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경의 분신(焚身)을 기적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경은 스스로 분신한 것이 아니라 그가 아닌 누군가의 악마적인 악의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여깁니다. 그것이 선생을 도우려는 이유고요. 그것만으로는 부족한가요?”
(본문. 5-P71)
목차
1.『본격추리』에 대한 단상
2.『낭만선생 시리즈』로서의 인상
3.『사건』 분석
4.『동기』 분석
1.『본격 추리 소설』에 대한 단상
언제부터인가 특정 장르에 ‘본격(本格)’이라는 수식을 제시함으로서, 장르가 태동을 일던 시기의 뿌리와 그 자체의 재미를 찾기 위한 시도가 수도 없이 이뤄졌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흔히 판타지라는 장르에 ‘정통 판타지’라는 테두리를 제시함으로 판타지라는 장르가 본격적으로 정립되었던 시기를 재현하듯이, ‘추리’라는 장르에서도 ‘본격 추리’라는 이름을 제시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본격추리’라는 장르는 그 이름만큼 색채가 명확합니다. 표면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사건’을 제시하고, 그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탐정’을 제시합니다. 이런 구성은 과거 <셜록홈즈 시리즈>나 <포와로 시리즈>와 같은 ‘탐정이 사건을 해결 한다’는 흐름을 선명하게 오마주 하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시대가 흐르며 수많은 창작으로 변형되고 비틀어졌던 장르를, 우리가 가장 사랑했던 그 시절의 추리소설로 되돌리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사랑하는 ‘본격 추리’의 가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본격추리’의 핵심은 작가와 독자 간에 의도적으로 만들어지는 정보의 불균형에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작가는 모든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습니다. 반면에 독자들은 작품에 묘사되는 사건만을 표면적으로 받아들이며, 그조차도 작가에 의해 선별된 정보들만을 부분적으로 익히게 됩니다. 즉, 독자들은 작가가 내민 정보들만을 갖고 사건의 전말을 추측합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탐정’의 시선에 자신을 겹쳐보며 작가가 내민 문제의 답을 찾는 것이야말로, 이 ‘본격추리’를 사랑하게 되는 매력이라고 정의됩니다.
어쩌면 ‘본격추리’라는 단어로 특정 장르가 정의된다는 것은, 그만큼 요즘 시대에 들어 ‘본격’이라고 정의될 만큼 원초적인 장르적 구성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는 반증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 변화에 대해서는 수많은 아젠다(Agenda)들을 제시할 수 있겠지만, 그 변화에 물들지 않은 가장 선명한 장르의 색채를 찾아가는 시도가 꾸준하다는 것만은 달가운 사실입니다.
2.『낭만선생 시리즈』로서의 인상
<낭만선생 시리즈>는 마법사회의 유명한 학자 ‘낭만선생’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추리소설 시리즈입니다. 마법이라는 초현실적인 힘을 긍정하는 사회를 배경으로, 누가 봐도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사건을 오로지 ‘인간’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방식으로 눈길을 끌며, 사건의 진상 이상으로 배경과 인과에 대한 해석에 공을 들이는 구성이 매력적이었던 작품으로 소개할 수 있겠습니다.
‘Piggy’ 작가님의 <낭만선생 시리즈>와 만나는 것도 벌써 세 번째 작품이 되었습니다. 다만 이번에 읽은 <낭만 선생이 말하길, 사람에게 타오르는 것>은 그간 읽었던 작품들 중에서 다소 이질적이라는 인상이 있었습니다. 그 원인은 기존 작품들이 ‘본격추리’라는 장르와는 다소 결이 다른 추리극을 보여줬다는 것에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추리’라는 작품이 매력을 갖추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사건 그 자체의 구성입니다. 표면적으로 얼마나 사건이 기이한가와 더불어, 그 사건이 벌어지게 된 경위에 집중합니다. 흔히 ‘트릭’이라는 말로 정의되는 사건의 풀이과정에 흥미를 느끼는 것을 유도하며, 그 풀이과정을 유도해내기 위해 적제적소에 정보를 삽입하는 작가의 능력이 중요시됩니다.
