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 biblia. 원형의 권위와 부질없음 공모(감상)

대상작품: 진정한 의미의 수정 단편 (작가: 유권조, 작품정보)
리뷰어: 일월명, 2시간 전, 조회 8

그거 아십니까? 셰익스피어 문학 연구의 주요 분야 중 하나는 셰익스피어가 쓴 희곡의 ‘원형’을 추론하는 것입니다. 시대에 따른 영어 어휘 변화부터 해적판 희곡집을 찍던 무능한 인쇄공의 철자 미스가 몇 년도에 일어났는지 까지 집요하게 추적해 근세-현대 영어의 언어 변화를 거슬러 올라가는 작업이죠. ‘To be or not to be.’라는 햄릿 왕자의 깊은 고뇌가 과연 셰익스피어가 쓴 첫 ‘햄릿’에 있었을까요?

시간을 넘어(작품 내에서는 아마 세상의 시작부터 있었으리라 여겨질) 존재하는 수정과, 그 수정에 끌로 ‘말씀’을 세기는 신관은 오랫동안 전래된 이야기나 텍스트(비단 종교적 경전 뿐만 아니라)와 전래자의 관계에 대한 은유로 읽힙니다. 고로 이 소설의 장르가 ‘역사’인 이유도 명확합니다. 규칙대로라면 소실되어가는 원형과 그 훼손된 상태를 박제, 혹은 당시 언어에 맞춰 개선한 판본의 형성 과정을 빠르게 돌리는 일종의 서지학 시뮬레이션 게임이 될 테니까요.

재미있는 작업에 저도 참여하고자 합니다. ‘진정한 의미의 수정 단편’ 일월명 판본(26.04.17.)을 남겨둡니다.

기도는 헛되고 말씀은 흩어지나 수정만은 영원하니 남은 것은 공허일 뿐입니다.

 


 

대리석 놓은 복도 위로 걷는 신관의 걸음은 조심스러웠다. 길을 ■■하는 늙은 신관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는 듯 조용히 발을 옮겼다.

다섯 개의 문을 지나 다다른 공동에 거대한 수정이 있었다. 담은 것만도 벅찬 광경에 젊은 신관은 눈만 끔뻑였다. 늙은 신관은 말로 걸음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젊은 신관이 다시 발을 떼기까지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수정에 기댄 층대가 곳곳에 있었다. 두 사람이 그 중 하나를 올랐다. 가장 높은 단에는 끝이 가느다란 끌과 나무망치가 놓였다. 수정 겉면엔 새겨진 글자들이 선명했다. 늙은 신관이 그 위를 천천히 쓸었다.

“신께서 하신 말씀의 골자를 담는 것이 이 수정의 목적이고 그 줄기는 새기는(남기는) 것이 내 사명이었네.”

늙은 신관이 천천히 고개를(머리를) 숙여 끌을 쥐고 나무망치를 쥐었다. 젊은 신관에게 건네며 말을 이었다.

“나는 이제 사명을 다하였네.”

“무얼 새겨야 하는지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말씀의 주체는 내가 아니니 들려줄 것도 하나도(내게는) 없다네.”

“예?”

“이 수정은 수천 년 가까이 이 자리에 있었지. 왕조가 스러지고 새로이 제왕이 탄생하여도 이 수정만큼은 자리를 지켰어. 그 세월 동안 새겨진 글들을 잘 살펴보게. 그리고 기도하게. 언젠가는 자네에게도 말씀이 들릴 테지.”

늙은 신관이 손을 뗐다. 그가 층대를 ■■■ 하니 젊은 신관이 마른침을 삼켰다.

“들리지 않으면 어찌 합니까?”

“걱정하지 말게. 이 수정은 만 년이 지나도록 여기 있을 것이고 말씀들은 그보다도 오래 남을 테니.”

늙은 신관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젊은 신관도 그를 붙들지 못했다. 홀로 공동에 남은 젊은 신관은 ■■■■■(대리석 위에/띄어쓰기 안 맞음) 끌을 내려놓고 그 위로 무릎을 꿇었다. 가슴께에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은 그가 기도문을 외웠다. 그런들 귓가에 울리는 말소리는 없었다. 무수하게 많은 홈으로 파인 ■■■■(수정, 혹은 수정과 연관된 단어와 어미 결합으로 유추) 울림을 집어삼키는 ■■(칠흑, 죽음 등, 고요를 수식하는 단어) 같은 고요만이 짙었다.

한참의 기도 끝에 젊은 신관이 일어났다. 나무망치와 끌을 쥐지는 않았다. 그는 층대 끄트머리에 서서 수정 겉면에 쓰인 글을 소리 내어 읽었다.

“지울 수 없는 것은 없으나 지우는 일은 존재한 바가 없다.”

어려서부터 여태껏 읽은 어떤 경전에서도 본 바가 없는 말이었다. 젊은 신관이 눈살을 찌푸렸다. 누가 새긴 것인지 알 수 없이 반듯하게 쓴 글자들 위, 아래, 옆으로 곧바로 글이 이어졌다. 사이사이를 구분 짓는 것은 ■■■■(띄어쓰기, 공백에 해당하는 단어 유추) 고작이었다.

“기도는 헛되고 말씀은 흩어지나 수정만은 영원하니 남은 것은 공허일 뿐이다.”

여러 해가 지나고 젊은 신관은 끌을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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