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 마음을 뭐라고 정의해야 할까. 수없이 많은 수정을 거듭하며 그녀가 이해한 주인공의 감정이 무엇일지 가늠해보려 한 것을. 그러다 결국 실패한 것을.
긴 연결음 동안 묻고 싶었던 것들과 전하고 싶었던 것들을 떠올렸지만 수화기를 놓는 순간 하얗게 잊어버린 것을.
이별 후 보내온 희진의 이메일에 반년 동안 답장하지 못한 경원이, 답장을 써내려가면서 과거를 회상해 나가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써내려 가다가 보내지 못 하고 전부 지워버렸는지. 보낼지 말지를 계속 고민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경원은 아빠와 자신을 ‘우리’라고 표현한다. 아빠의 삶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면 그날 자신이 왜 희진을 붙잡을 수 없었는지 말하기 어렵다고 경원은 생각했던 것 같다. 경원은 희진을 만나던 과거에도 지금도 안정적이지 못하고 불안한 자신의 상황에 대해 계속 고민하고 있다. 반면 희진은 배우를 그만두었지만 극본가로서의 실력을 인정받았는지 파리 극본팀에서 일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온다.
그들의 과거가 모르는 사이에 많은 영향을 미쳐서 포기하고 단절 시켜버리게 되는 상황이 먹먹하게 느껴졌다. 경원은 자신과 이별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 아빠의 삶을 떠올려야 했고, 그에게 받은 영향을 헤아려야 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 왜 그렇게 힘든 걸까?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하는 가족조차도 삶의 요약 줄거리를 대충 아는 것뿐이지 온전히 그 사람이 되어 살아보지는 않아서 그런 것 같다. 어떤 사람에 대해 정말 알려면 나와 상대방의 지나온 시간들 뿐만 아니라 많은 영향을 끼친 주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
가장 인상적으로 남았던 장면은 경원과 희진이 이별을 하게 된 마지막 여행 길의 풍경이었다. 경원은 불안하게 밤 운전을 하면서 길을 잃고 있는 상황이라 희진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 한다. 희진이 하고 있는 말이 중요한 말이라는 것과 무슨 말이든 해줘야 한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지만 경원은 눈 앞에 닥친 운전에 그럴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다. 경원이 운전에 서툴다는 걸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 하필이면 그날 그 순간에 꺼내지 않으면 안 되는 말들을 쏟아내느라 희진은 절박했고, 경원에게 어떤 말도 들을 수 없었다. 혼자서 그 밤에 차에서 내리는 것을 선택할 정도로 희진은 정신적으로 기댈 수 없는 경원을 견딜 수 없다 느꼈던 걸까? 내뱉은 말들로 그녀를 평가하고 견디지를 못해 경원이 침묵만을 유지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차라리 내리는 것이 낫겠다 생각했을까? 만약 그때 이렇게 솔직하게 말할 수 있었다면 서로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고 덜 아픈 이별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이야기였다. 어쩌면 그런 후회로 경원은 그럴 수밖에 없던 부족한 자신을 이해해 보려 애를 쓰고 있다.
사실 이해 자체가 중요했던 게 아니라, 그들은 잘못된 상황에서, 서로를 만났다는 이유가 그들을 이별로 이끌었던 것 같다. 어둡고 불안한 여행에서 차라는 하나의 공간에 같이 있었으면서도 서로를 바라볼 수 없었고, 이야기를 잘 들을 수 없었다. 경원은 헤매지 않고 제때 더 늦지 않게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 중요했던 사람이었고, 희진은 자신에게 집중해주고 삶을 지탱할 수 있도록 붙잡을 말을 해줄 수 있는 마음이 단단한 사람이 필요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무영등> 리뷰
감춰진 상처를 들여다 보면 복잡하고 아픈 인생
세상에서 누군가에게는 Y는 회사원, H는 기자, 혹은, 소설가, 혹은 택배기사였겠지만, 서로의 시선을 통해 잠깐이나마 들여다 본 그들의 삶은 훨씬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고민을 품고 있었다. 어딘가에 저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의 이웃, 주변인으로 있더라도, 직접적으로 열어 보여주지 않은 문제들이라서, 우리 주변에는 없는 사람이라고 여기게 되는 걸지도 모른다.
뉴스에는 안 좋은 소식들이 계속 들려온다. 해마다 늘어가는 자살 통계. 안 그래도 넉넉지 않은 사람들이 힘겹게 모은 돈으로 마련한 집 마저 빼앗는 전세 사기. 기후 위기로 겨울은 춥고 여름은 지나치게 더워서 살기 좋은 날씨는 점점 사라져 가고, 전기세와 수도세가 올라가고, 물가가 폭등하고 있다. 회사가 망하고, 코로나 시기에도 버텨내던 가게들이 사라진다. 일자리를 잃는 사람은 많고, 그만큼 취직하기가 어려워 지고 있다.
