정된다
“니체가 신을 죽였다니까요! 그런데 재물손괴죄요? 이게 맞습니까?”
“하. 그러면 살신죄로 집어넣게? 애초에 그런 죄목이 있긴 하고?”
“그게 아니라! 최소한 살인으로 집어넣어야죠! 직접 자백도 했다 뭐가 문제입니까!”
“살인? 신이 인간이냐? 생물학적으로 영장류인지도 모르는 존재를 쳤다고 살인죄면 인간형 풍선을 차로 치면 그것도 살인죄냐?”
“살아있는 신이 죽었잖아요! 풍선은 살아있는 게 아니고요!”
“그럼 살아있는 원숭이나 개를 차로 쳤다고 치자. 그런데 시체도 없어. 이걸 살인죄로 쳐?”
“어떻게 신을 원숭이나 개로 볼 수 있어요?! 신이잖아요! 신!”
경찰서 안에서 두 형사가 “재물손괴죄냐 살인죄냐”를 놓고 다투는 장면은 우습지만 정곡을 찌른다. 신을 인간으로 볼지, 원숭이(…)로 볼지, 그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존재로 볼지조차 합의가 안 된 채로, 그럼에도 니체는 이미 “신살자”로 확정되어 있다. 프롤로그에서 이미 “그렇게 되어버린” 소문은, 재판정에 가서도 뒤집히지 않는다. 종교재판에서 검사가 내놓는 증거는 결국 프롤로그의 소문내용에 나왔던 만취 상태의 발언과 전소된 차량뿐이다. 라비가 그 모순(“살인을 저지를 만큼 이성적이면서 동시에 자백할 만큼 이성을 잃었다”)을 정확히 짚어도 판사와 검사는 논리로 반박하지 못하고 그저 “정숙하라”고 망치를 두드릴 뿐이다. 여론재판의 본질은 애초에 반박 불가능한 논리가 아니라, 다수가 이미 그렇다고 정해버린 결론을 사후적으로 정당화하는 절차라는 것을 이 장면들은 냉소적으로 보여준다.
3. 피상적 종교관 — 신앙의 형식만 남고 내용은 증발한 자리
이 소설이 가장 신랄해지는 지점은 천국을 그리는 방식이다. 파인애플 피자를 먹고, 헌금 액수로 서열을 매기고(“Pay to win”), 돌을 고르며 이단 재판을 준비하는 천사들은 신앙심이 아니라 관성과 위계로 움직인다. 압권은 “미트볼 스파게티가 공중에 뜨는 것만은 이단”(…)이라는 부조리다. 무엇이 신성모독이고 무엇이 아닌지는 애초에 논리가 아니라 자의적 규정일 뿐이라는 점을, 이보다 더 우스꽝스럽게 드러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결말에서 되살아난 신은 스스로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믿는 머릿속의 나는 창에도 맞아 죽고, 차에도 치여 죽는다.” 신앙의 대상이 실재가 아니라 집단이 합의한 이미지였다는 사실을, 신 본인이 확인시켜주는 셈이다. 프롤로그의 소문과 종교의 교리가 결국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이, 이 소설이 하려는 신학적 농담이자 메시지다.
4. 자본주의 — 믿음은 곧 자산이 된다
라비는 이 믿음의 매커니즘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신의 유산 상속 소송을 빌미로 지옥 부동산을 “뉴천국”으로 리브랜딩해 30배로 부풀리고, 유권자들에게 면죄부를 1+1으로 팔아치운다.
“리브랜딩이라고 들어봤어요? 이름만 바꿔도 가격이 오르는 마법 같은 기술”이라는 대사는, 프롤로그의 소문이 살을 붙이며 부풀려지는 과정과 동일하다. 실체는 그대로인데 이름과 믿음만 바뀌면 가치가 폭등한다. 버블은 결국 에필로그에서 신이 살아 돌아오는 순간 터지고, 라비는 담담하게 “곧 버블이 터질 테니까 빨리 팔아넘겨”라고 말한다. 자본주의적 가치 역시 믿음이 만든 신기루라는 사실이, 이 한 장면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폭로된다.
[‘신’ 캐릭터 — 신이란 무엇인가]
1. 등장 방식부터가 이미 ‘캐릭터’다
신은 소설 대부분을 “죽은 존재”, “부재하는 원인”으로만 존재한다. 실제로 등장하는 건 마지막 18화, 그것도 하필 알로하 셔츠를 입고 민트초코아이스크림(이단이다!!!) 을 스푼으로 떠먹는 붉은 머리 청년의 모습으로.
이 등장 방식 자체가 이미 캐릭터 설명이나 다름없다. 앞서 5화, 7화에서 술집 바텐더가 언급한 “파인애플 피자를 시키던 하와이안 셔츠 남자”가 사실 신이었다는 복선이 마지막에 회수되는데, 라비조차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파인애플 피자를 먹는 게 신이라면 오만 정 다 떨어진다”고 말했던 바로 그 이미지로 신이 실제로 나타난다. 즉 신은 인간이 기대하는 근엄하고 초월적인 형상을 처음부터 배반하도록 설계된 캐릭터다.
