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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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기는 재민이 현관문을 여는 소리에 맞춰 돌아가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재민이 신발을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는 동안 세탁기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탁실은 베란다 구석, 소리가 들릴만한 거리였다. 재민은 아무 생각 없이 집안으로 걸어 들어갔고, 노부부는 그 뒤를 따라오며 서로의 얼굴을 봤다.

“어머.”

노부인이 먼저 말했다. 여든은 됐을 것 같은 목소리였다.

“또 되네.”

세탁기는 멀쩡히 돌아가고 있었다. 20년은 족히 됐을 기종이었다. L사 로고가 박힌 드럼세탁기. 도어 고무 패킹이 삭아서 군데군데 갈라져 있었고, 조작 패널의 다이얼 손잡이 하나는 없었다. 그 자리에 굵은 고무줄이 동그랗게 감겨 있었다. 누군가 오랫동안 어거지로 쓴 흔적이었다.

재민은 무릎을 꿇고 투명한 창을 통해 안을 확인했다. 탈수 중이었다. 진동도 그럭저럭 정상 범위였다.

“언제부터 안 되셨어요?”
“어저께 아침부터요.”

노인이 답했다. 색이 바랜 흰 런닝셔츠 차림이었다.

“빨래 넣고 돌리는데 잘 돌아가다말고 멈춰서는 버튼을 눌러도 아무 반응이 없어. 전원도 안 들어오고.”
“오늘도요?”
“오늘 아침에도 안 됐어요. 기사님 오신다고 전화 끊고 나서도 안 됐는데.”

노인은 잠시 말을 멈추고 돌아가는 세탁기를 봤다.

“오셨더니 되네.”

재민은 드럼 안을 들여다봤다. 빨래가 돌아가고 있었다. 노란 수건, 흰 속옷, 체크무늬 잠옷 바지. 노부부의 빨래였다. 소리는 정상이었다. 진동도 정상이었다. 재민은 뒤쪽 배선을 점검하기 위해 일시정지를 시키고 세탁기를 조금 앞으로 당겼다. 커넥터 접속 상태 이상 없음. 전원부 이상 없음. 제어 기판 이상 없음.

“접촉 불량이었을 수 있어요.”

재민이 돌아보며 말했다.

“오래된 기계들은 진동에 민감하거든요. 제가 들어올 때 발소리나 문 닫히는 진동만으로도 접점이 붙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 게 있어요?”
“네, 드물지 않아요. 특히 이 기종은.”

노부인이 남편을 봤다. 남편은 재민을 봤다. 재민은 노트를 들고 볼펜을 올렸다. 핸드폰에 써도 되지만 그냥 습관이었다. 핸드폰 타이핑 보다 손글씨가 더 빨랐다.

점검 항목을 하나씩 체크했다.

전원부. 제어부. 구동부. 배수부. 이상 없음. 이상 없음. 이상 없음. 이상 없음.

“앞으로도 이럴 수 있나요?”
“간헐적으로 그럴 수 있어요. 다음에 또 그러시면 연락 주세요.”

재민은 세탁기를 제자리에 밀어 넣고 작동버튼을 눌렀다. 세탁기는 여전히 잘 돌아갔다. 탈수가 끝나가는지 회전이 느려지고 있었다. 재민은 일어서며 무릎을 툭툭 털었다.

노부부는 현관까지 배웅했다. 노부인이 비닐봉투를 내밀었다. 캔음료 두개가 들어있었다.

“음료라도.”
“아, 괜찮습니다.”
“받아가세요. 이렇게 멀리 오셨는데.”
“예, 감사합니다.”

재민은 받아서 가방에 넣었다. 신발을 신으면서 들으니 경쾌한 멜로디 소리가 들렸다. 탈수가 끝나고 정지한 모양이었다. 그 소리가 멈추는 것을 들으며 재민은 문을 닫았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재민은 기록지를 다시 봤다.

이상 없음.

적힌 글자를 잠깐 내려다봤다가 가방에 넣었다.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에 탔다. 시동을 걸기 전에 핸드폰에 있는 오늘 수리 의뢰 예약 목록을 열었다. 접수된 순서대로 작성해 뒀던 목록이 내려갔다.

