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에 모 금융기업 광고가 하나 있었다. 북한의 슈퍼노트까지 감별해 낼 정도라 FBI와 CIA에서 수 차례 세미나를 열기도 했고, 심지어는 미국 연방은행이 위폐로 감정한 지폐가 사실은 진폐임을 입증하기도 했던, 위폐감별사 서태석씨가 나오는 광고였다.
그 광고가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 건, ‘기계보다 더 정확한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주는 경이로움 때문이었다. 어떤 정밀 장비도 흉내 낼 수 없는, 수십 년의 세월이 만들어낸 ‘촉’, 소위 ‘프로의 감’.
이 소설도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한다.
파주출판단지에는 국내 유일한 활판인쇄공방이 있다. 활판 인쇄는 금속에 일일이 자모(字母)를 새겨 만든 활자를 기계에 걸어 인쇄하는 기술이다. 1960년대 후반만 해도 책·신문 등 대부분의 인쇄물은 활판 인쇄를 통해 간행되었지만, 이후 기술의 발달로 대량·고속 인쇄가 가능해졌고, 손이 많이 가는, 아니 모든 과정이 손으로만 진행되는 활판 인쇄는 하나둘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이 소설은 바로 그런 활판인쇄 장인의 이야기다. 국내에 단 하나 남은 공방이 그 기술의 명맥을 간신히 붙들고 있듯, 소설 속 아버지 서진구는 아무도 찾지 않는 금속 활자를 창고에 간직한 채 30년을 버텨왔다.
이 소설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아버지의 자부심이 묘사되는 방식이다. 소설은 아버지의 전성기를 직접 보여주지는 않는다. 대신 술자리에서 후배들에게 늘어놓던 말 한 마디를 통해 그 시절을 건네준다. 초안을 보는 순간 머릿속에 촉, 다시 말해 판면이 안 그려지면 그건 이미 파인 거라고, 속도보다 정확성이라고, 자기가 이십 년 넘게 버틴 건 결국 그거 하나 때문이었다고. 소란스럽지 않은 자랑이지만, 그 안엔 한 사람이 평생 갈고닦은 기술에 대한 뿌리 깊은 긍지가 담겨 있었다.
활판 인쇄가 어떤 기술인지를 알면 그 자부심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더 잘 이해된다. 금속활자를 하나하나 골라 판을 짜고, 그것을 기계에 걸어 인쇄하는 과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의 손을 거쳐야 했다. 속도를 높이려면 판을 읽는 눈과 활자를 고르는 손이 함께 빨라져야 했고, 그러면서도 단 하나의 오식도 허용되지 않았다. ‘조판기’라는 별명은 그 모든 것을 몸으로 익혔다는 증명이었다.
그러나 신식 인쇄기가 들어오고, 디지털이 자리를 차지하면서 아버지는 밀려났다. 기술이 사라진 게 아니라, 그 기술을 필요로 하는 세상이 사라진 것이었다. 아버지는 그걸 자존심의 문제로 받아들였다. “그놈의 디지털인가 돼지털인가가 자존심까지 짓밟아버렸다”고 소리쳤던 건, 단순한 실직의 분노가 아니었다.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감각이 하루아침에 쓸모없는 것으로 분류되는 데 대한, 한 사람으로서의 항의였다.
사실 이 주제는 내게도 낯설지 않다. AI도 나에게 지적했던(…) ‘리뷰어가 똑똑하고 작품에 대한 이해도도 높은데 지 자랑만 한다’ 를 다시 또 끌어오자면(…그럼 내가 이럴때 아니면 어디서 내 자랑을 늘어놓냐) 내 소설 [이상없습니다]에서도, 주인공은 비슷한 인물이다. 요즘 사람들은 가전제품에 이상이 생겨도 굳이 수리를 부르지 않는다. 사실 무상 AS기간이 끝날때까지 망가지는 일도 없다. 신제품이 나오면 새로 사고, 이전 것은 중고로 팔아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20세기 가전제품들의 묘한 이상현상을 알아차리는 것, 소리만 듣고도 어느 부분에 문제가 있는지 짚어내는 것은 베테랑 수리공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오래된 미래의 촉]의 아버지도 그런 사람이다.
이 작품은 그런 아버지를 측은하게 그리거나 시대의 피해자 또는 뒤쳐진 사람으로 단순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자부심이 아직도 살아 있었음을 보여준다. 30년이 지나도록 창고에 금속 활자를 고이 간직하고 있던 것, 위원회 감정실로 향하는 차 안에서 가방 속 활자를 손으로 뒤적이던 것, 그리고 흰 장갑을 거침없이 벗어버리던 것. 그것은 고집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내가 이걸 안다’는, 오랜 세월이 만들어낸 확신.
이 소설이 전하는 주제는 이 맥락에서 더 확실해진다.
첫째, ‘기술의 변화와 인간의 소외’다. 아버지는 디지털 전환 과정에서 밀려난 인물이며, 그 과정에서 자존감과 사회적 역할을 잃는다. 이는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산업 구조 변화 속에서 발생하는 보편적 문제를 반영한다. 앞서 언급한 [이상없습니다]의 베테랑 수리공처럼, 세상이 ‘굳이 고치지 않는’ 방향으로 바뀌면 아무리 정교한 감각도 설 자리를 잃는다.
하다못해 아들조차도 통화내용을 다 알아듣지 못하고 AI에게 요약해달라고 한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 또한, AI에게 일자리를 빼앗길까봐 전전긍긍하고 있는 중이다. ㅎ…
둘째, ‘숙련의 가치’다. 작품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분석보다, 오랜 경험을 통해 체화된 감각이 가지는 신뢰성을 강조한다. 이는 앞에서 언급된 위폐감별사와도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지점이다. 기계나 제도가 놓치는 미묘한 차이를 인간의 감각이 포착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그런 ‘프로의 감’은 오직 수십 년의 반복을 통해서만 얻어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셋째, ‘관계의 회복’이다. 화자와 아버지의 관계는 처음에는 단절되어 있으나, 사건을 계기로 다시 연결된다. 특히 아버지의 눈빛이 변하는 장면은 단순한 직업적 회귀가 아니라, 존재의 회복을 의미한다.
파주에 단 하나 남은 활판인쇄공방이 사라질 뻔한 기술을 간신히 붙들고 있듯, 아버지의 손도 세상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선언한 뒤에도 그 감각을 놓지 않았다. 위폐감별사의 손이, 수리공의 손이, 조판공의 손이 결국 닿아야 할 곳에 닿는 순간들.
과거의 자부심이 현재의 쓸모로 되살아나는 그 순간, 소설은 분명하게 말한다. 사라진 줄 알았던 것들이 사실은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