둘째는 해당 사건을 겪는 인물입니다. 해당 사건을 일으킨 범인, 혹은 사건에 휘말린 피해자들을 조명하며, 그들이 이 사건에 휘말리게 된 인과를 상세하게 조명합니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에 대한 물음을 쉴 새 없이 던지며, 독자들이 인물 자체에 공감할 수 있는 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앞서 말했듯이, 기존 <낭만선생 시리즈>은 명확히 후자에 힘을 두고 있습니다. 사건 그 자체에서는 커다란 해석을 두지 않지만, 그 사건에 휘말려 있는 ‘인물’들을 조명하는 데에 많은 공을 들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해당 사건에 휘말린 피해자 및 가해자들의 심리적 상태와 불우한 과거를 수려한 필체로 묘사하며 몰입할 여지를 만들고, 마지막에 해당 사건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납득시키는 방식이야말로 <낭만선생 시리즈>의 색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지나치게 인물들에 집중하는 탓에 사건 자체는 인물들을 엮어주는 테두리 정도의 역할만을 하며, 표면적으로 기이해보였던 사건 또한 고착된 사고를 벗어난다는 간단한 방식을 제시하며 길을 만드는 것에 가깝습니다. 결국 소설을 다 읽었을 때, 독자들은 사건 자체보다는 직접 목소리를 들려줬던 인물들만 떠오르는 것이 보통입니다. 약점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 선택과 집중으로 작가가 보여주고픈 그림을 완성시켰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더 우선시하고 싶습니다. 이 선택과 집중이 이번 작품에서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후술하겠습니다.
<낭만 선생이 말하길, 사람에게 타오르는 것>은 앞서 말했던 인물에 대한 탐구에서 벗어나 ‘본격추리’라는 장르를 시도했다는 것에 큰 의의가 있습니다. 표면적으로 절대 일어날 수 없을 법한 사건이 등장하며, 그 사건을 해결하는 명탐정 ‘낭만선생’이 활약합니다. 그녀의 활약을 지켜보는 ‘재프리 선생’이라는 눈을 두는 것 또한 고전 추리극에서 보여주던 제3의 인물이라는 구성의 오마주이기도 합니다.
이번 리뷰에서는, 이 작품에서 ‘본격추리’라는 장르를 어떻게 재현했는지를 살펴보고, 사건과 인물 면에서 구성 정도를 살펴볼까 합니다. 앞선 작품의 리뷰는 다음 글에서 확인해주세요. (해당 리뷰들을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부디 작품을 읽고 그 해석을 공유한다는 느낌으로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범인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낭만 선생이 말하길, 그녀가 잃은 것>
https://britg.kr/review-single/210055/
너에게조차 보여줄 수 없었던 나의 세상 <낭만 선생이 말하길,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
https://britg.kr/review-single/211084/
3.『사건』 분석
추리소설 독자들이 ‘매력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하는 척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첫째는 그 사건 자체의 외적인 조형에서 비롯됩니다. 독자들이 작품의 시선으로 맞닥뜨리는 사건의 첫인상을 평가하며, 그것이 얼마나 기이하고 흥미로운가에 초점을 두게 됩니다. 가령 살인사건을 주제로 다룰 경우, 피해자의 사인이 일반적인 상식을 벗어났다거나, 용의자나 흉기 등 직접적인 사인을 입힐 만한 소재에 차별점을 두는 식이 그러합니다.
둘째는 그 사건의 내적인 조형에서 비롯됩니다. 흔히 그 사건의 ‘전말’이라고 부르며, 의미 있는 표현으로 사건의 ‘트릭’이라고 정의되는 요소에 초점을 두며 평가하게 됩니다. 이것은 작가가 제시하는 직접적인 해답이자 풀이이며, 그 풀이 방식이 얼마나 참신한지에 승부수를 거는 것이 보통입니다.
