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고백을 좀 하고 시작하겠습니다.
사실 전 눈물을 마시는 새 외에는 읽은 적이 없습니다(…….) 피마새는 1권만 보고 탈력해버려서…;;
눈마새 4권짜리도 4시간이 걸렸는데 피마새는… 갑자기 엄두가 안나더라구요.
심지어 그 눈마새 조차도, 피마새가 나오고 한참 뒤에서야 친한 분의 엄청난 감상문을 보고서야 ‘음… 한번 읽어볼까’하고 도서관에서 1권을 펴 든 자리에서 다 읽고는 4권을 전부 빌려와서 집에서 침대에 앉은 자리에서 쉬지도 않고 읽었는데…(그리고나서는 소장판을 사고, 윷놀이가 들어있는 그 세트도 샀죠…)
드래곤 라자의 경우는 아빠 취향이었는지 [도서대여점] 시절에 아빠가 전권 다 빌려와서 보시더라구요.
폴라리스랩소디는…
미친 작가가 있으면 미친 독자도 있는 법.
남편은 모임에서 경품(?)으로 이 책을 얻은 뒤 원래 이렇게 발간된 줄 알고 저걸로 읽었습니다(…)

미친잉간아…;;;
여튼 그러니까…
이영도 작가님의 소설을 제대로 읽어 보는 건, 이게 두번째라는 겁니다…
각설하고…
-작가와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
이영도 작가님의 [어스탐 경의 임사전언]은, 표면적으로는 추리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글을 쓰는 행위’와 ‘작가라는 존재’ 자체를 해부하는 소설입니다. 이 작품은 사건의 진상보다도, 왜 글이 쓰였는지, 그리고 그 글이 누구의 것인지, 글(예술행위)이 맞는지라는 질문을 끝까지 밀어붙입니다.
죽은 자와 글 쓰는 자, 아직도 할 말이 남았습니까?
이영도 작가님의 대답은?
네.
그렇게 많은 글을 써 놓으시고도, 아직도 할 말이 남았더랩니다.
죽어서 다잉메시지(임사전언)로 대하소설을 써제낄 정도로.
음…
이것이 ‘작가들의 작가’, ‘킹 오브 더 작가’의 모습인가요…
그에 비하면 전 아직 입도 못 뗀 애기입니다만… ㅠㅠ
그래서 저는 이 소설이, 이영도 작가님의, ‘난 죽어서도 글을 쓸거다!’ 라는 포부, 그리고 동시에, ‘이놈의 작가병은 죽어서도 뭘 쓰고 있겠구만!’ 이라는 자조로 들렸습니다.
괄하이드는 죽은 채로 싸우더니, 이제 어스탐은 죽은 채로 글을 쓰는군요.
그렇습니다. 그는 죽어서도 씁니다. 어스탐 로우는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라, 죽은 상태로 글을 씁니다. 그것도 단순한 메모나 고백이 아니라, 대하소설에 가까운 다잉메시지-임사전언을 남깁니다. 이 설정 자체가 이미 작가라는 존재의 병적 집요함을 상징합니다.
-예술과 창작에 대한 생각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이게도(?) 어스탐의 동생인 세티카는 꾸준히 말합니다.
“예술은! 살아있는 자가 창조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게 단 하나뿐인 절대적 기준입니다! 그렇기에, 이미 거기에 절대적 기준이 존재하기에 다른 절대적 기준은 거부되고 배척되고 부정되고 반려되고 각하됩니다. 살아있는 자가 창조했으면 그건 예술입니다! 제 수염을 꼬고 있으면 비평가로 보인다고 믿는 바보들이 무엇은 예술이고 무엇은 예술이 아니라는 헛소리를 할 수 없게 된다고요! 저급한 예술? 넘쳐납니다. 하찮은 예술? 발에 챕니다.”
“예술은 살아있는 자가 창조한 것이어야 한다”는 절대적 기준. 살아있는 자가 창조해야만 예술이라는 말. 저급하든 하찮든 상관없이요.
