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비평

대상작품: 죽음의 천사와 오렌지 사탕 (작가: 초월, 작품정보)
리뷰어: BornWriter, 17년 8월, 조회 201

매우매우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매우매우 스포일러 함유합니다.

매우매우 매우매우 매우합니다(?)

 

나는 예수교의 교리와는 인연이 없다. 문화상품권을 줄 테니 교회에 나오라던 아저씨들의 권유도 귀담지 않았고, 법당에서 주는 간식이 훨씬 좋았기에 군대에서도 나는 부처님 말씀만 들었다. 나는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몇 안 되는 성경 무식자 중에 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나같은 사람조차도 이 이야기는 알고 있다.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라는 이야기를 말이다. 이 명대사 한 줄이 시사하는 바는 지극히 간단하다. 모두에게는 저마다의 죄가 있다는 것이다(다만, 예수교에서는 이것을 원죄의 증명으로 사용된다고 한다).

그렇지만 명제의 단순함이 명제의 참거짓을 나누어주는 것은 아니다. 나는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조금 우스운 기분이 든다. 결국 너 역시 죄가 있는 까닭에 타인의 죄를 묻지 말라는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우리는 무단횡단을 하였기 때문에 유영철과 강호순의 극악무도한 범죄를 묻지 못한다는 말인가? 만약 그런 것이라면 어처구니가 없는 일일 터다. 물론 성경은 2000년 전의 고대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성경이 우습다는 게 아니다. 나는 그저 요즘 시대에 성경의 말을 가져와서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우스울 뿐이지.

그런데 우리는 살다보면 이런 류의 논지를 펼치는 사람들을 꽤 많이 만나볼 수 있다. 가령 “군대도 안 다녀온 새끼가 군대에 대해 뭘 안다고 떠들고 난리야” 같은 이야기 말이다. 이 논지가 옳다면 대통령은 국군의 통수권자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국군 통수권자는 밀덕에게 맡기자는 이야기 밖에 되지 않는다. 혹은 이런 예시를 들 수도 있겠다. “네가 살면 얼마나 살아봤다고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냐.” 이 논지가 옳다면 나이순으로 정렬해서 나이가 많은 사람부터 대통령 국무총리 등 고위직을 주는 게 맞겠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반박할 때 흔히 사용하는 예시가 하나 있다. 나는 이것을 “로버트 파커 포인트의 신뢰성”이라고 부른다. 로버트 파커는 미국의 와인 평론가이다. 그는 자신이 마신 와인을 평론할 때, 와인에 점수를 부여하곤 한다. 이것을 로버트 파커 포인트라고 한다. 어떤 와인은 80점을 받고, 어떤 와인을 100점을 받는다. 100점을 받은 와인은 높은 가격에 팔려나가기도 한다. 와인 애호가들은 로버트 파커가 매긴 점수를 신뢰하고 마셔본 적 없는 와인에 거금을 들이붓는다.

자, 그렇다면 로버트 파커는 어떻게 와인 애호가들에게서 신뢰를 받는 걸까. (참고로 나는 잘 모르겠다. 100점 받은 와인을 먹어볼 수가 있어야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로버트 파커가 유명 와이너리의 와인 메이커들보다도 와인을 잘 만드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와인의 맛과 향과 가치를 평가하는 데에 ‘와인을 잘 만드는 것’은 중요치 않은 것이다. 로버트 파커에게 평가절하당한 와인의 메이커가 찾아와서 ‘나보다 와인도 못 만드는 놈이 와인의 좋고 나쁨을 논해?’라고 따지는 것은 매우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멍청한 짓이다. 군대를 다녀왔다고 군대를 잘 알게 되는 것은 아니고, 오래 살았다고 더 현명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쓸데없는 이야기가 길었다. 아니, 사실 쓸데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내가 이 작품을 감상하면서 느꼈던 생각이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천계의 문이 열리며 일어나는 사건과 그 사건을 지켜보는 천계의 병사 ‘로애’가 느끼는 감정선에 무게를 두고 있다. 천계는 타락한 인간계를 정화하고자 인간들을 (빗자루 말고 무기로다가) 쓸어버리고, 인간들은 압도적인 전투력의 차이에 맥 없이 쓸려버린다. 지휘관으로 보이는 천사는 악한 것을 없애는 것에 방점을 찍으며 병사들을 북돋아준다. 그들이 행하는 살육은 악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천계의 병사 ‘로애’가 느끼는 것은 다르다. 로애는 살육의 이유를 찾지 못해서 혼란스러워하고, 또 슬퍼한다.