<낭만선생 시리즈>의 경우 명확히 전자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CCTV에 찍히지 않는 투명인간이 벌인 유기사건, 존재할 리가 없는 피해자의 목격 등 그 사건 자체가 기이하고 불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두며 흥미를 끌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럼 본격추리라는 장르의 틀을 입힌 <낭만 선생이 말하길, 사람에게 타오르는 것>은 어떤가요? 우선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작가가 사건을 조형하기 위한 방식을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1-P3) 낭만 선생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보수파가 주도하던 학회의 분위기에 밀려 기를 펴지 못하던 급진파 마법사들의 대표 격이라고 할 수 있겠다…(중간생략)… 급진파가 내세우는 이론의 근간이 되는 기조를 이야기하자면, 한마디로 ‘마법은 쓸모없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4-P18) “…나는 여태껏 이러한 기적을 목도한 기억은 없었네. 우리가 피워낼 수 있는 불은 기껏해야 자네가 성냥으로 단숨에 붙일 수 있는 담뱃불 정도에 지나지 않고, 우리가 투명하게 할 수 있는 인체의 일부는 기껏해야 손끝에서부터 팔뚝까지에 한하는 수준에 그치고 말았지.”
(12-P1) “… 우리의 마법으로는 외부에서 잠긴 문을 열 수는 있어도 열려 있는 문을 걸어 잠글 수는 없네. 실용주의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발전과정 상으로 보더라도 자연스러운 일이지.”
기본적으로 <낭만 선생이 말하길, 사람에게 타오르는 것>은 마법이 실존하는 사회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마법이란 곧 초현실적인 힘이며,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현상을 재현할 수 있는 도구이죠. 실제로 작중의 사건은 낭만선생이 마법사들의 학회에 참여하며 살인사건과 목도하는 것이 주요 줄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발췌한 구절을 보면, 초현실적이라며 추켜세울 수 있는 힘에 대해 지독히도 무력한 평가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낭만선생 본인은 마법의 실존을 인정하되 그 가치를 폄하(혹은 실제로도 무력한 본질을 꿰뚫어보는)하고, 그에 걸맞게 보수파의 마법사들은 문을 잠그는 것도, 불을 피우는 것도 못 하는 마법의 한계를 되뇌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작가의 의도입니다. 마법의 실존을 인정하면서도, 그 마법에 제약을 걸어두고 있는 셈이죠. 이것은 작중에 벌어지는 사건에 ‘마법’이라는 만능에 가까운 도구가 끼어 들 여지를 애초부터 제거하기 위한 설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덕분에 오히려 사건의 선은 분명해집니다. 마치 ‘마법으로밖에 벌어질 수 없을 듯한 사건’을 제시하면서도 ‘그것은 마법으로 불가능하다’는 역설을 정당화시키기 때문에, 오히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손으로 만드는 사건, 다시 말해 ‘본격추리’라는 틀을 완성시키는 기초공사로서의 역할하기 때문이죠.
(3-P56) “기적이란 사전적으로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 ‘신의 힘으로 행해졌다고 믿어지는 일’ 따위를 뜻한다.”
(3-P61) “나는 오늘 내가 발견한 기적을 그대들에게 피로해 보이기 위해 이 자리에 나섰다.”
이 작품에서 사건을 조형하는 키워드는 ‘기적’입니다. 기적은 마법의 상위 개념처럼 보이면서도, 오히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마법이라는 이미지의 재현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때문에 마법학회의 최고수장이 만인이 보는 앞에서 상반신이 불에 타 죽어버리는 핵심사건은 무척 강렬한 이미지를 줍니다. 여느 ‘마법’의 이미지에 대입하여 납득할 수 있는 사건이, 오히려 이 작품에서 정의하는 ‘마법’의 이미지에 가려지게 되는 셈이기 때문이죠.
(4-P20) “우리가 끌어와 현현하는 기적이란 한계가 잇네. 왜냐하면 캐슈너트 경의 말처럼 우리는 우리의 상식 안에서만 기적을 현현하려 하기 때문이야. …(중간생략)… 따라서 우리는 이번 — 자네가 말하는 그 사건이라는 것을 기적이라 판단하기로 했네.”
(12-P1) “생각해보시게. 이번 일이 만약 누군가에 의한 살인이라면, 사토 선생이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것이라면 이건 필시 기적이지 않은가. 캐슈너트 경의 죽음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현장은 완전히 밀실이었고…(이하생략)”
인체발화, 밀실살인……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사건은 표면적으로 무척 기이합니다. 하지만 마법이 실존하는 사회 안에서 그것들은 다소 쉽사리 납득될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그것을 철저히 거세합니다. 앞서 설명했던 의도에 따라, 이 모든 것이 마법으로 벌일 수 없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마법이 실존하기에 벌어질 수 없다는 역설을 긍정하는 셈입니다.
