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은 너무 이르지. 25일은 빡빡하고 26일은 너무 늦다. – 본문 중에서
24일은 이미 지나버렸으니, 26일이 되어 너무 늦어버리기 전에, 빡빡하지만 오늘 짧은 감상을 남겨봅니다.
<스포일러 주의>
이 소설은 팍팍한 현실의 묘사로 시작됩니다. 1인칭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약간 현실에 감정을 이입하는 걸 포기한 것처럼, 한 발자국 물러난 듯이 건조한 말투로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눈앞에 펼쳐지는 상황을 묘사해냅니다. 저는 이 부분이 꽤나 인상적이었는데, 자신이 너무 너무 힘들다는 것을 감정적으로 과장해서 표현해내질 않고, 약간 이미 해탈(?)한 것 같은, 어차피 삶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 같으니 손에서 어느 정도 놔버렸다는 느낌을 주는 게, 오히려 주인공이 삶에 지쳐있다는 것을 더 생생하고 강렬하게 전달하는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감정을 느끼는 자신과 그걸 인지하는 자신을 분리해서, 더는 감정적인 몰입에서 오는 상처를 받지 않겠다는 듯한 태도는 주인공이 오랫동안 혹은 반복해서 좌절이나 절망을 겪고 상처를 받아왔다는 걸 간접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요소라고 생각되었고, 이는 소설 후반부에 확실하게 언급이 됩니다.
주인공은 꿈과 현실의 생계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현실의 생계를 택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택한 현실의 생계마저도 만만찮습니다. 그렇다고 다시 꿈을 좇기에는 막막하고 두렵습니다. 너무 늦은 것 같다는 생각밖에 안 듭니다. 꿈과 현실의 생계 중 무엇 하나를 확실히 정하기만 하면 되는 세상이면 모르겠는데, 한 쪽을 포기하고 다른 한 쪽에 온몸을 던지더라도 잘 될지 확신할 수가 없는 세상입니다. 이를 소설 전반에 걸쳐 앞서 언급한 건조한 어투로 묘사하는데, 읽으면서 가슴을 후벼파는 듯 해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있었고 그걸 꿈으로 좇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됩니다. 결국 이러한 전개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서 ‘왜 살아야 할까’라는 무서운 질문으로 발전합니다.
그런데 이 소설은 그 중간 과정을 단순히 다큐멘터리 같은 방식으로 전개해나가지 않습니다. 갑자기 산타를 꿈꾸는 사탄이, 그것도 말하는 거북이의 모습으로 등장해버리거든요. 처음에 거북이는 몸이 뒤집힌 채 등장합니다. 그대로 뒤집힌 채로 방치되었다간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주인공은 그 거북이를 뒤집어서 구해줍니다. 그 뒤에 거북이의 믿을 수 없는 사탄 업계의 쇠락과 산타 지망생으로서의 장대한 포부와 관련된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사실 제가 주목한 부분은, 그 뒤에 거북이가 보답으로 주인공을 ‘뒤집어주는’ 대목입니다.
거북이가 주인공을 ‘뒤집어주는’ 대목은 상당히 추상적이고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뒤집는다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콕 집어 설명해주지 않아 모호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부분입니다만, 저는 이를 거북이와 주인공의 첫 만남과 대조하여 해석하였습니다. 이하의 내용은 제 개인적인 해석일 뿐이므로, 다른 독자분께서 다르게 해석하신 게 있다면, 그것 또한 정답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거북이는 뒤집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거북이는 그대로 그냥 죽음을 기다리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거북이는 살려고 발버둥쳤고, 살려고 주인공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뒤집혀있는 건 죽음으로 향하는 상태이고, 그걸 뒤집어주는 건 다시 살게 되는 걸 가리키며, 그 중간에는 ‘살고자 하는 의지’가 개입됩니다. 혼자서는 몸을 뒤집지 못 하는데도, 도움을 줄 사람이 언제 올지 모르면서도 계속 발버둥 쳤습니다. 말하자면 ‘희망’을 품고 있었던 겁니다. 계속 발버둥 치면 몸을 뒤집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언젠간 도움을 줄 사람이 올지도 모른다는 희망. 그러나 막연히 기다리기만 하는 희망이 아니라, 살기 위해 몸을 움직이고 도움을 직접 요청하는 적극적인 희망.