찬찬히 읽고 있노라면 천계의 지휘관은 냉혹하고 냉엄하며 일을 처리함에 있어 거침이 없다. 사람을 쓸어가는 데에 죄의식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를 악하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그는 그만의 정의로 행동하고, 로애는 로애만의 정의로 행동한다. 여기서 누가 나쁜 놈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모호한 영역으로 몸을 날리는 것과 같다. 가령 6∙25 이후로 북한군을 총으로 쏴 죽인 남한의 병사를 살인자라 부를 수 있을 것인가. 사람을 죽인 것은 맞지만, 그를 살인자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다른 종류의 이야기이다. 요컨데 맥락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이 작품의 맥락은 매우 거칠기 그지없다. 작가는 천계의 군대로 하여금 ‘인간이 타락하였기에 쓸어버린다’는 설정을 부여하였다. 헌데 인간이 어떠한 일을 저질렀기에 천계가 이들을 타락했다고 주장하는 것인지 독자는 알기 어렵다. 그에 대한 작가의 부연설명은 ‘혼돈으로 타락하였다’ 인데, 여기서 지칭하는 혼돈이 무엇인지 독자는 알 수 없다. 이공계의 멍청이인 나는 인간계가 열역학 제2법칙으로 인해 타락했다는 건가 싶었다(물론 열역학 제2법칙, 그러니까 엔트로피 관련 이야기가 인간을 타락시키는 방법은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혹은 도중에 흘러가는 말로 인간세상은 힘으로 정돈되는 짐승의 세계라는 식의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타락했다고 하는 걸까. 그렇지만 그것을 ‘타락’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가 싶다.

반대로 로애의 감정선에 대해서는 보다 디테일하게 묘사해나간다. 다들 승리에 취해있을때 홀로 죽은 인간의 사체를 묻어주고, 다들 인간 딱지 떼고 천계의 존재가 되고 싶다고 이야기하는데, 혼자 인간을 죽이는 것의 끔찍함을 토로한다. 인간 꼬마가 달라붙었을 때도 혼자만 친근하게 대한다. 이런 것을 작가가 의도하였는지 그렇지 않았는지와는 상관없이 독자로 하여금 확증편향을 유도한다. 독자는 무의식적으로 로애가 옳고 천계가 그르다는 식의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이다.

만약 인간의 타락에 대한 묘사가 충분하여 독자가 보기에 천계가 인간을 쓸어버리는 것이 매우 납득가능했다면, 로애에 대한 독자의 평가는 아마 지금과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나는 작가가 이렇게 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 옳다고 보지 않는다. 세상에 완벽한 악이 없다고는 말 할 수 없지만, 모든 등장인물들에게 저마다의 변론 기회는 주어저야 하는 것이다. 6∙25 전쟁 발발 이후 북한군을 총으로 쏴 죽인 남한의 병사를 살인자라고 부르는 대신 우리는 그들을 국가유공자라고 부른다. 이것은 그들이 저지른 살인의 맥락을 우리가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천계와 천계의 지휘관에게도 이러한 변론의 기회가 주어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 예수께서 또다시 성전에 나타나셨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들 앞에 앉아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그 때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자 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앞에 내세우고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우리의 모세 법에는 이런 죄를 범한 여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하였는데 선생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예수께 올가미를 씌워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이런 말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고 계셨다. 그들이 하도 대답을 재촉하므로 예수께서는 고개를 드시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계속해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셨다.

 

나는 이 일화를 들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혹시 여인이 저지른 간음에는 나름의 사정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예수가 그 맥락을 알고 죄를 묻지 않았던 것 아닐까. 대통령에게 국군 통수권을 주는 것도 그가 ‘군에 정통’하기 때문이 아니라, 군대가 국민의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어떠한 일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건을 관통하는 ‘맥락’인 것이다. 작가는 독자에게 일방적인 맥락만을 전하여서는 안 된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독자를 기만하는 행위라고도 볼 수 있다. 작중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신경쓰지 않고 작가가 옳고 그름을 정하여 독자에게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디 독자에게도 이러한 판단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이야기의 맥락을 들려주었으면 한다.