그렇기에 선뜻 ‘기적’이라는 상위개념으로 풀이하려는 보수파 마법사들의 의견이 힘을 얻는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마법’이 존재하기에 ‘기적’이라는 개념이 힘을 받고, 낭만선생이라는 탐정이 그것을 타파하며 ‘인간’의 개념으로 사건을 추리한다는 일련의 흐름이 ‘본격추리’라는 틀로 완성되는 발판이 됩니다. 즉, 이 작품은 기존의 개념을 재정립하고 재해석하며, 그 이미지들이 무척 촘촘하게 맞물리는 설계를 보이는 셈입니다. 작가가 작품을 구성하는 능력을 엿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3-1.얻은 것과 잃은 것
사실 작중에 등장한 사건은 무척 ‘마법’스럽습니다. 학회의 수장이라는 인물이 기적을 보여주겠다는 의미심장한 선고와 함께, 만인이 보는 앞에서 상반신이 불살라진 채 한줌의 잿더미로 변해버립니다. 그 자리에 모인 모두가 이것이야말로 마법을 넘어선 ‘기적’이라고 단언할 때, 마법의 무용을 논하는 낭만선생이 나서 그 논리를 깨부수는 것은, 그야말로 ‘추리소설’에 걸맞은 전개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낭만선생 시리즈>의 기초 컨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 봐도 마법 같은 사건을 마법이 아니라고 증명해낸다는 것이, 이 작품이 가지는 매력이라고 할 수 있죠. 그렇기에 이 시리즈에서 등장하는 사건만큼은 표면적으로 기이하고 매력적입니다.
다만 이 시리즈는 그 사건의 전말로 들어가며 풀이의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도 공통적으로 관찰되는 문제 중 하나였습니다. 인간의 기본적인 인식에서 비롯된 오해와 시선을 바로잡음으로서 진실이 보인다는 풀이는 명확하지만, 그것이 난해한 문제를 해결했다는 카타르시스로 이어지자니 추리적 매듭이 비루한 것도 사실입니다. ‘추리’라는 장르에서 기대하는 바가 있다면, 이 작품 시리즈는 그 기대를 벗어나는 선명한 단점을 품고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이 단점을 상쇄시키는 것이 작가가 조형하는 ‘인물의 사정’이었습니다. <낭만선생 시리즈>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무척 입체적입니다. 저마다의 고민이 깊고, 그 고민은 단순히 내적 갈등을 넘어 바깥으로 표출되는 감정적 행동으로 드러나죠. 이런 행동이 조명되는 것이 작중의 ‘사건’입니다. <낭만선생 시리즈>에서 등장하는 사건은 ‘방아쇠’에 가깝습니다. 이 사건이 벌어지는, 혹은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핵심 인물들을 조명하는 수단으로 쓰이죠. 낭만선생은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힌다는 느낌보다는, 그 틈을 벌리고 안을 엿볼 수 있는 창구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작가는 ‘추리’라는 테두리에서 드러나는 단점을 ‘인물의 배경’으로 채워 넣는 셈입니다.
이번 작품도 마찬가지입니다. <낭만 선생이 말하길, 사람에게 타오르는 것>은 ‘표면적으로 마법 같은 사건’의 매력은 충분했으나, 기존 시리즈에서 보인 단점을 타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냉정히 말하면, 풀이의 영역으로 들어가며, 기존에 구축해 놓은 기이함이 오히려 힘을 잃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표면적인 사건이 매력적이나, 풀이가 그에 따라가지 못 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정확합니다. 특히 이미 죽은 시체에 인화물질을 채웠다거나, 아무도 피해자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는 관념에 의한 설정들은 다소 작위적인 편입니다.
