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목소리가 너를 불러도 절대 대답하지 마라 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불청객 (작가: 이시우, 작품정보)
리뷰어: Ello, 17년 8월, 조회 104

1.

자유게시판에서 이 작품을 소개한 적이 있죠. 집 안에서 아는 목소리가 저를 부르면 대답을 하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하고 있다고요. 저는 이 작품이 리뷰공모로 올라왔을 때 읽어봤습니다. 누군가 뒷덜미를 잡아채는 느낌, 길게 땋은 머리를 훅 잡아당기는 느낌, 오소소 소름이 돋는 느낌이 들어서 한동안 밤의 창문에 가까이 가지 못했어요.

머리를 감다 천장을 쳐다보면 아홉 귀신이 내려다 보고 있다는 속담(기억엔 이런데 지금은 검색을 하기도 무서워서 확실하지 않습니다.)이나 화장실 문은 꼭 닫고 자라던 도시괴담이 생각나기도 했고요.

집 안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는 익숙한 목소리라니, 그것도 제 이름이라니. 다짐을 하자니 자꾸 생각이 났고, 그러다보니 작품을 꾸준히 떠올려보게 됐습니다. 결국 도화선이 된 시를 하나 찾게 되서 이렇게 벌써 리뷰가 3편이나 있는 작품에 다시 리뷰 한 편을 보태게 되네요.

 

2

도화선이 된 시는 오은 시인의 시입니다. 제목은 매우 잘 어울리게도 <공포>네요.

<공포>

 

밤에 손톱을 깎으면 안 된단다

귀신이 해코지를 할 거야

 

밤에 별이 깜빡거리면 강풍이 분단다

유혹하는 것들은 다 위험하지

 

밤하늘이 유독 맑으면 된서리가 내린단다

정수리에 힘을 주고 또박또박 걸어야 해

 

할머니의 비밀은 모두 밤에 있었다

 

밤에 어둔 길을 혼자 가면 안 된다

뒤통수는 항시 조심해야 해

 

낮은 흘러가는 것

밤은 다가오는 것

 

낮은 불발의 연속이었다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밤은 장전되어 있었다

닥쳐오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리 없는 공포탄이

사방에서

폭죽처럼 터지고 있었다

 

밤에는 작게 이야기해야 한단다

밤말을 들은 쥐가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몰라

 

비밀들이 아우성치며

베갯속 사이를 앞다투어 메우고 있었다

                                                           『유에서 유』, 문학과지성사

 

적으며 다시보니 정치적 상황과도 얽혀있는 것 같습니다만 일차원적으로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할머니의 이야기에는 어떤 힘이 있습니다. 하지 말라는 것만 많고 하라는 건 없지만요. 밤에 손톱 깎지 말아라, 밤에 휘파람 불지 말아라, 낮거미는 살리고 밤거미는 죽여라 등등등.

미신이라고들 하지만 그 분들이 지켜온 절대적인 삶의 기준이기에 저는 가능한 한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지키려 노력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주인공도 대답하지 않길 참 잘했어요, 하고 일단 칭찬부터 해주고 싶습니다.

 

3.

저는 할머니와 오래 같이 살았었고, 외할머니나 외할아버지와도 친밀하게 지내왔기 때문에 주인공에게 몰입이 더 쉬웠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고등학생이 되는 남학생에게 산골마을과 치매노인과 울며보채는 여동생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억눌린 감정을 다스려줄 해방구는 게임기 뿐이고, 그 유일한 해방구로 나갈 수 없게 만드는 상황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니까 더이상 달아날 곳이 없는 상태로 주인공의 발을 묶어놓고 시작합니다.

게다가 상징적인 탈출구가 아닌 진짜 문을 가로막고, 그 다음 대안인 창문도 가로막고요. 게임 속의 가상 세계에서 빠져나오면서 부터 현실 세계에 갇히는 것까지 점점 주인공에게 한 발 한 발 디딜 곳을 줄여가며 다가오는 상황들이 숨이 막힙니다. 밖에선 예의없는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고, 윽박지르고. 치매이신 할머니가 갑작스럽게 정신을 차리고 욕을 해대고, 동생은 울음을 터뜨리고 달려옵니다. 이제 할머니와 동생과 문 밖에 누군가와의 사이에 서 있어야 하는데 설상가상으로 창 밖에 누군가와도 싸워야 하고, 정전은 됐고, 핸드폰의 베터리도 나가버립니다.

보통 한 쪽 구석으로 몰리는 호러물을 봐왔는데 이 작품에선 신기하게도 집 안의 중심 쪽으로 몰리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더 섬짓했습니다. 내 몸을 숨길 공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등을 댈 벽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온통 드러내놓고 있어야 해서 심리적으로 더 위축이 됐어요. 사방이 다 적이라니…. 게다가 절정에 이르러서는 할머니와 동생 중에 선택을 하라고 강요당합니다.

할머니냐 동생이냐 아니면 나냐. 한 쪽으로 몰리고 몰리다 주어진 선택권치고는 참 야박합니다. 그 옴싹달싹할 수 없는 상황에서라면 누구든 선택 할 법도 한데 주인공은 그렇지 않았죠. 아무도 선택하지 않겠다고 버티기에 들어갑니다. 주인공이 버틸 수 있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장에 나갔던 엄마 아빠라는 든든한 ‘어른’이 있었던 거죠.