마찬가지로 주인공도 사실 뒤집혀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발버둥 치지도 않고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습니다. 희망 없이 포기한 것입니다. 다르게 말해, 죽어가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거북이는 주인공에게 ‘죽어’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주인공은 ‘그래, 그럼 그냥 죽자’라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이내 주인공은 ‘닥쳐!’라고 말하며 의자를 내던지며 저항합니다. 이 심경 변화의 구체적인 과정이 소설에 묘사되어 있진 않지만, 앞선 대화를 통해 ‘과거의 살아온 시간과 추억’에 의해 살아진 것이라고 저는 개인적으로 해석해봅니다. 과거는 현재를 살아가기 버겁게 만드는 후회의 창고이기도 하지만, 현재를 버틸 힘을 주고 변화를 기대하게 만드는 수많은 추억과 삶을 버텨온 성취의 축적이기도 하니까요. 실제로 소설 내에도 ‘추억의 형태와 비슷한 윤곽’이라는 묘사가 나오기도 하고요. 주인공이 그걸 붙잡고 의자를 내던지는 행위는, 거북이가 자신의 몸을 뒤집기 위해 최선을 다해 버둥거리는 것과 동일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리고 주인공은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이를 보고 거북이는 주인공에게 살아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합니다. 마치 그럴 줄 몰랐다는 것처럼요. 즉, 주인공이 스스로 발버둥쳐서 몸을 뒤집은 것에 성공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거북이가 한 건 발버둥칠 힘을 낼 수 있도록 자극한 것이고요. 그렇게 거북이는 뒤집혀 있던 주인공을 뒤집어줬습니다. 살 수 있게 해준 겁니다. 자신이 주인공에게 도움 받은 것처럼요.
여기서 저는 희망이 단순히 앉아서 기다리는 얌전하고 조용한 희망이 아니라, 의자를 내던지고 어둠을 헤치고 나아가고자 하는 적극적이고 투지에 불타는 희망이라는 게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죽음에 저항하고 삶을 살아나가기 위해 투쟁하는 희망. 이 소설이 주는 이 이미지가 너무나 좋더라고요. 주어지는 희망이 아닌 쟁취하는 희망이라는 접근이 감명 깊었습니다. 산타가 되고 싶었던 사탄이 선물처럼 주고 간 희망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구원 같은 희망이 아니라, 내부에서 끌어올린 행동하는 희망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주인공은 결국 직업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절망하지 않습니다. 주인공이 ‘어쩔 수 없지. 다른 길을 찾아보자.’라고 말하는 어투는 절망에 찬 체념이 아닌 희망에 찬 수용으로서 표현됩니다. 굴곡이 있더라도 살아나가겠다는 희망이 있다면 변화할 수 있고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회사의 실적이 아닌, 삶의 실적을 쌓아나가는 겁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와 같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나갈 이유’를 고민하고 파헤치고자 노력하는 글을 참 좋아합니다. 그리고 이 소설은 이를 크리스마스라는 실제 시간적 배경에 맞추어, 산타가 되고 싶다는 터무니없는 꿈을 꾸는 것처럼 보이는 사탄을 등장 시켜, 한바탕 꿈인 것 같은 비현실의 위로는 건넵니다. 웃음이 피식 나오는 말장난 같은 제목과 상황을 통해, 순진하고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거북이처럼 그런 희망을 바탕으로 꿈을 원동력 삼아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냐고 물어오는 듯 합니다.
마음이 아프면서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소설이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글에서 위로를 받아본 게 실로 오랜만이라, 부족하지만 제 개인적인 해석도 곁들여 감상을 적어봤습니다. 좋은 소설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설 잘 읽었습니다.
모두들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