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베넷, 혹은 머릿돌
세상 모든 소설가들이 시놉시스를 쓰고 집필을 시작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이는 시놉시스 구상 없이, 첫 장면만 떠올리고는 그 후 진행을 등장인물이 전개하는 대로 따라가기도 하며, 또 어떤 경우는 에필로그를 먼저 써놓고 본 장편의 이야기를 역순으로 쓰기도 한다. 이야기가 어떻게 드러나야 하는지는 원래 정해진 길도, 순서도 없다. 미켈란젤로가 화강암 덩어리 안에 숨어 있는 피에타를 보면서 사방의 돌들을 치워냈다고 하였듯이, 중요한 건 이야기의 본체를 정교하게 파내고 다듬는 일이다.
오래 전 이집트의 거대한 피라미드 꼭대기에 피라미디온이라는 관석이 얹혀졌다. 지금은 대부분 박물관에 보관되고 있으나 고대 이집트인들은 피라미드를 완성할 때 마지막에 머릿돌 올리곤 했다. 이 머릿돌은 피라미드 몸체와 기하학적으로 동일하게 생겼으며, 통상 화강암 같은 석재로 만들어졌지만 금이나 구리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횡단열차’라는 17매 짜리 엽편 소설은 일종의 머릿돌, 피라미디온이다. 작가는 코멘트란에 이 엽편 소설이 언젠가 쓰여질 중편 소설의 프롤로그가 되길 희망한다고 적어놓았다. 이 짧은 엽편소설이 물 위에 작게 드러난 빙산의 조각처럼, 수면 아래에 아직 드러나지 않은 거대한 이야기 덩어리를 함의하고 있을거라는 가정 하에, 머릿돌에 드러난 몇 개의 정보들을 인과적으로 연역하여, 작가가 구상중인 이야기의 세계관에 대해 상상력을 펼쳐 조형해보고자 한다. 또한 그 세계관 속에서 반드시 답해져야할 몇 개의 질문들도 포함하게 될 것이다.
엽편 속에서 드러난 정보들
작품의 제목, ‘횡단열차’에서 보듯 열차는 대륙을 횡단하는 열차이다. 대륙을 횡단한다면 최소 수천km를 달리는 기차일 것이며, 출발지에서의 시간과 도착지에서의 시간은 시차경계를 지나므로 다를 것이다. 초반 출발시각에 EDT(Eastern Daylight Time)와 도착시간에 PDT(Pacific Daylight Time)로 표기된 것으로 보아, 작품의 배경 지역은 북미 대륙이다. 출발지는 뉴욕이나 토론토, 도착지는 LA 혹은 밴쿠버 쯤 될 것이다.
도착 목표 시간보다 도착 예정 시간이 16분 정도 빠를 것으로 예상되자, 계기판에 ‘조정요망’이라는 경고문구가 자동으로 뜨고, 열차의 차장인 브라이언은 계기판을 조작해 열차의 속도를 늦춘다. 왜 늦췄을까? 이후에 나오지만 ‘횡단열차’는 값비싼 상품이다. 자율전기주행차가 공용화되어 차를 굳이 개인적으로 구입할 필요가 없는 미래에도 굳이 12기통 자연흡기 페라리 같은 고성능 슈퍼카를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은 분명 있다. 죽음이 사라진 세상에서 굳이 스스로 때를 선택하여 죽음을 원하는 승객들에게 황혼녘의 바다를 감상하면서 편안하게 세상을 하직할 수 있는 고품격 여행 서비스는 매력적인 상품일 것이다. 그래서, 도착 시간은 서부 지역 해안가의 일몰 시간에 맞춰져 있으며 그보다 빨라서도 늦어서도 안된다.
차장 브라이언은 도착 1시간 20분 전에 승객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승객들은 박수를 치며 그를 반기며 차장 브라이언은 승객 한 사람마다 악수를 하며 마지막 인사를 한다. 열차는 서부의 한 해안가에 잠시 정차를 하고, 옆 객차에서 하얀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이 마지막 행사를 위해 준비를 하러 입장한다. 직원들이 좌석 아래에 안락사 기계장치를 연결하는 동안 브라이언은 매뉴얼에 없는 행동을 한다. 뒤돌아서서 있는 것. 승객들의 마지막을 위한 배려이기도 하지만, 브라이언 자신의 심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기도 할 것이다. 매번 승객들의 마지막을 지켜본다면 PTSD에 시달릴지도 모를 일이므로.
태양이 수면 아래로 잠길 때, 브라이언은 리모컨을 작동한다. 이제 죽음의 시간이다. 버튼을 누르고, 창밖의 갈매기 소리 외엔 정적이다. 브라이언과 직원들은 일제히 첫번째 객차로 이동하고, 다른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이 들어온다. 안락사 장치를 수거하고 시신들 위에 하얀 천을 덮어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기차는 차량 기지로 이동하고, 다음날 아침 회송한다. 목적지인 동부로 다시 돌아가는 길이다. 돌아가는 길에는 승객이 없으므로 속도제한도 없다.