첫 번째 콜. 오전 10시. 마포구. 냉장고. 도착하니 정상 작동. 점검 결과 이상 없음. 뒤편 먼지 제거.
두 번째 콜. 오후 1시. 은평구. 전자레인지. 도착하니 정상 작동. 점검 결과 이상 없음.

세 번째 콜이 지금 건이었다. 노원구. 세탁기. 큰 이상 없음.

재민은 화면을 끄지 않고 잠깐 들고 있었다.

세 건이었다. 오늘만. 세 건 전부 같은 패턴이었다. 고장이 접수되고, 재민이 도착하고, 기계가 정상 작동하고, 이상 없음 처리.

그는 어제 콜 목록을 열었다. 다섯 건 중 세 건이 같은 처리로 끝나 있었다. 그제. 네 건 중 네 건 전부. 재민은 한참 올려봤다가 화면을 껐다.

오래된 기계들은 진동에 민감하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수십 년 된 기기들은 접점이 산화되거나 커넥터가 느슨해진 경우가 많다. 사람이 문을 열고 닫는 것만으로도, 무거운 발걸음 소리만으로도, 그 진동이 전달되어 붙어 있던 접점이 일시적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있는 현상이다. 현장에서는 드물지 않다. 그래서 아주 오래 전에는 TV가 잘 나오지 않으면 손으로 툭툭 두드리곤 했었다. 내부의 먼지가 떨어져 나가거나 진동에 의해 회로가 다시 연결되어 작동했다.

재민은 시동을 걸었다.

설명은 있다. 합리적인 설명이 항상 있다.

그는 내비게이션을 켜고 다음 콜 주소를 입력했다. 오늘은 이걸로 마지막이었다. 선풍기. 무려 1990년대 초반 기종. 다음 지역까지는 한 시간쯤 잡아야 했다.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오후의 햇빛이 앞유리로 들어왔다.
그는 오늘 접수된 콜이 전부 몇 건이었는지, 그 중 이상 없음 처리가 몇 건이었는지 다시 기억하려 하지 않았다.

알고 싶지 않은 숫자가 있다는 것을, 그는 오랫동안 알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노트를 꺼내고 엑셀 파일을 열었다.

오늘 처리 건수는 네 건. 특이사항 없음.
형광등 아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 잠시 머물렀다.

그는 천천히 타이핑을 했다.

정상 작동 확인.

파일을 저장하고, 컴퓨터를 껐다.

아버지는 회사 소속이었다. 유니폼이 있었고, 퇴근 시간이 있었다.
공구 가방을 어깨에 멨을 때, 아버지는 가장 아버지처럼 보였다.

커다랗고 검은 나일론 가방이었다. 지퍼가 두 개였고, 옆면에 D전자 이름과 로고가 박혀 있었다. 로고는 오래전에 반쯤 벗겨져서 영문명만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아버지는 그 가방을 현관 옆 신발장 위에 항상 올려뒀다. 재민은 어릴 때 그 가방을 만지는 걸 좋아했다. 지퍼를 열면 기름 냄새와 시큼한 금속 냄새가 났다. 드라이버 세트, 니퍼, 테스터기, 절연 테이프… 반듯하게 정리되어 꽂혀있는 공구들. 재민은 그것들을 꺼냈다가 다시 넣곤 했다. 아버지가 보면 혼내곤 했다. 그래도 재민은 공구를 너무 좋아했다.

아버지가 이 일을 택한 이유를 재민은 물어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도 말한 적이 없었다. 그저 어느 날부터 아버지는 그 가방을 들고 나갔고, 저녁 늦게 돌아왔고, 피곤한 얼굴로 밥을 먹었다. 그게 전부였다.

재민이 이 일을 시작했을 때 즈음, 아버지는 이미 이른 나이에 무릎 관절을 쓰기 힘들어 했다. 쪼그려 앉기도 쉽지 않았다. 재민의 공구 가방을 보더니 한마디만 했다.