지나치게 ‘기적’의 논리에 함몰되어 눈 먼 장님처럼 행동하는 보수파 마법사들의 행동과, 목소리는 크지만 관찰자의 자리에 머무르는 재프리 선생의 인물상도 아쉬운 부분 중 하나였습니다. 이들은 전작에서 등장했던 ‘호야’처럼 그 사정에 공감과 깊이를 느끼게 해주는 인물들이 아니라, 대부분 그 이름과 목소리를 가진 역할극에 가까운 인물들이었습니다. 이 소설이 ‘본격추리’로서 사건 자체(어쩌면 낭만선생 시선 자체)에 초점을 옮기면서, 이들의 인상은 더욱 흐릿해집니다. 배시시 선생, 사토, 여명 선생, 더 나아가 이 사건의 흑막 또한 이런 단점에서 벗어나진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이번 <낭만 선생이 말하길, 사람에게 타오르는 것>이 ‘본격추리’라는 장르를 타게 되며 얻은 것과 잃은 것이 명확합니다. 기존 시리즈의 컨셉을 가져가며 인물들을 평면적이다시피 단순해졌고, 그것으로 인해 풀이의 힘이 약하다는 단점을 상쇄시킬 방법이 사라졌습니다. 그렇다면 그 단점을 가릴 또 다른 무기를 준비해야했으나, 기적과 신비로 대표되는 논리의 설파가 무척 장황하다보니 표면적으로 매력을 갖췄던 사건조차 붕 뜨는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때문에 작품을 전부 읽고 나서 남는 것은 ‘인체발화’라는 명징한 소재일 뿐, 그에 얽힌 인물들이나 추리영역에서 인상이 남은 것이 거의 없는 편입니다.
기존에 사건을 잃고 인물을 얻는 것이 <낭만선생 시리즈>의 매력이었다면, 이번 작품은 사건도 인물도 챙기지 못 했다는 아쉬운 평가를 달아두는 바입니다.
4.『동기』 분석
소제목을 ‘동기’로 규정했으나, 그것은 사실 ‘인물’의 조형에 가깝습니다. 일반적인 ‘추리’ 장르에서 ‘동기’를 말하자는 것은 다음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왜 이 사건이 벌어졌는가? (범인의 조형)
둘째, 왜 이들은 사건에 휘말려야했는가? (용의자의 조형)
표면적으로 작중의 배경은 마법(신비)라는 소재를 두고 ‘급진파’와 ‘보수파’ 간에 벌어지는 가치적 갈등에 가깝습니다. ‘낭만선생’의 존재는 이런 가치를 냉소적으로 판단하는 ‘급진파’의 대표주자로 등장합니다.
(2-P6) “신비주의라는 건 세계관으로서 받아들일 게 아니라 하나의태도로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중간생략)… 노력과 연구의 여하에 따라 이해할 수 있게 된,s 인간으로서 도달해야 할 하나의 경지로 해석해야 하는 거죠.”
(2-P17) “굳이 따지자면 마법은 종교적인 학문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만 …(중간생략)… 우리의 신비는 언제라도 반론에 무너질 여지가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비록 낭만선생 본인의 시선으로 해석하는 가치에 불과하나, 이것은 현재 마법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판단하는 ‘마법’의 가치에 가깝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보수파들이 주장하는 가치를 건조하게 가공하는 것과 동시에, 그것의 한계를 인정하며 더 올바른 가치를 찾아가자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겠죠.
하지만 보수파에게도 뜻밖의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들의 수장이라고 여겨지는 ‘캐슈너트 경’의 죽음이 바로 그것이었죠. 그는 몸을 불사르기 전, 보수파들의 관념을 깨부술 만한 발언을 남깁니다.
(3-P58) “기적이란 우리의 상식으로 지켜지는 영역의 저편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상식으로 지켜지는 영역의 안에서만 연구라는 이름으로 기적을 탐구하고 있다. 우리는 신비의 세상이 실존함을 확인하고 있으면서도 그 너머로 향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의 위치가 한 협회의 수장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이 발언은 자기 진영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비난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그는, 보수파들이 당연히 믿고 있는 가치가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에 탄식하며, 그 안타까움을 직접적으로 표현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채찍질 같은 비난도, 각성을 촉구하는 격려도 한줌의 잿더미로 사라집니다. 그것이 그의 유언이 된다는 것을 예상한 사람이 없었겠죠.
