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닿을 수 없음’의 현상학—분자에서 우주까지 감상

대상작품: 나의 오른손과 너의 왼손을 (작가: 사피엔스, 작품정보)
리뷰어: 노르바, 3시간 전, 조회 24

SF소설을 찾아보면 대체로 SF의 전신이었던 우주모험활극의 영향인지, 우주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또는 최근의 AI라는 이슈에 맞게 요즘은 AI를 소재로 다룬 SF가 넘쳐난다. 그래서 생물학이나 화학을 소재로 하는 SF가 보고 싶었다.

그런데 바로 이 소설이 그 생물학, 그것도 ‘거울상 이성질체’라는, 분자생물학(생물학+화학)을 소재로 하는 SF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모야 먹는건가’ 하고 지레 겁을 먹고 뒤로 가기를 누를 필요는 없다. 개념 자체는 몰라도 된다. 그게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 건지 몰라도 된다. 거울상 이성질체는 그저 SF적인 소재일 뿐이다. 물론 당연히 그 개념에 대해 알면 더 재밌긴 하다(우리 세계의 신은 왼손잡이라든지). 하지만 이 소설이 진짜로 말하려는 것은 ‘닿을 수 없는 세계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닿을 수 없는 것들]

이 소설은 닿을 수 없는 것에 닿으려는 이야기이다. 완전히 같으면서 완전히 닿을 수 없는 것. 볼 수는 있지만 만질 수 없는 것. 그런데 그 ‘닿을 수 없음’이 두 인물 사이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거울을 사이에 둔 가족,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 일반 물질과 거울 물질, 인간과 우주까지 층층이 쌓인 경계들. 그리고 그 경계마다 누군가가 손을 뻗고 있다. 유리에 부딪치면서도. 작가님은 닿으려는 행위 자체가 얼마나 많은 것을 담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은 ‘닿지 않은 채로 이미 닿아있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참고로 나는 철학과 출신이 아니다. 그저 메를로 퐁티의 사상을 대충 검색해보고 내 생각과 비슷해서 좋아할 뿐이고, 며칠 전에 에이브럼의 책을 읽었을 뿐이다. 그러니 철학적으로 잘못 이해한 부분이 있으면 지적 감사.)

 

이 소설은 이상의 시”거울”로 시작한다.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握手)를받을줄모르는―악수(握手)를모르는왼손잡이오.

소설은 그 ‘왼손잡이’에게 이름과 생애를 부여한다. 그리고 끝내 악수를 완성하는 순간까지 나아간다.

그런데 이 소설을 메를로 퐁티의 현상학과 함께 읽으면, 이상이 던진 질문 하나가 선명해진다. 악수는 왜 불가능했는가? 그리고 그 불가능은 대체 어떤 의미에서 오히려 가장 “완전한 접촉”의 형식이 되는가.

 

[‘살’과 키아즘 — 닿음의 역설]

메를로 퐁티는 후기 저작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살(chair/flesh)’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여기서 ‘살’은 단순히 피부나 물질로서의 육체가 아니라, 지각하는 자와 지각되는 것 사이의 상호 침투적인 조직이다. 그의 핵심적인 사유는 키아즘(chiasme)—교차—이다. 오른손이 왼손을 만질 때, 만지는 손과 만져지는 손은 동시에 존재한다. 오른손은 왼손을 만지며 동시에 왼손에게 만져진다. 이 순간 ‘만지는 주체’와 ‘만져지는 대상’의 경계는 흔들린다. 촉각은 언제나 쌍방향이다. 보이는 것은 동시에 볼 수 있는 것이고, 감각하는 것은 동시에 감각될 수 있는 것이다. 메를로 퐁티는 이 상호성을 ‘살의 가역성’이라 불렀다.

그러나 가역성은 완전한 합일이 아니다. 그는 두 손 사이에는 언제나 어떤 ‘갈라짐’이 있다고 말한다. 오른손이 왼손을 만지려 하는 순간 역할이 전환되어 완전한 상호 촉각은 결코 동시에 실현되지 않는다. 이 틈은 관계의 불가능성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된다. 주체와 타자가 완전히 겹쳐버리면 관계는 사라진다. 닿을 수 없는 간격이야말로 닿음을 열어두는 것이다.

내가 소설로 추구하고자 하는 생각들이다. 서로 다른 존재들은 서로를 온전히 이해 가능한가.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은 이것이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옳지 않은 방법이다.’ 나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나 뿐이며(때로는 그 조차도 아니며), 타자가 ‘나’가 되면 이미 그것은 관계가 아니라 침식이기 때문이다(신체강탈자). 그래서 언제나 나는 소설에서 ‘일반적인 경우라면 서로 만날 리 없는 두 존재’가 하나의 접점을 찾는 과정을 그리려고 한다.

