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독서 경험을 해칠 수 있습니다.
글쎄요. 어떤 말로 운을 때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건 순문학인가요? 아니면 장르문학인가요? 굳이 이 둘을 엄격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때론 중요한 문제입니다. 장르 문학의 경우 작가의 개성만큼이나 장르의 문법이 중요합니다. 클리세를 충분히 따르거나, 클리세를 완전히 파괴하거나. 다 클리세, 즉 해당 장르의 문법이 있다는 것을 가정하니까요. 장르 문학에게 해당 장르에 충실했다는 것은 칭찬일 것입니다.
반면 순문학은 장르의 문법이 아닌 표현과 예술성을 더 중시합니다. 그렇기에 클리세 사용이나 기존 문법과 닮았다는 말을 한다면 날선 비판일 것입니다.
이렇게나 긴 운을 떼고 시작하는 이유는 제가 이 소설에서 표현하는 방식과 구조를 어딘가에서 봤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은 친구가 살던 집을 방문하고 거기서 사방에 포스트잇-이름-이 붙어있는 걸 발견합니다. 그 기이함에 놀랄 때 ‘그것’을 발견하죠. 이름이 붙어 있지 않은, 아마도 친구의 자리에 대신 들어서 있는 그것이요.
여기서 이름이 붙어있지 않는, 의미 없는 물건은 버려집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것과 동일하게 처리됩니다. 그렇기에 그것은 자신에게도 이름을 부여하려 시도하지만, 결국 포스트잇을 전부 떼고 죽음을 수용합니다. 깨끗이 치워진 방을 내가 다시 방문해 계약하고 인형에 그의 명패를 붙이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납니다.
최인호 작가의 단편 ‘타인의 방'(1971) 생각이 계속 났어요.
타인의 방은 전문이 공개된 소설입니다. 이 작품은 한 남자가 집 문을 두들기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옆집 사람이 나오죠. 남자는 자신이 이 집의 주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들어간 집에는 자신의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고 너무나도 낯선 타인의 방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사물들과 인간의 경계가 흩어지고, 남자는 결국 사물이 되어버리고, 아내가 돌아오자 다른 물건들과 함께 치워집니다.
두 작품 모두 가장 안전한 공간인 자신의 방에서 사라지는 자신을 표현하고 잇습니다. 물론 사물들이 말하는 모습을 통해 사물과 인간이 섞이는 모습을 보여줬고, 의미를 삼키는 집에서는 이름붙지 않은 것들을 치우고, 안에 있는 친구에 이름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의미를 지워내는 방식으로 표현했습니다.
서로 말하고 싶은 게 다릅니다. 타인의 방에서는 노동자의 사물화를 말하지만 의미를 삼키는 집에서는 죽음과 수용을 이야기하는 것이니까요. 그렇기에 이 기묘한 일치는 우연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정말로 아쉽습니다.
뉴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더 멀리 보았다면 이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었기 때문이다.”
타인의 방은 1971년 작품이며 수능에도 몇 번 출제된 작품입니다. 좋은 작품이죠. 이 소설에 쓰인 장치나 분위기 연출은 배울 점이 많습니다. 독창적인 루트로 여기까지 왔다면 그건 대단한 일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진한 기시감을 줄 뿐입니다.
앞에서 선배가 여기까지 왔다면,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좀 더 자신만의 고유한 표현 방식을 찾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