왜일까요. 하필 ‘작가’ 어스탐의 동생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그럴까요. 어쩐지, 뭔가 돈도 안 되는 것 같은 ‘예술활동’을 하려고 할 때마다 ‘그럴 시간에 기술 배워서 돈이나 벌어라’ 라고 윽박지르는 각 가정의 가족들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정작 세티카가 쓴 글은 다 읽지 못할 정도로 재미 없었나봅니다만…).
뭐 다행인지 불행인지… 저희 집 가족들과 부모님들은 그렇게 말하시진 않았지만요…
그리고 인상적이었던 대사.
“못 보오. 경은 누가 보고 있으면 글 못 쓰는 부류의 작가라더군.”
이 대사는, 하도 많은 사람들이 이영도 작가님에게 관심을 가지는 바람에, 한동안 글을 못 썼다는 해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ㅋㅋㅋㅋ….
뭐, 사실, 누구라도 다 쓴 글을 보여줄 순 있어도, 글 쓰는 장면을 보여주고 싶진 않을 거 같습니다. ㅋㅋㅋ
전 제 소설을 아무렇지 않게 남편에게 보여주고 조회수좀 올려달라고 부탁도 하지만(…) 쓰는 과정에 들어가 있을 때, 제 근처에 오면 얼른 창을 닫아버립니다. 이상하게 그건 좀 창피하더라구요?
…근데 또 정작 저는 저 대사에서 소재가 떠올랐습니다…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으로, 시청자들과 함께 글을 완성하는 작가 이야기…;;;
(누가 좀 써주시면… ㅋㅋㅋㅋ)
네, 그… 태양만도 못한 촛대와도 같은 소재입니다. 네네.
그리고 또 한 대목.
작가에게 원한이 있는 편집자가 조판한 판형이 있다면 이럴 듯했다. 여백은 파리 한 마리도 마음 편히 앉기 힘들 정도이고 글자 크기는 밀알 크기에 행간에 이르러선 읽다가 방심하면 중간에서 윗줄이나 아랫줄로 넘어갈 지경인 글이 3단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설마… 이렇게 편집해달라는 말은 아니셨겠지…
(그보다는 작가님이 전공서적류 편집에 원한이 있으신 게 아닐까…)
-소설과 인생의 유사성
특히 마음에 와닿은 부분은 “인생과 같은 것 같아요. 유년기엔 무한히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만 중년이 되면 지금 가는 길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전력이 요구되고 곁눈질은 호사가 되죠”라는 대사였습니다.
정말 소설이 그렇습니다. 쓰기 시작할 땐 무한한 가능성이 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인물들이 정해진 길을 가듯 자연스럽게 이어지죠. 작가가 곁눈질할 새가 없이요.
제가 연재하는 용사 소설도… 맨 처음 시작할 땐 아무 생각이 없었습니다. 설정도 없고. 주인공은 지금보다도 압도적인 먼치킨이 되어서 마왕과 1대1로 마주했을수도 있고, 마왕은 멀쩡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정상인이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쓰다보니 어느 순간부터인가 인물들은 제 손을 벗어나, 마치 정해진 길을 가듯이 자연스럽게 내용이 이어졌습니다. 참 이상하죠?
-작가와 독자의 관계
작가는 독자에게 제2의 창작자가 되라고 강요합니다.
그리고 독자는 강요받은 줄도 모르고 제2의 작가가 되며, 그러할 ‘의무’가 있습니다.
다시, 그런 ‘제2의 작가’들로 인해 작가는 독자가 됩니다.
“가? 가다니. 글이 어디로… 독자? 독자한테 간다고?”
“예.”
“설마 지금 독자들이…?”
사란디테도 말합니다.
“나는 글을 세상에서 말살할 수 있다. 글쓴이는 그걸 태울 수 있다. 작가가 글의 주인이다. 아니요, 작가는 글의 주인이 아니에요.“
여기서 저는 미하엘 엔데의 [끝없는 이야기 Never ending story]를 떠올렸습니다. ‘독자’였던 바스티안이, 새로운 이름을 지어줄 인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소멸될 위기에 처한 소설 속 환상세계에 들어갔다가, 자신을 찾아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이야기.
