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를 쓸 때 보통은 작가에게 피드백을 제공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하나는 제가 비평가가 ‘아니’라는 자각 때문입니다. 비평가는 내려다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전 그냥 글쟁이잖아요. 옆사람이라구요. 옆사람이 내려다보면 그냥 깔보는 것밖엔 되지 않습니다.
피드백이 필요해 보이는 부분이 있을 때에는, 최대한 좋았던 점이나 앞으로 더 살아났으면 좋았을 지점들을 잡으려 노력합니다. ‘다음 번엔 더 잘 하실 거에요.’ 기분 좋잖아요. 굳이 왜 ‘동료 작가’끼리 기분을 상하는 말을 해야 하나요.
그런데 가끔 ‘기분 상해도 좋으니까 피드백 대차게 해 주세요.’하는 신청 … … . 아니, 가끔이 아니라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래서 어느 지점을 이야기해줘야 할 지 잘 모르겠군요.
일단은, 이 글의 감‘평’을 요구하신 동백차님을 포함, 이 글의 내용을 안다는 전제 하에 피드백을 제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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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친구와 이야기 할 때 문체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무협은 대다수가 중국어 서술자인 김용을 번역한 문체를 사용한다. 이 때문에 무협의 문장에는 다른 장르와 구분되는 독자적인 개성이 드러난다.’
언어는 접변합니다. 근대기의 한국 문학을 보면 알 수 있지요. 김기림은 프랑스 보들레르를 본 게 티가 나고, 백석은 예이츠의 민속적인 시를 참조한 게 티가 납니다. 정지용은 워즈워스를 일본 유학을 통해서 배웠고, 이상은 진짜 어디서 배워온 건지 (사실 프랑스 건너 일본 건너 왔겠죠.) 지 혼자 다다이즘적인 시를 쓰고 앉아있습니다.
꼭 언어와 언어 간의 장벽에서 접변이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비디오 게임을 많이 한 사람은 비디오 게임 연출스럽고, 만화를 많이 본 사람은 만화 연출스럽습니다.
네. 장르는 장르에 맞는 문체를 가집니다. 미국식 탐정 소설의 ‘하드보일드’한 향취나 헤밍웨이나 부코스키의 ‘하드보일드’ 향취는 그 기원에 상관이 없는데도 서로 얽혀서 활용되기 일쑤입니다.
판타지요? 판타지도 문체를 많이 탑니다. 어슐러 K. 르 귄 선생님 말이었나, 다른 장르와 달리 판타지는 ‘환상’에 대해 기술하기 때문에 문체는 독자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감각으로서 환상을 받아들이는 수단이 됩니다.
그래요. 문체는 중요합니다. 이 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일단 ‘웹소설’보다는 ‘일반 소설’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웹소설의 경우 일반적인 문체와 다른 리터러시를 요구하기 때문에, 이런 해묵은 문체 이야기 따위 필요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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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저는 왜 이 작품에서 문체가 문제라 느꼈을까요. 문체는 글맛의 문제라, 읽는 맛이 나야 하는데 이 작품의 문체는 굉장히 평탄합니다. ‘작은 따옴표’는 생각이고, “큰 따옴표”는 대화입니다. 효과음마다 개행이 되어 있습니다.
평이합니다. 읽는 데 큰 문제는 없습니다. 하지만 독자를 끌어당기는 포인트가 없습니다. 호흡 문제라고 해야 할까요? 일방적으로 감정과 상황을 설명하고 있을 뿐, 독자에게 ‘말’을 걸고 있지 않습니다. 작품은 독자로 하여금 특수한 경험을 하게 해 주어야 하는데, 그 경험에 초대받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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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문체는 표면이기에, 내부적인 문제가 해결된다면 곧바로 해결할 수 있는 간단한 문제입니다. 문장력 따위야 필사든 퇴고든 많이 하면 기를 수 있으니까요. 중요한 건 따로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에 앞서 액션에 대해 이야기해봅시다. 이 작품은 액션이 중요하며, 액션을 연습할 목적으로 쓰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 물어봅시다. 액션은 상당히 동적이고 정확해야 합니다. 영화에서조차 합, 흐름, 카메라가 안 맞으면 ‘이딴거 왜 찍었냐’ 하고 극장을 나서게 만드는 게 액션입니다. 합, 흐름, 카메라를 기억하세요. 셋 중 둘은 맞아야 합니다. 하나 정도는 실수해도 잡기술로 커버가 되지만, 둘이나 안 맞으면 없느니만 못하단 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세 가지 요소를 활용해서 동적으로 찍은 장면이 액션 장면인데, 어떻게 해야 ‘소설’에서 ‘역동감’을 표현할 수 있을까요?