2. 무게 없음, 그러나 회피는 아니다
18화 재판정에서 신은 시종일관 가볍고 장난스럽다. “머리 뒤에 형광등이라도 달아줄까?”라며 라비의 농담에 맞장구치고, 자신을 증명하라는 천사에게도 화내지 않고 웃는다. 하지만 이 가벼움이 곧 무책임함은 아니다. 니체 앞에서 그는 “괜히 나를 도우려다 상해를 입을까 두렵구나. 아이야”라며 니체를 걱정하고, 윌리엄의 질문 — “이 모든 것이 아버지의 계획이었습니까?” — 에는 즉답을 피하되 회피하지 않는 방식으로 답한다. “너는 어떤 것이면 좋았겠느냐. 계획이길 바라니, 아니면 자유의지이길 바라니?” 라고 되묻는 이 장면은, 신이 답을 숨기는 게 아니라 애초에 인간이 원하는 대로 의미가 결정되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3. 존재론 자체가 이 소설의 결론이다
“너희가 믿는 머릿속의 나는 창에도 맞아 죽고, 차에도 치여 죽고. 심지어 너희가 던지는 농담으로도 죽을 수 있다. 그래서 모두가 그 머릿속의 내가 죽었다 믿었기에 죽은 것처럼 지내 주었더니. 이게 무슨 일이더냐.”
이 발언으로 신은 스스로 “믿음이 실재를 만든다”는 소설 전체의 주제를 완성시키는 장치가 된다. 신은 객관적으로 ‘존재’하거나 ‘죽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 집단의 합의된 믿음에 따라 존재 여부가 결정되는 ‘개념’이다. 그렇기에 그는 손바닥의 못 자국도, 가시관 자국도 없이 나타나고, 판사 천사가 “증명하라”고 다그쳐도 굳이 증명하려 들지 않는다. 애초에 그가 죽거나 사는 방식 자체가 증거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4. 훈훈함을 거부당하는 존재
신은 마지막에 “너희의 성장을 바란다”는 식의 화해적이고 부모 같은 태도로 마무리하려 하지만, 이 소설은 그 훈훈함을 그대로 받아주지 않는다. 라비의 “퍽이나.”라는 한마디가 신의 온화한 마무리를 곧바로 깎아내린다. 즉 신 캐릭터는 이 작품에서 최종적으로 옳거나 절대적이거나 위로가 되는 존재로 승격되지 않는다. 그는 소설 전체가 벌인 난장판(부동산 버블, 종교재판, 인민재판)의 원인이자, 그 난장판을 “이 정도면 괜찮지 않느냐”는 식으로 가볍게 봉합하려는 무책임한 부모에 가깝게 그려진다.
[악마 변호사 라비]
이 소설에서 “악마적인 것”은 초능력이 아니라 인간 사회가 돌아가는 방식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다는 것 자체로 재정의된다. 라비는 초자연적 힘 대신 협상력, 언론 다루는 법, 군중심리, 관료제 이용법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경찰서 앞 시위대를 말 한마디로 흩어놓는 장면, 지옥 부동산을 “리브랜딩”해 30배로 부풀리는 선거운동 등에서 그녀는 시종일관 혼자 유쾌하고 시니컬하다.
[윌리엄이라는 대위법]
계약자 윌리엄의 서사 — 질투 때문에 악마를 부른 소년이 몇십 년 뒤에도 여전히 그 악마의 조수로 남아있다는 설정 — 는 코미디 사이사이 감정적 앵커 역할을 한다. 12화의 과거 회상은 톤을 잠깐 늦추면서도 라비 캐릭터에 “왜 대가를 받지 않는가”라는 실존적 질감을 더하고, 13화 아침 식사 장면은 이 철학적+신학적 소동 한복판에 인간적 숨구멍을 만든다.
[이 모든 것을 통합하는 하나의 답]
결말에서 되살아난 신이 던지는 말, “그 머릿속의 내가 죽었다 믿었기에 죽은 것처럼 지내 주었다”는 결국 이 소설 전체의 답변이다. 언론이 만든 소문이든, 재판이 확정한 유죄든, 종교가 규정한 신성함이든, 자본이 매긴 가격이든, 그것들은 실재를 반영하는 게 아니라 믿음이 먼저 있고 실재가 뒤따라오는 구조로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그렇게 만들어진 것은 진실인가, 아니면 그저 다수가 합의한 허구인가. 그리고 허구라고 하면, 그것은 무의미한가.
소설은 답을 명시적으로 내리지 않는다. 다만 라비의 마지막 한마디, “퍽이나”가 암시하듯 이 순환에서 벗어나는 방법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냉소만이 남는다. 어차피 우리 세상은 그렇게 만들어진 것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들에 의해 돌아가고 있으니까.
이 소설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해 신을 개념적으로 살해한 철학(니체)과, 그 신을 다시 숭배와 재판의 대상으로 만드는 종교(신·천국)가 한 편에서 공모하듯 얽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블랙코미디를 완성해낸다. 철학이 던진 선언을 종교의 제도가 문자 그대로 받아 적어 재판정에 세우고, 그 재판정에서 다시 ‘신’ 본인(본신?)이 등장해 니체의 말이 옳았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이 구조야말로 이 소설이 단순한 비꼬기에 그치지 않는 이유다.
프롤로그의 그 황당한 소문 하나가 여론, 사법, 종교, 자본이라는 거울에 반사되며 같은 질문을 계속 되비추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철학과 종교가 서로의 발을 밟으면서도 끝내 한 무대에서 왈츠를 추고 있다. 그것이 이 소설을 단순한 블랙코미디를 넘어, 믿음과 진실의 관계를 진지하게 캐묻는 철학적 우화로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