브라이언은 직원 숙박 호텔에서 TV를 틀어 복권 추첨 방송을 본다. 복권의 1등 상품은 다름아닌 ‘횡단열차 탑승권’. 복권 1등이 수십억원이라는 걸 가정할 때, 횡단열차로 얻을 수 있는 안락사의 가치는 최소 수십억원에 달함을 알 수 있다. 다음날 회송열차는 불과 몇 시간만에 동부의 출발지에 도착한다. 거리엔 브라이언과 또래로 보이는 젊은 사람들 뿐이다. ‘STORE’라는 간판이 달린 가게에서 ‘인간과 닮은 무엇인가’가 내미는 생필품을 받아서 집으 온다. 집에서 브라이언이 쓴 고글 안에서 녹색 등이 점멸하면서 브라이언이 납입중인 프리미엄 보험 상품의 잔여 납입기간의 안내가 뜬다. 2급 횡단열차, 잔여납입기간은 7년 3개월.
드러난 정보로부터 연역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것들
이 엽편 소설에서 드러난 정보들을 갖고 모자이크를 맞춰보면, 이 세계는 암과 같은 불치병과 노화가 정복된 미래의 세계다. 근미래일지, 먼 미래의 일일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죽음이 정복되고, 노화조차 극복되어 모든 사람들은 브라이언과 같은 젊은이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듯 하다. 복권 방송에 나온 ‘주름 하나 없는 남여 진행자’와 ‘거리에는 온통 자신(브라이언)과 또래처럼 보이는 사람들’ 뿐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 세계에는 아이도, 노인도 없는 것이다. AI 로봇에 의해 인간의 일자리는 대부분 대체되고, 인간의 가치는 소비만으로 제한되는 세상을 누구나 요즘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음식을 만들고 건축물의 건설하고 자동차와 열차, 항공기 등 기계장치를 제조하고 의료 및 예술까지 AI가 탑재된 로봇들이 인간을 완전히 대체한 세상이다. 인간의 노동력이 유일하게 가치를 발휘하는 것은 ‘횡단열차’와 같이, 인간 고객들이 자신과 같은 인간들이 손수 서비스를 해주길 바라는 프리미엄 영역 뿐이다. 나머지 효율과 생산성, 정확도가 중요한 대다수 산업에서는 불완전하고 부정확하며 느리기까지 한 인간은 그저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했다. 이러한 상상은 AGI가 근미래에 출현할 것으로 예상되는 2026년 현재에는 터무니 없는 SF적 공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현재의 인공지능과 로봇기술의 기하급수적 발전 속도로 본다면 곧 닥쳐올 현실에 가깝다. 어디선가 영생을 살게 될 인간은 이미 이 지구에 태어났다고 누군가가 말한 것 같다.
추론한 세계관에서 추가적으로 일어나는 질문들
작가는 코멘트에서 ‘죽음과 계승은 지도층에게만 허락되는 사회의 이야기’라는 표현을 썼다. 이 엽편에서 ‘계승’에 대한 정보는 전혀 다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작가의 코멘트는 작가가 구상하고 있는 거대한 이야기에 대한 힌트이므로 그 정보 역시 추론의 근거로 쓰기에 적합하다. 대체 무엇을 계승한다는 걸까? 지도층 역시 죽지 않고 영원히 젊음을 누리며 살텐데? 지도층은 어떤 사람들인가, 왜 지도층이 아닌 서민들은 값비싼 돈을 지불하거나 보험을 들어서라도 안락사 서비스인 ‘횡단열차’ 탑승권을 원하는걸까? 왜 서민들은 그냥 손쉽게 약을 먹거나 해서 자살하지 않는가? 자살한다면 어떤 경제적, 형사적 페널티를 유가족에게 물리는 제약이 있는 것일까? 지도층은 서민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허용하지 않는가? 미래에는 사랑을 나누더라도 아이는 낳지 못하게 되는 것인가? 안낳으려고 하는 것인가? 처럼 수많은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이와 같은 질문들에 대해서, 작가를 대신하여 리뷰어가 어떤 대답을 제시하는 것은 리뷰의 범위와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 될테지만 한 사람의 독자로서 저 질문들에 대해서 나름의 답을 상상해본다면 지도층은 서민들이 계속해서 자신들의 발 아래에 통제되는 존재로서 살아가길 바랄 것이다. 아마도 서민들이 자살한다면 그들의 가족, 배우자에게 큰 경제적 페널티나 형사적 책임이 주어지는 제도가 있을 지도 모르며, 아이를 낳는 것 역시 제도적으로 제약이 주어지거나(유전자 검사 등을 통해 우수한 유전자임이 증명되어야 출산이 가능해진다든지), 모든 사람이 20대 젊은 모습으로 영원히 살아가기 때문에, 자식을 낳는다 하여도 20년 후에는 부모와 똑같은 젊은 외모가 되므로 모르는 남녀가 연애를 시작하기 전에 족보부터 확인을 해야하는 이슈가 생긴다든가 하는 재미있는 상상들이다. 알고보니 내 새로 사귄 여자친구가 고손녀라는 말도 안되는 해프닝인데, 이 세계관에선 얼마든지 가능하다.
저 모든 질문들에 대한 답을 면밀히 축조해 새로운 세계관을 건설하고 그 세계관 위에, 매력적으로 조형된 인물들의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것은 모두 작가의 몫일 것이다. 이 짧은 엽편이 프롤로그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작가가 코멘트에 적었듯이 짧은 엽편이지만 작가가 구상하고 있는 거대한, 아직 건축되지 않아 그 모습이 아직 보이지 않는 거대한 피라미드 같은 이야기가 물리적 실체를 가진 중편 혹은 장편 소설의 형태로 브릿G에 모습을 드러내길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