이 소설의 중심 이미지—거울, 유리에 부딪치는 손—는 바로 이 키아즘의 물질적 구현이다. 유미와 서준이 유리를 사이에 두고 손을 맞댈 때, 그들은 만지는 동시에 만져진다. 유리는 그 접촉을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유리가 키아즘의 ‘갈라짐’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고정한다. 분자 수준에서 거울상인 두 몸은 메를로 퐁티가 말한 가역성의 극단적 형태다. 완전히 대칭이기에 완전히 포개질 수 없는 것. 그 불가능한 포개짐이 역설적으로 가장 강렬한 지각적 관계를 만들어낸다.

 

[상호신체성(intercorporeality) — 우리는 이미 서로의 살이다]

메를로 퐁티의 개념 중 이 소설과 가장 긴밀하게 작용하는 것은 ‘상호신체성(intercorporeality)’이다. 그는 두 신체 사이의 관계가 의식과 의식의 만남이 아니라, 신체와 신체의 선반성적(pre-reflective) 얽힘임을 강조한다. ‘나’는 ‘타인’의 몸짓을 개념적으로 해석하기 이전에 이미 신체적으로 반응한다. 우리는 공통의 ‘세계의 살(flesh of the world)’ 안에 잠겨 있다.

소설 속 서준이 겪는 고통은 이 상호신체성의 박탈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거울 앞에서 유미의 손이 유리에 부딪히는 순간을 본다. 그 충격이 서준의 몸에도 전해진다. 슬아가 유리에 매달릴 때 서준이 고개를 돌리는 것도, 그 광경을 목격하는 것 자체가 이미 신체적 고통이기 때문이다. 상호신체성이 살아 있는 한(즉, 두 사람이 같은 세계의 ‘살’ 안에 있는 한)유리는 접촉을 차단하지 못한다. 차단하는 것은 오직 죽음뿐이다. 그리고 소설은 죽음조차 그 상호신체적 연결을 완전히 끊지 못함을 보여준다. 유미는 두 번 죽지만 서준의 몸에는 그 연결이 남아, 그는 자신의 거울 세포를 탐사선에 싣는다.

재희의 서사는 상호신체성의 또 다른 면을 드러낸다. 그녀는 유미를 사랑했으나 유미는 다른 사람과 결혼했고, 그럼에도 그녀는 17년 동안 우정 반지를 빼지 않으며 유미 곁을 지켰다. 재희가 유미의 몸을 돌보고, 유미를 위한 거울 음식을 설계하고, 유미의 격리실을 확장하는 일들을 하는 것은, 그녀가 유미와 나누지 못한 신체적 근접을 다른 방식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재희와 유미 사이에도 유리가 있었다. 그 유리는 훨씬 오래되었고, 훨씬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말해지지 않은 감정이 신체적 돌봄의 형식으로 현현하는 것. 그것이 재희의 상호신체성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에이브럼의 『감각의 주술』 — 살은 인간 너머로 확장된다]

데이비드 에이브럼은 『감각의 주술』에서 메를로 퐁티의 살 개념을 생태학적으로 확장한다. 에이브럼에게 살은 인간 신체들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몸은 세계의 살, 즉 흙과 바람과 다른 생물들과 연속적으로 얽혀 있다. 지각은 인간이 세계를 일방적으로 포착하는 행위가 아니라, 인간과 세계 사이의 쌍방향적 참여다. 우리가 풀밭을 볼 때 풀밭도 우리를 ‘본다’(우리가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도 우리를…). 우리가 바람 소리를 들을 때 우리 몸은 바람 속에 잠겨 응답한다. 지각은 언제나 상호적이고 참여적이다.

에이브럼의 핵심 주장 중 하나는 우리가 ‘인간 너머의 세계(more-than-human world)’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킴으로써 지각의 근원적 참여성을 잃었다는 것이다. 그 분리가 현대적 소외의 근원이다.

역설적으로, 이 소설의 유미는 그 분리를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겪는다. 그녀는 우리 세계의 미생물들로부터 격리되어 있다. 우리 세계의 공기가 그녀에게는 위험하다. L형 아미노산으로 이루어진 이 세계의 살은 D형 아미노산으로 이루어진 유미에게 타자의 살이다. 유미는 에이브럼이 말하는 ‘세계의 살’로부터 분자 수준에서 단절된 존재다.

그러나 유미는 그 단절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는 격리실 안에 닭과 가리비, 병아리콩과 브로콜리로 이루어진 거울 생태계를 만든다. 이것은 단순한 생존 전략이 아니다. 에이브럼의 언어로 말하자면, 유미는 자신이 속할 수 있는 ‘세계의 살’을 직접 구성한다. 그리고 그 살을 자신의 세포와 함께 우주로 보낸다.

“지유미 박사는 우리가 탐사선을 보낼 때 자신의 세포도 함께 보내줄 수 있는지를 묻더군요. 일종의 파종을 하고 싶다는 거였죠. 싹이 트든 말든 그건 나중 문제라면서요.”

이것은 에이브럼이 말하는 지각적 참여의 우주적 확장이다. 인간이 세계의 살 안에 잠기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살을 새로운 곳으로 가져가는 것이다.