하지만 집 안의 중심에 선 주인공도 누군가를 책임지고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어른’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겠죠.

특히나

“.. 아무도 없으니 내가 이 집 어른이야. 나 당신 들여 놓은 적 없어.. 당신은 이 집에 있을 자격 없어!!”

라고 외칠 때 저는 주인공을 이제 조금만 있으면 고등학생이 되는 중학생으로 볼 수 없었습니다. 제가 다 용기를 얻는 기분이었거든요.

이 말을 외치고 조금이라도 수그러든 기색이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그 놈의 “어른”에게 “말대답” “따박따박”이라는 단어 밖에 쓸 줄 모르는 귀신인지 사람인지 정체모를 무언가 (주인공의 저 대사 이후로 좀 덜 무서워졌습니다. 아니 덜 무섭다기 보다 짜증이 앞섰다고 해야할까요. 정말 할 줄 아는 말은 저것 밖에 없는 것 같네요.)가 그 기세에 눌려, 합당한 말에 눌려 한 발자국씩이라도 물러났으면 했습니다. 주인공의 소리가 닿는 곳, 이제는 부적 같아진 주인공의 말이 할머니와 동생을 지켜낼 수 있길 힘껏 응원했습니다.

 

4.

예로부터 정착생활을 하고 가족공동체를 꾸리던 우리 전통의 주거문화를 생각해보면 ‘집’이란 것은 안녕과 번영을 담보 할 수 있는 소우주적 영역이었습니다. 그런 영역화를 공고히 하기 위해 가시적이건 비가시적이건 어떤 문화적 장치들을 내제해 왔지요.

세시풍속을 예로 들어보면 음력 정월 보름이면 집안에 액운을 떨쳐버리고 경사로움을 맞이하기 위해 지신밟기를 하고, 부잣집의 재운을 끌어들이기 위해 복토를 훔치기도 했고요. 간단하게는 정월에 복조리를 거는 것도 해당이 되겠네요.

반대로 집 밖에 대한 원형적인 공포도 곳곳에 숨어있고요.

제게 이 작품이 매력적으로 다가 온 것은 이런 ‘집’에 대한 사상이나 할머니로 대변되는 조상들의 지혜가 간간히 엿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말이죠.

그렇다면 집 안의 가장, 지금은 학생이 되겠죠. 가주의 허락도 없었는데 어떻게 그 괴이한 것들은 집으로 들어 올 수 있었을까요?

지금까지 작품 내에서 주장하던 것과 얘기가 다르지 않은가요. 라고 물음을 던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납득을 잘하죠. 아마 이런 것이 아닐까요.

그렇게 집은 소우주적 영역이고, 집 안에 있다면 모든 것이 안정된 상태이고, 이런 집은 수호자(가주)가 있죠. 그 가주의 허락도 없이 들어 올 수 있었던 것은 할머니의 ‘치매’가 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할머니의 몸을 하나의 ‘집’으로 생각했을 때, 할머니의 집을 지키는 ‘수호자’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인거죠. 눈을 보면 그 사람의 기운을 알 수 있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눈매가 총명하다거나 썩은 동태 눈 같다거나 하면서요. 눈을 마주쳤다는 말을 계속 강조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눈’이 문의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동생도 주인공도 ‘눈’을 마주쳤지만 괜찮았습니다. 주인공은 가주라 괜찮다 쳐도 동생만이 가주의 보호 하에 있는 것이 아니었는데 할머니만 괜찮지 않았던 이유는 음, 눈을 통해 정신이 없는 몸을 차지 할 수 있었던게 아닐까요. 빙의가 너무도 쉽게 성공했네요.

 

5.

이계의 왕을 무찌르다 멈추고, 사건이 일어나고, 결국 할머니의 장례를 치루고 난 후에 이계의 왕을 무찌릅니다.

하지만 과연 이계의 왕을 ‘무찌른’ 걸까요. 이계의 왕이 만족해하며 스스로 물러나 준 것은 아닌지 잘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저는 아직도 할머니가 협상 끝에 가야하지 않아도 될 길을 앞서서 가셨다는 여운을 주는 끝마무리가 만족스럽지는 않습니다. 할머니는 항상 무서운 이야기로 겁을 주시고 우는 주인공을 달래며 ‘거짓된 것에 마음을 내주고, 허락하고, 사로잡히지 않는다면’ 괜찮다고 했던 할머니를 기억합니다. 할머니가 비록 치매로 정신이 없고 그런 몸에 헛된 것이 씌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제 괜찮다.’ 고 했던 할머니는 온전한 정신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할머니의 주술과도 같던 거짓말이다, 괜찮다는 이야기의 결말이 사실은 거짓말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의 씨앗을 심어주고 맙니다.

할머니가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꼿꼿하게 할머니로서 돌아가실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텐데요.

조상신처럼 어린 남매를 지켜주는 것까진 좋았는데 ‘대신 내가 가지.’ 가 아니라 ‘여긴 얼씬도 하지 말아라!’ 라며 내쫒는 결말이었다면 어땠을까 곱씹어보게 됩니다.

 

이런 저런 감상에도 불구하고 참 좋은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인상 깊게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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