뭐 어찌보면 소위 ‘빙의물’의 전신으로 보일수도 있지만, 그저 책 바깥의 ‘독자’라 생각했던 ‘주.인.공’이, 사실은 그 책 속 소설,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
그리고 이쯤에서 다시 생각을 했습니다.
혹시 현대에 들어서, 책이라는 걸 읽는 건… 아니 소설이라는 걸 읽는 건… 혹시… 혹시… (자칭타칭) 작가들 뿐 아닐까?
독자이자 작가, 작가이가 독자, 그들만 남은 건 아닐까?
아니 처음부터, 순수한 독자라는 것은… 존재할까?
-글이 작가를 움직이다
그리고 더스번 경의 입을 빌어 이어지는 이영도 작가님의 자화자찬(이라 생각했습니다). ㅎㅎㅎㅎㅎ
“아무나 독자를 위해 죽은 작가의 시체를 움직일 수 있는 글을 생각해내진 못하겠지.”
이영도 작가님이 어떤 사건, 어떤 이벤트, 어떤 영감을 받고 그런 생각을 떠올렸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가끔 그런 자들이 있더라고.”
그렇더라구요…
아주 약간이지만, 저도 아주 이상한 방법(?)으로, 글 주제를 떠올리게 된 그런… 경험이 있어서… 아주아주 조금은 짐작이 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아마도, 이영도 작가님이 진짜로 설명하고 싶었던 건 바로 그 전 대사가 아닐까 합니다.
“설마 글이 자기 자신을 생각해낸거요? 그건 이상한데.”
이상하지만, 그랬습니다.
…최소한 저는.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글이 자기 자신을 생각해 내서, 저를 움직여서, 자신을 ‘쓰게’ 한 것 같은 그런 경험.
(그렇지 않고서야 추석연휴에, 다른 놀거리 다 제쳐두고, 갑자기 자다봉창 두드리듯이 90화에 육박하는 장편 소설을 쉬지 않고 냅다 쓰고 눈에 실핏줄이 터지는 일이 생길 수가… )다만 그 글이 선택한 작가가 참 별볼일 없는 실력을 가졌다는 문제가 있었지만요…
그래서… 제 추측으로는, 이영도 작가님도 사실은 그런 경험을 하고 이 소설을 썼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좀 이상한데…’ 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어서 ‘어쨌든 어스탐 경이 글을 생각해 냈습니다’ 라고 덧붙인 게 아닐까…
-검열(편집)과 도서관의 역할
도서관은 작가의 종착지가 아니라, 작가와 독자를 연결하는 심부름꾼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거대하고 권위 있는 도서관이라도, 작가의 최종 목적지는 언제나 독자이니까요.
“당신들은 가끔 그런 태도를 보여요. 작가와 도서관 사이엔 아무도 없다는 식으로.”
“도서관은 천년만년 이어질 작가 최후의 목적지가 아니라 미래의 독자와 작가가 함께 이용하는 심부름꾼일 뿐이에요. 작가의 최종 목적지는 언제나 독자니까.”
“바로 그거. 검열에 대해 너무 신경 쓰다 보니 작가와 자기들 사이에 누가 들어서는 걸 너무 싫어하고, 그러다 보니 자기들이 작가의 목적지라고 착각해요. 혼란을 일으킬 수 있죠. 작가가 죽은 후에도 그 작품은 당신들이 천년만년 지켜주니까. 그러다 보니 도서관이, 당신들의 서가가, 당신들의 수장고가 작가의 최종 목적지인 양 오해할 수 있죠. 당신들 대단한 도서관들은 특히 그럴 소지가 많다는 거 이해는 해요. 무서운 자들로부터 책을 지켜야 하니까. 자기들이 작가가 도달해야 하는 최후의 성채 같은 거라고 생각할 수 있겠죠.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당신들도 저나 저기 서 계신 분들과 똑같이 두 사람의 사용인이에요.”
“두 사람의 사용인?”
“작가와 독자.”
이 대사는 단순히 소설 속 도서관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작가와 도서관 사이엔 아무도 없다”는 태도는 현실에서도 자주 보입니다. 출판사, 비평가, 문학상 심사위원, 각종 문화기관들… 작가와 독자 사이에 끼어들어 자신들이 문학의 수호자이자 최종 판단자인 양 행동하는 이들 말이죠.