에이브럼은 또한 언어가 그 지각적 참여성을 담아낼 때 가장 생명력을 갖는다고 말한다. 소설의 마지막에 서준이 남긴 말—”나의 오른손과 너의 왼손을”—은 문법적으로 미완성이다. 목적어만 있고 서술어가 없다. 그것은 동사를 향해 열려 있는 문장이다. 그리고 에이브럼의 관점에서 이 미완성은 결핍이 아니다. 세계의 살 안에서 지각이 늘 미완성의 상태로 타자를 향해 열려 있듯이, 이 문장도 그 열림 자체로 완성된다. 열린 결말이기에 완성이다.

 

[악수의 완성 — 갈라짐 속의 함께함]

메를로 퐁티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악수를 상호신체성의 전범적 사례로 든다. 두 손이 맞잡힐 때, 어느 손이 만지고 어느 손이 만져지는가는 순간마다 전환된다. 그 전환의 불확정성 속에서 두 신체는 세계의 살 안에서 하나의 공통 국면을 경험한다. 이상의 시에서 거울 속 왼손잡이는 이 악수를 모른다. 거울이 키아즘을 닫아버렸기 때문이다. 살의 가역성이 작동하려면 두 손이 같은 살의 연속체 안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소설은 다른 가능성을 제안한다. 거울상인 둘이 손을 맞잡으면, 오른손과 왼손이 맞닿아 악수의 형태가 된다. 메를로 퐁티의 키아즘은 같은 살 안의 가역성을 논했지만, 이 소설은 서로 다른 살—거울 물질과 일반 물질—사이의 키아즘을 상상한다. 닿을 수 없기에 가역성은 완성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불완전한 가역성, 그 갈라짐 속에서 두 사람은 영원히 서로를 향해 열려 있다. 완전히 포개지지 않기에 오히려 관계가 끝나지 않는 것이다.

에이브럼의 언어로 말하자면, 유미와 서준의 관계는 세계의 살이 작동하는 방식 그 자체다. 그들은 서로를 소유할 수 없다. 상대가 자신의 일부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상대의 지각이 자신의 지각을 변형시키고, 상대의 몸이 자신의 몸의 지향성을 바꾼다. 서준이 자신의 거울 세포를 탐사선에 실은 것은 이 지향성의 마지막 표현이다. 유미가 향하는 곳으로 자신의 살도 함께 보내는 것. 포개질 수 없으나 같은 방향으로. 닿을 수 없으나 같은 우주로. 아니, 닿지 않았기 때문에 닿아있는 세계.

자연회귀주의자들은 유미를 비자연적 존재로 규정하고 살해한다. 그들의 논리는 ‘세계의 살’에서 이질적인 것을 제거하려는 폭력이다. 그러나 에이브럼이 보여주듯, 지각하는 모든 것은 세계의 살 안에 있다. 거울 물질로 이루어진 유미의 몸도 이 우주 안에서 지각하고 지각된다. 그녀를 배제하는 것은 세계의 살을 더 좁게 만드는 일이다. 유미의 세포가 우주로 ‘파종’되는 장면은, 그 배제에 대한 가장 조용하고 가장 광대한 반박일 것이다.

 

[분자에서 우주까지 — ‘살’의 스케일]

이 소설이 탁월한 것은 그 살의 스케일이다. 거울상 이성질체에서 시작하여 가족 관계, 세계의 여론, 그리고 태양계 너머 우주까지 확장되는 동안, 소설은 동일한 하나의 논리를 유지한다. 완전히 같으면서 그렇기에 완전히 닿을 수 없는 것. 그 논리는 메를로 퐁티의 키아즘이고, 에이브럼의 상호적 지각이며, 이상의 시가 품었던 질문이다.

메를로 퐁티는 “진리란 완전히 도달될 수 없지만 그 불완전한 접근 속에서 드러난다”고 했고, 에이브럼은 “우리의 인지는 언제나 이미 더 넓은 세계의 살 안에 잠겨 있다”고 했다.

루빈 박사의 말은 두 철학자의 언어를 동시에 함축한다. 그리고 유미는 그 진리를 향해 두 번 죽으면서도 나아갔다.

“우린 답을 영원히 모를 겁니다. 진리란 다가갈 수는 있지만 닿을 수는 없는 거거든요.”

소설은 이 문장을 패배로 보지 않는다. 닿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손을 뻗는 것, 우주까지 함께 가는 것. 그 과정 자체가 진리의 도달이며 동시에 인간이 진리를 추구하는 방식이다.

 

소설은 분자에서 출발해 우주에서 끝난다. 그 사이에 거울의 방이 있고, 슬아의 고사리 같은 손이 있고, 유리에 부딪히는 소리가 있다. 로켓이 날아오르고 서준이 오른손을 흔들 때, 탐사선 안에는 유미의 왼손—유미의 세포—이 있다. 이상의 시에서 “악수를 모르는 왼손잡이”였던 거울 속 존재가, 이 소설의 끝에서 마침내 악수를 완성한다. 닿지 않은 채로, 닿지 못한 채로. 그러나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유리를 사이에 두고, 우주를 사이에 두고 ‘오른손’이라는 세계와 ‘왼손’이라는 세계는 닿지 않은 채로 맞닿아 악수가 되었다.

목록
이전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