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여 나의, 그대여 나의 장미여. 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찔레와 장미가 헤어지는 계절에 (작가: 번연, 작품정보)
리뷰어: Ello, 17년 8월, 조회 454

 

0.

 

<타자의 시간>

 

그곳에 꽃이 피었다는 소식

그리고 봄에 대한 의심

 

그곳에 별이 빛난다는 소식

그리고 밤에 대한 의심

 

당신의 소식은 늘 당신보다 앞서있다 나보다 앞서 있는 나의 의심처럼

나는 당신 소식을 봄밤에 들었다

 

그곳에서 귀는 뜨거울 때마다 붉어지는 장미의 한잎이라

깨물면 저녁이 피를 토하고 쓰러지지

 

나는 호수로 가 당신의 귀를 만진다 당신의 입술을 잘라 붙인 물수제비들

소식들의 수평이 구멍을 열면

 

장미는 빛깔로만 피었다 지지

마침내 돌아오지 않겠다는 말,

 

꽃들의 형장에서 소식은 온다 당신의 귀와 당신의 입 사이에서 꽃들이 목을 잃고 쓰러질 때 꽃잎처럼 호수는 폭발하고 꽃잎처럼 입을 열고 귀를 열고 꽃잎처럼 온몸 구멍을 모두 열면 다시 온몸의 구멍마다 꽃잎처럼 의심이 피어나는 봄밤의 축제로부터

 

나는 밖을 잠글 수 없어 안을 잠그고 잔다

모든 생활은 드디어 반복되고,

 

모든 사랑은 드디어 중첩된다

 

 

1.

편집부 추천작으로 처음 접했습니다. 찔레와 장미가 헤어지다니, 꽃 이야기인가 하면서요.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네요. 확실한건 절절하고 애달퍼서, 닿고 싶지만 차마 닿을 수가 없는 아픈 계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 줄어들지 않는 거리가 안타까움을 자아내던 밤이 있었죠. 판타스틱 듀오에서 이문세와 김윤희가 부른 <휘파람>을 듣고 있다가, 어느 날 랜덤곡에 <휘파람>이 나온다면 리뷰 써드리마 하고 약속을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가사를 주욱 적고, “이 음악을 들은 후 읽어보시오.”라는 무책임한 홍보문구만 남겨 놔야지 했습니다. 그렇게만 하더라도 충분히 읽힐만한 글이기도 하고요.

음악을 들으며 글 속에 없던 상상을 덧붙여버린 저는’노을진 산마루턱에 아직도 그대의 향기가 남아서 그렇게만 서있는’ 호해랑의 모습을 홀로 안타까워했습니다.

 

2.

그럴 수 밖에 없는 결말이 있다는 것을 독자도 알고 호해랑도 알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건 어쩔 수 없네요. 좋았던 기억이라고는 하나도 남겨두지 않은 채 면과 마를 섞어 짠 옷을 입고 나타난 여우, 1200년의 수련을 내던지려는 여우, 축지를 쓸 줄 아는 여우, 맨 손으로 곤륜의 성을 파보려 손톱이 다 해진 여우, 가슴털을 뽑고 머리카락을 섞어 수의를 지은 여우, 살아가려는 의지 따윈 없던 여우, 호랑이의 마음을 알면서도 곁눈질 한 번 주지 않은 여우.

민들레가 핀 눈을 한 여우, 여우, 여우.

제기랄 놈의 여우, 일부일처로 천년만년 해로하는 여우새끼!

 

 

단 한 번의 고운 얼굴도 보이지 않다가 그저 소식을 알아봐 주겠다는 말에 ‘하얗고 도담하게 피어’버린 여우.

이 모든 모습이 알알이 박혀 먹지도 마시지도 않아도 되는, 잠을 자지 않아도 되는 그에게 지독한 형벌로 따라다니겠죠. 어쩌자고 나타났나 원망했다가, 어쩌자고 죽었는가 한탄했다가.

그래도 끝까지 여우의 마음을 지켜주려고 지아비의 소식에서 첩의 소식을 뺀 그의 마음이 더 애틋하게 짐작되어서 독자도 이 작품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좋아하는 쪽이 더 약자니까요.

……. 전 끝까지 희망을 주고 간 여우가 밉습니다.

 

3.

여우가 밉긴 하지만, 사랑은 원래 주는 쪽 보다 받는 쪽이 더 어렵죠. 확실히 거절하자니 지아비의 소식을 듣지 못할 것 같고, 받아주자니 이용하는 것 같고요. 그렇다고 내치기엔 여우도 호해랑의 마음은 얼굴만큼 험상궂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버렸으니, 마음 씀씀이가 고맙기도 했을 것 같기도 하고.

네 말도 옳고 네 말도 옳다, 고 할 수 있는 건 그만큼 여우도 호랑이도 이해할만하고 이입할만하게 그려주신 덕분이겠죠.

세계관을 공유하는 다른 소설 ‘환태’에서도 느꼈지만 묘사가 탁월합니다.

 

“머리카락이 마치 굴뚝에 피어난 밥 짓는 연기처럼 허공을 휘저으며 날렸다.” 나 “매미가 벗고 나가버린 그 허물 같은 모습으로” 이런 외형 묘사가 참 친절하고 적절하게 들어가 있어서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듯, 영화를 보듯 눈 앞에서 그릴 수 있었습니다.

특히

결국 땅에 젖은 자국이 점점이. 비산한 작은 물방울이 또 더 작은 자국을 점점이. 메인 목소리에 몸에 매인 신세를 풀어낸 눈물들이 망울지어 땅을 울리며 후두둑 후두둑 떨어졌다. 그 젖은 자국 앞에 모아진 작은 두 발을 보며, 그는 아랫니로 윗입술을 물었다. 물 수 밖에 없었다.

에서 느껴지는 여우의 비참함과 호랑이의 비통함에 덩달아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쥘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얼마나 눈물을 쏟았으면 그렇게 흩날리도록 그러면서도 후두둑 소리가 날 수 밖에 없었을까 싶어서. 그 눈물망울이 떨어져 땅을 적시는 걸 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릎 꿇고 무너지지 않는 작은 두 발을 보면서 해줄 수 있는 것이 모진 말 밖에 없었던 호랑이는 어땠을까 싶어서.

잠시 같이 멈춰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4.

찔레가 먼저 피고, 장미가 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지네요.

 

끝까지 잡을 수 없는 다른 계절의 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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