검열에 대해 신경 쓰고, 좋은 작품을 선별하고, 문학의 가치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작가와 독자 사이에 서지만, 결국 그들도 “두 사람의 사용인” 중 하나일 뿐입니다.
작가는 독자를 위해 씁니다. 독자는 작가의 글을 읽습니다. 그 사이의 모든 것들—출판사든, 도서관이든, 비평가든—은 이 둘을 연결하는 매개자일 뿐이죠.
매개자가 자신을 목적지로 착각하는 순간, 본질이 왜곡됩니다.
작가님은 작가가 쓴 글이 진짜 도달해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명확히 짚어주고 있습니다. 작가의 글이 최종적으로 닿아야 할 곳은 화려한 서가도, 권위 있는 기관도 아닌, 바로 독자의 마음이라는 것을요. 내 글을 읽어줄 사람이 단 한명만 있더라도, 작가는 글을 씁니다.
-어스탐의 진실
“어스탐 경은 그랬다는 거예요. 어른들의 칭찬을 받고 싶어서 장기 자랑을 하는 아이와 같죠. 그게 재미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건 어른들의 칭찬이죠. 사람들이 좋아할 글을 쓰면 사람들이 자기도 좋아해 줄 거라 생각했던 거죠. 그러니 자기한테 비난이 올 것 같은 글이라면 바로 없애버릴 수 있는 거예요. 애초에 글이 목적이 아니라는 거죠.”
“보통 사람들은 그게 심각한 문제가 될 일은 별로 없어요. 아마 ‘야, 야! 너 그 재주 좀 부려봐라. 저것 봐! 내가 뭐랬어. 볼만하다고 했지?’ 같은 꼴을 당하는 것 정도겠죠. 그럴 때도 기분이 좀 나쁠 수는 있겠지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진 않겠죠.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 자기가 아니라 자기 재주라는 것을 갑자기 깨닫게 되더라도.”
이 두 대사는 어째 저 같은 사람에게 하는 말 같기도 합니다(찔림).
맞아요. 사람들이 좋아할 글을 쓰면 사람들이 나도 좋아해 줄 거라 생각했습니다. 사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하. 관심 좀, 제발 내 글 말고 나에게 관심 좀! 덧글! 좋아요!(…)
하지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걸요…
“그라이만 대중의 사랑을 한몸에 받은 건 어스탐 경의 글이에요. 어스탐 경이 아니고. 글을 쓰고 싶어서 글을 쓴 것이 아니라 사람한테 관심받고 싶어서 글을 쓴 사람에게 그게 무슨 의미일까요. 잘못된 방법을 고른 거였어요. 그런다고 사람들이 그를 좋아해 주진 않아요. 글이 아닌 그는 못나고 성질 고약하고 피붙이도 싫어하는 사람일 뿐이니까.”
네 맞아요. 그럴거였다면 글 말고 다른 걸 했었어야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 적은대로, 그 글은 내가 쓴 게 아니라 글이 나를 움직여서 쓴 것이기 때문에… 못 없앨 것 같긴 합니다.;;
그리고 이 소설의 진짜 범인은, 맨 처음부분을 읽었을 때부터 이 사람이 아닐까, 했던, 그 사람이 맞았습니다…
“도망은 못 치겠네요. 할 수 없죠. 예. 여기에 범인은 없어요. 있는 건 네 명의 용의자죠. 어스탐 경이 자기를 죽일 이유가 있다고 말한 네 사람. 그러니까 어스탐 경이 보기에 어스탐 로우는 네 사람에게 있어 죽일 놈인 거죠. 날 죽인 놈이 누군지 쓰는 다른 임사전언들과 달리 어스탐 경의 임사전언은 난 어찌하여 죽일 놈인가를 쓰고 있죠.”
아무튼 4년에 걸친 어스탐 경의 반성문, 사과문.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그냥 이 소설을 읽으면 될 것 같습니다.
ps. 마지막으로 생각했습니다. 15만원짜리 리뷰는 대체 어때야 하는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