각박해져 가는 세상에 자기 살기도 버겁고 바빠서 사람들은 주변에 무관심해지고, 죽은지 몇 개월이 지나고도 아무도 몰랐더라 하는 이웃의 고독사 소식은 여전히 무서운 일이긴 해도 크게 놀라운 소식이 아니게 되었다. 나라가 어려워질수록 각종 범죄, 사기, 사이비가 판을 친다. 딱히 사이비에 대해서는 깊이는 모르더라도, 길에서 전도를 권하는 사람들, 아파트에 전도하러 돌아다니는 사람은 끈질긴 종교 가입 권유자이니 조심하라는 말을 상식이나 농담처럼 주고 받기 시작한 건 굉장히 오래된 일이다. 모 사이비 교인들이 몇 십만이더라는 말도 심심찮게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런 걸 보면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실상은 더 많은 사람들이 사이비 종교로 인한 심각한 피해와 상처에 노출되어 있을 수 있다고 추정된다.
감추어 왔고 결코 드러내고 싶지 않았을, 그동안 가까웠던 사람들도 보지 못했던 상처가 있다. Y는 H에게, H는 Y에게 감출 수 없고, 오히려 드러내어 말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무영등>은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는 불안한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권선율 작가님의 전작인 <그들의 나름>에서는 오랫동안 같이 살아왔으면서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 하고 소통이 단절된 가족의 아픈 사연을 다루고 있었다. 아들은 엄마의 자발적 실종을 겪고 나서야 그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다시 만나기 위해 찾아다니는 이야기였다. <무영등> 안에서도 여러 단절의 모습들이 나타난다.
Y와 H는 가족과 단절되었고, 사회에 속하였지만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 같았다. 어떤 사연으로 인해 그들은 서로를 알아왔던 시간의 인연이 끊어진 채 살아왔고, 무리한 회사 일로 인해 누적된 피로로 Y가 배달 시킨 떡볶이를 먹지 못하고 방치하지 않았더라면, H가 오지랖으로 얼굴도 모르는 이웃이 혹시 고독사 한 것이 아닌지 확인하려고 방문하지 않았다면, 가까이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살아갔을 것이다.
<무영등>에 등장하는 빛의 이미지는 이들이 가진 서사를 더 불안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Y와 H를 이어주었던 연결점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을 가장 힘들게 만들었던 ‘사이비 종교에 빠졌던 가족이 있다는 점’과 ‘전세 사기를 겪고 있는 피해자라는 점’이었다. 현관등은 사람이 오고 가는 동안에만 잠깐 켜지는 빛이다. 애초에 그런 필요를 위해서 설치된 것이기 때문에 막상 사람이 있거나 없거나 현관등이 지속적으로 켜진 채 유지된다면 그건 고장난 거라 말할 수 있다. 원래는 하나인 공간을 나눈 이들이 거주하고 있는 아파트의 구조와 잠깐 켜지고 꺼지는 현관등의 이미지는 Y와 H의 관계와도 닮아 있다.
무영등은 ‘그림자가 생기지 않도록 다각도로 밝고 강하게 비추는 등’으로 ‘수술할 때 사용하는 조명’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이 서로를 일으켜 주고 지탱해주는 존재로서 오래 함께하길 바라게 되면서도, 긴 시간을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는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그래서였다. 수술은 치료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놓인 사람에게 하는 치료 행위다. 수술의 고비를 견디지 못하고 죽는 경우도 있다. 고통스러운 시간을 잘 견디고 나면 회복이 진행되고 그럼에도 재발하여 악화되기도 한다. 현관등이 잠시 켜졌다 꺼지는 조명이라면, 무영등 역시 너무 길면 안 되는 빛이었다.
영원히 그림자 없이 밝은 곳에서 살아간다면 좋을 것 같지만, 만약 우리 인생이 낮만 지속되는 백야처럼 내내 무영등 아래에 있는 거라면 언젠가는 숨을 곳 하나 없어서 오는 고통 때문에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한 위로가 되고 밑바닥을 다 보여줄 수 있을 정도로 편안하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을 일생에서 몇 번이나 마주칠 수 있을까? 수없이 지나쳐 가는 인연의 횟수보다는 늘 한없이 부족하고 적을 것이다. 이 이야기가 아프게 다가오는 이유는 세상에서 서로의 유일한 이해자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던, 어딘지 닮아 있는 그들이 각자 어긋난 기대를 품고 있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Y는 H를, H는 Y를 온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고 공허한 마음을 다 채우지 못 했다.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한다는 건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러니까, 누군가를 알기 위해 오랜 시간을 들이고 진지하게 노력하면, 그 결과 우리는 상대의 본질에 어느 정도까지 다가가 있을까.
ㅡ 무라카미 하루키 <태엽 감는 새 연대기> 1권 중에서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