본 작품은 최대한 ‘효과음’과 ‘은유적인 표현’(‘타이거의 나비와도 같은 유연한 회피’ 등)이나 ‘호칭’(화이트 타이거) 등을 멋지게 기술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앞서 말했듯 합과 흐름, 카메라입니다. 이는 균형과 템포, 그리고 시점입니다.
합에 대해서는 단순한 공격의 교차 정도로 서술해도 될 것 같습니다. 공격을 어떻게, 무엇으로, 정확하게 써내려가야 독자들은 그 내용을 히해할 수 있습니다. 마치 좌백 작가가 <들개이빨>에서 ‘자오원앙월’에 대해 서술하듯이요.
흐름은 길이입니다. 소설도 영화와 마찬가지로 시간의 길이를 조작적으로 수정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어떤 공격이 ‘아팠다’는 사실을 길게 서술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시간의 흐름의 조작은 이 공격의 ‘효과’가 얼마나 강했는지 서술한다고 봐도 무방한데, 단적으로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총알을 피하는 장면 있잖습니까. 거기서 슬로우 모션으로 360도 회전 카메라를 통해 네오의 ‘전능함’을 강조하기 때문에 굉장히 그 장면은 임팩트 있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시점입니다. 카메라는 어디에 위치하나요? 영화나 만화 같은 시각 매체에서는 카메라가 정말 물리적으로 위치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간단하게’ 액션 구도를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설은 활자 매체라, 특정한 시점을 작가가 잡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3인칭 시점이라거나, 1인칭으로 가서 내적 독백을 확실하게 밀고 나간다거나요. 그 점에서 시각 매체와 활자 매체의 액션씬 전략은 애초에 달라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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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션에 대한 첨언입니다만, 프롬 소프트웨어 사 게임들 (뭐 <다크 소울>이나 그런 ‘소울 라이크’ 류들)을 해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작품들은 전부 첫 보스와 최종보스전을 제외하면 대체로 기믹전입니다. 패턴을 파악하고, 지형지물을 활용하고, 특정한 전략을 취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대다수 ‘무공’이란 ‘상성빨’이나 ‘맵빨’을 탑니다. 이를테면 남권으로 유명한 ‘영춘권’은 체구가 작은 사람이 좁은 곳(배 위 등)에서 싸울 것을 전제로 형성되었습니다. 이에 반해 북권은 ‘창술’을 쓰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하죠. 일본의 ‘거합술’은 ‘칼을 뽑아 휘두를 만한 거리’를 확보할 수 있기에 존재하고, 이에 반해 동남아와 같이 정글이 우거진 곳은 무기의 길이가 끽해봐야 정글도 정도라고 합니다.
<일대종사>라는 영화에는 ‘인생은 수평과 수직’이라는 명언이 있습니다. 네, 무술이라는 건 좌표평면 위의 내뻗음입니다. 이 좌표평면은 물리적인 공간이니 물리적인 환경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정한 물리적인 공간을 가정하고, 두 사람의 무술(혹은 이능력이든)을 가정한 다음 한 사람이 이기는 순서를 만들 것. 이를 합과 흐름에 맞게 배치하고 카메라 놓을 곳을 정하는 게 액션의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필살기나 호칭을 짓는 건 천천히 생각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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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아직도 중요한 게 남아있습니다. 단적으로, 왜 저희가 타인의 할머니 이야기를 읽어야 하는 걸까요? 그걸 읽고 우리의 삶이 어떻게 바뀔 수 있을까요? 아니면, 충분히 읽을 정도로 재미가 있는 이야기인가요?
물론 이 작품이 ‘소일장’을 위해 쓰였다는 것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할 겁니다. 액션씬 연습 좀 할 수도 있지! (사실 그 점에서 피드백을 드리기가 꽤 껄끄러운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요컨대, 이 작품에서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지 잘 모르겠단 말입니다. 이를테면 ‘우리 할머니 멋지다.’(그러나 이 주제를 쓰려면 ‘왜 멋진 사람인가’라는 고찰이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같은 간단한 거라도 좋습니다.
사실 애초에 중요한 건 이 지점입니다. 일러스트 용어에는 ‘액팅’이라는 게 있습니다. 일러스트 안에서 그 캐릭터가 해당 표정이나 포즈를 취해야 할 당위를 일컫는 말인데, 결국 이 작품에서 ‘포인트’를 주고 싶은 건 무엇이었나요?
이 포인트에 따라서 작품의 방향성이 결정되고, 액션씬의 추구미가 결정되며 결국 문체마저 결정짓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 이 정도로 빡세게 쓰질 않아서, 여러모로 부족한 면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남기는 것을 좋아하는 분이라는 걸 알아서, 굳이 이런 식으로 장문 피드백을 써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