(3-P61) “오늘의 내가 산화함으로써 그대들이 어떠한 종류의 깨달음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 또한 그대들이 부정할 수 있다면 부정하기를 바란다. 신비의 세상 따위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할 수 있다면, 그 또한 내가 바라는 바다.”
(3-P62) 이 또한 더없이 도발적인 발언이었다. 누구보다 앞장서서 신비를 추구해야할 협회의 원로가 누구보다 앞장서서 신비를 부정해주기 바란다니…….
그는 자신이 직접 ‘기적’을 보여주겠다고 말하며, 산화하기 직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깁니다. 화자가 직접 ‘도발적인 발언’이었다고 표현할 정도로, 그의 유언은 그 선이 굵은 편입니다. 다만 그가 ‘부정할 수 있다면 부정하기를 바란다’는 발언이 다소 의미심장합니다. 언뜻 보면 물이 고인 보수파들에 각성을 촉구하는 발언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자세히 보면 누군가에 대한 도전장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그 도발이라는 화살이 신비의 무용론을 설파하는 데에 앞장서고 있던 ‘낭만선생’에게 꽂히는 것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4-P24) “자네가 말하는 그 사건이라는 것을 기적이라 판단하기로 했네. 이 기적을 보다 면밀히 분석하고 학술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우리는 공권력의 개입을 잠시 차단하기로 했을 뿐일세.”
(4-P15) “시답잖은 궤변으로 분위기를 무마할 셈이라면 집어치워. 사람이 죽었다고. 만약 살인사건 같은 게 아니라 자연사라고 해도 경찰을 불러야지. …(중간생략)… 지금 중요시해야 할 건 피해자에 대한 애도와 사건 경위의 조사야. 시답잖은 학자놀음 따위가 아니라.”
캐슈너트 경의 죽음은 보수파 학자들과 낭만선생의 직접적인 충돌을 야기합니다. 물론 낭만선생의 논리는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우리가 관습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인간으로서의 대처와 함께, ‘기적’이라는 논리에 함몰되어 있는 학자들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죠. 그에 대해 학자들은 시간을 내주며, 급진파의 대표주자인 낭만선생에게 ‘이 모든 것이 인위적인 살인’이라는 것을 증명할 기회를 줍니다. 마지못해 낭만선생에게 휘둘리는 듯한 인상도 있지만, 이 흐름만큼은 모든 것들이 낭만선생에게 시련을 주기 위한 장치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살인 자체가 누군가의 의도이며, 그곳에 낭만선생이라는 존재의 개입 또한 계획된 의도라는 뜻입니다.
그 추측은 사실이었습니다. 후에 캐슈너트 경의 정체가 밝혀지며, 이번 사건을 낭만선생에게 전하는 도전장이나 다름없었다는 내막을 들려줍니다.
(20-P4) “… 우리가 모방하는 신비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모방하고 있는 것은 대체 무엇이냐는 말이다.” “기적입니다. 기적이야말로 가장 알기 쉬운 신비의 존재증명입니다.”
(20-P9) 신비를 당연하게 존재하는 종교적인 개념으로도 인정하지 않고, 향상심의 대상으로서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신비란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 말했다.
(20-P17) “우리는 무엇으로 신비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 것이며 무엇을 지향하며 학문에 정진해야 하는가. …(중간생략)… 기적이란 결국 사람의 주관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그저 기적이라 칭하며 신비의 편린이라 가정하고 있을 뿐이다. 마치 오늘 이 자리에서 낭만 선생에 의해 나의 기적이 분쇄되는 순간까지, 그대들이 그렇게 주장해왔던 것처럼 말이야.”
흑막의 대사들을 살펴보면, 단순히 본인의 가치를 관철하는 것 이상으로, 보수파 학자들을 향한 불만어린 비판들이 엿보입니다.