 

 

 

+ 이 글에는 여러 눈에 띄는 오류가 많다. 그 중 몇 개만 가져와 추가적으로 이야기해보려 한다. 먼저 17번 문단이다.

제일 앞에 있던 로엘의 머리에 경비병은 매직 건의 포구를 들이댔다. 그러나 로앨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동일한 문단 안에서 로엘은 로엘이 되었다가도 로앨이 되기도 한다. 캐릭터의 호칭을 실수하는 것은 꽤 크리티컬한 일이다. 심한 경우 독자가 이것을 동일 인물로 보지 않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20번 문단이다.

잠시 후, 아직 숙녀가 덜 된 여자가 로엘과 경비병 사이로 들어왔다. 로엘은 자신의 은발머리를 살짝 털었다. 그리고 이솔만 남기고 모든 부대원들과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죽음의 천사들은 들어오자마자 마을 곳곳으로 흩어졌다.

이솔만 남긴 채 모든 천사들이 마을로 들어간다. 이 때 경비병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만약 경비병들이 마을로 들어가는 천사를 저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면, 어찌하여 그러하였는지 그 까닭을 바로 적어야 한다. 가령 ‘천사들이 유체 상태가 되어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는 식으로 말이다. 또한 중간에 로엘이 자신의 은발 머리를 살짝 털었다는 묘사가 나오는데, 이것이 본문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냥 은발 머리를 털었으니까 털었다는 사실을 묘사한 것인지, 아니면 은발 머리를 턴 것이 마을로 잠입해 들어가기 전에 행하는 의식인지, 혹은 은발 머리를 털어서 몸이 투명해져서 경비들이 막지 못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일단 묘사 된 것에서만 해석하자면, 천사들이 마을로 들어가 종횡무진하는데도 경비병이라는 작자들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정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매우 비현실적인 묘사라고 할 수 있겠다. 디테일은 매우 세세한 곳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아셨으면 한다.

 

23번 문단은 이러하다

가소롭다는 듯 경비원 두 명은 콧방귀를 뀌었다. 이솔은 그들의 비아냥거림을 기다려주지 않고 바로 한 명의 얼굴을 주먹으로 가격했다. 그가 단번에 쓰러지면서 입에서 나온 피가 이솔의 입에 튀어버렸다. 놀란 다른 경비병은 그녀에게 매직 건을 쏘았다. 포구 안에서 에너지 탄이 튕겨나갔다. 그러자 이솔은 전신을 금속으로 변형시켜 막아냈다. 경비병 두 명은 자신들보다 강한 힘 앞에서 두려움에 떨었다.

우선 경비원 두 명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콧방귀를 뀐다. 이솔이 그들의 비아냥거림을 기다려주지 않고 바로 주먹을 휘둘렀다고 묘사했지만, 콧방귀는 비아냥의 일종이라고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 그렇다면 비아냥 거리는 도중에 때린 거 아닌가 싶다.

세 번째 문장은 순서를 뒤집어 반으로 쪼개는 편이 어땠을까 한다. 이솔이 한 명의 얼굴을 주먹으로 가격했다. 찢어진 입술에서 피가 튀어 이솔의 입가에 묻었다. 경비원은 얼굴을 부여잡으며 바닥을 굴렀다. 같은 식으로 말이다.

이솔은 전신을 금속으로 변형시켜 매직 건을 막아낸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금속으로 변해 쇠주먹을 휘두르는 편이 더 편하지 않았을까. 아니 그보다 경비병들은 침입자가 발생했는데 비상벨도 안 누르고 뭐하는 건지 모르겠다. 두려움에 떨기 전에 비상벨을 눌렀다면 번개조 진압봉을 들고 누군가 나타나주지 않았을까(군대 이야기다).

 

이런 식으로 시시콜콜 건드리면 끝도 없다. 그렇지만 하나 더 말씀드리자면 ‘캐릭터들의 이름’에 조금 더 신경을 쓰시는 편이 어떨까 한다. 지금 작가 분이 캐릭터의 이름에 신경을 전혀 쓰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캐릭터들의 이름은 비슷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로엘과 로애가 분명 다른 사람인데, 이름은 너무 비슷하다. 작가가 캐릭터의 이름에 오타를 낸 전적이 있기에 이런 비슷한 이름은 ‘또 다른 오타인가’하고 생각하기 쉽다. 이런 점에 주의를 기울여주셨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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