“힘들다.”

그게 다였다. 반대도, 찬성도 아니었다.

재민은 그 말이 사실이라는 걸 첫 달에 알았다. 하지만 그만두지 않았다. 이유는 딱히 없었다. 그냥 계속했다.

회사를 나온 건 5년 전이었다. 사람들이 고치는 것보다 새로 사는 쪽을 택하기 시작하고 나서도 조금 더 버텼다. 그렇지만 결국 AS기사 수는 줄었다. 겨우겨우 10년을 채우고 나왔다. 지금은 서울의 오래된 동네에 작은 중고 가전 수리 판매 가게를 하나 내고 있었다.

손님은 대부분 노인들이었다. 비싼 새 걸 사는 대신 고치는 쪽을 아직 택하는 사람들. 더 이상 고칠 수 없으면 익숙하고 단순한 구조의, 자신들과 비슷한, 싸고 오래된 중고 가전을 택하는 사람들.

서울 내에서도 이렇게 오래된 가전제품을 수리해주는 곳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가게에서 꽤 먼 지역에서까지도 알음알음 입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연락을 하곤 했다. 가전제품이 잘 작동 안하는데 좀 봐달라고.

재민이 국민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다.

집에 있던 브라운관 TV였다. 삼성인지 금성인지 기억이 흐릿했다. 크기도 그리 큰 편이 아니었다. 화면 가장자리가 굽은 구형 브라운관이었고, 채널은 다이얼로 돌렸다. 이미 오래되어 지직거리는 잡음이 가끔 섞였고, 특정 채널은 안테나 방향을 조금 틀어야 잘 나왔다. 재민은 그 TV 앞에서 만화를 봤다. 어른들이 뉴스나 드라마를 틀면 다른 방으로 갔다.

그 TV가 어느 날 갑자기 켜지지 않았다.

전원스위치를 위아래로 딸깍거려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화면이 검은 채로 있었다. 어머니가 코드를 뺐다가 다시 꽂아봤다. 안 됐다. 아버지가 뒤판을 두드려봤다. 안 나왔다. 결국 다음 날 AS를 불렀다.

기사가 왔다. 아버지가 수리기사 일을 하기 전이었는지 후였는지는 확실치 않았다. 전이었을 것이다. 기사는 TV 앞에 앉아서 전원을 올렸다.

어처구니 없이 TV가 켜졌다.

기사는 뒤판을 열고 점검했다. 이상 없다고 했다. 먼지 때문에 접촉 불량인 것 같다고 했다. 기사가 나가고 나서 몇 분 지나지 않아 TV는 다시 켜지지 않았다. 달려나가서 다시 수리기사를 불러세웠다. 기사가 오자 TV는 또 켜졌다. 기사가 돌아가고 그날 저녁, TV는 다시 안 됐다.

세 번째 연락했을 때 기사는 웃으면서 왔다. 들어서면서부터 웃고 있었다. TV 앞에 앉기도 전에 이미 TV는 잘 켜졌다. 수리기사는 한참 웃다가 말했다.

“이게 저 알아보나 보네요.”

그날 저녁, 아버지가 TV를 가리키고 그 말을 옮기면서 웃었다.

“이놈이 기술자 눈치 보네.”

재민도 웃었다. 그때 재민은 일곱 살이었다. 그 말이 왜 좋았는지는 설명하기 어려웠다. 기계가 사람을 알아본다는 것. 수리기사 눈치를 본다는 것. 어딘가 살아있는 것 같다는 느낌. 그게 어린 재민에게는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따뜻했다. 집에 있는 물건이 집에 있는 사람을 안다는 것이, 이상하게도 좋았다.

TV는 그 뒤로도 한동안 같은 일을 반복했다. 며칠 잘 작동하다가 어느 날 안 켜졌다. 수리기사가 오면 켜지고, 가면 안 됐다. 어머니는 짜증을 냈고, 아버지는 매번 웃었다. 재민은 만화를 보지 못하는 날이 늘었지만 그것보다 TV가 수리기사를 기다리는 것 같다는 생각을 더 자주 했다.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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