작중에서 언급되는 진보주의 마법사들은, 쉽게 말하면 보수파들이 갖고 있는 기득권적인 사고방식을 누구나 배울 수 있는 학문의 개념으로 떨어뜨리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캐슈너트 경은 이 개념에 은근 동조를 하는 듯한 뉘앙스를 띠고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나마 그는 보수파의 어른이지만, 실제로는 보수파들이 주장하는 신비의 개념에 한계가 있다는 것에 달관하고 있었다는 말도 됩니다. 즉, 그이 눈에는 학자들이 처음부터 답이 정해진 문제에, 어긋난 풀이만을 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20-P20) “경께서 꾸민 사건을 해결하지 못했다면 결국 이번 사건은 신비로부터 떨어져 나온 기적으로 결론이 지어졌을 테고, 그렇게 되었다면 경께서 주장하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는 신비’의 개념도 주창할 수 없었을 테니.”
표면적으로 ‘인체발화’를 응용한 살해방식은 ‘기적’에 가까웠습니다. 말 그대로, 관념적으로 담고 있던 신비의 한계를 넘은 무언가로 비춰졌겠죠. 낭만선생의 냉소적인 추측대로, 이 사건은 해결이 불가능한 ‘기적’의 영역으로 마무리되었을 테고, 캐슈너트라는 인물을 제 몸을 불살라 ‘기적’의 개념을 발견한 인물로 추앙되었겠죠.
그렇다면 여기서 작게 의문을 달아봅니다.
앞서 저는 이 캐슈너트라는 인물이 오히려 진보에 가까운 사상을 담고 있었다고 추측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정반대였습니다. 급진파의 대표 격인 낭만선생에게 ‘기적’에 가까운 수수께끼를 제시하며 그녀의 의지가 꺾이기를 기다리고 있었죠. 속내가 어찌했든, 그가 원했던 결과물은 기적을 탐구하는 보수파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모순이 캐슈너트라는 인물의 ‘동기’라고 해석합니다.
그는 마법사입니다. 그것도 학자라는 이름으로 지식을 인정받고, 한 집단 내에서 추앙받을 수 있는 위인입니다. 하지만 그가 몸 담고 있는 보수파라는 집단은, 말 그대로 멈춰 있는 송장이나 다름없습니다. 연구라는 이름으로 신비와 기적을 쫓고 있으나, 캐슈너트 경의 입장에서 그들이 찾는 신비와 기적은 허무에 가깝습니다. 만일 시간이 지난다면 진보주의 마법사들에게 그들의 연구와 노력이 부정당할 테고, 곧 캐슈너트라는 인물이 표면적으로나마 추구했던 가치 또한 무너지겠죠. 그야말로 구멍 뚫린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고 있는 셈입니다.
이번 ‘인체발화’ 사건은 그 연구와 노력에 수명을 불어넣는 결과를 기대했습니다. 비록 그것을 ‘인간의 손으로 빚어낸 기적’이라고 칭하지만, 누구도 이 사건을 기적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살인이고, 속임수이며, 오락에 가까운 마술과 큰 다름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 속임수로나마 보수파들의 눈을 속이고, 세간의 눈을 속인다면, 그것은 선동이 되고 힘이 됩니다. 언젠간 급진파에게 논박당하며 사라질 보수파들에게, 잠시나마 연구를 지속할 수 있는 힘을 불어넣는 셈이죠.
고백하자면, 이 해석이 맞다고 단정하자니 자신이 없습니다. 더 나아가, 제가 이 작품에서 인물들이 주창하는 가치를 완벽히 이해했다고 장담하기도 힘듭니다. 어쩌면 저처럼 문해력이 부족한 독자에게는 더 가벼운 언어가 공감을 줄지도 모릅니다. 대화와 관계로 주고받으며 깨달을 수 있는 가치가 말이죠. 이번 글의 마무리는 그 공감이라는 가치에 가장 걸맞은 문장을 발췌했습니다. 소설을 마무리하는 낭만선생의 대사를 소개하며, 이번 감평을 마치겠습니다. 인상적인 작품을 보여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21-P23) “이해할 수 없는 줄 알면서도, 사람은 서로 이해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걸 확인했으니 이번에는 그걸로 됐다는 겁니다. 굳이 말하자면 학문적인 성취――라고 해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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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이 작품을 과거 다른 플랫폼에서 만나고, 마치 제 눈과 마음에 맞춘듯 시작되는 이야기에 가슴이 두근거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이렇게 새로운 장에서 다시 만나 부족하게나마 감상을 남길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큰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멋진 작품을 남겨주신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