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렇게까지 잘생긴 놈이면 미리 말을 해줬어야 도리에 맞지 않나?
– <11-P77>
목차
1.『BL장르』에 대한 단상
2.『캐시언』이 머무르는 등대의 어둠
3.『제이』가 채워주는 등대의 빛
4. 리뷰를 마무리하며….
- 『BL장르』에 대한 단상
고백하자면, 저는 동성애를 전면적인 상품으로 내세우는 ‘GL’과 ‘BL’에 관해서 다소 시큰둥한 시각을 갖고 있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여느 아마추어 작가님들이 보여주는 해당 장르에 대해서, 일반적인 남녀관계를 벗어나야하는 당위성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죠. 즉, 이들의 사랑이 굳이 동성애라는 전제를 둘 이유가 무엇인지 해석하기 어려웠다는 말도 되겠습니다.
기본적으로 동성애는 특별한 소재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성애를 디폴트값으로 취급하는 것을 고려하면, 창작물에서 동성애가 주류로 등장하는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은, 일반적인 이성애와는 차별점을 가져야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더 나아가, 이들이 반드시 동성 관계에서 사랑을 나눠야하는 이유를 찾아야만 하는 것이 작품의 목적이 되죠.
하지만 여느 작품들은 그런 규칙에 크게 얽매이지 않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들이 작품에서 표현하는 동성애는 일반적인 이성애의 연애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간혹 말투와 행동까지 여자와 남자라는 이분법으로 구분되는 세상의 연애를 크게 빼닮을 정도로, 그들을 동성애로 표현하는 이유를 찾기 어려운 적도 많았습니다. 즉, 그들의 사랑을 동성으로 규정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얘기도 되겠죠.
이번에 읽은 <라잇`어스(Light`us)>라는 작품 또한 그런 인상에서 크게 벗어난 소설은 아니었습니다. ‘제임스’와 ‘캐시언’이라는 두 남자의 사랑을 주제로 내세웠지만, 그들의 관계가 남자와 남자라는 것을 간혹 잊을 정도로 이성애의 규칙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는 편입니다. 때때로 한쪽이 여자였다는 가정을 두면 훨씬 소설이 잘 읽히는 아이러니마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깔끔하고 재치 있는 문체와 더불어, 작품 특유의 뛰어난 가독성 덕에 읽는 데는 큰 무리가 없던 것도 사실입니다. 더 나아가,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의 세상을 조명하며 밀수품과 음모가 오가는 항구라는 매력적인 배경을 제시하고, 개성을 충분히 살리며 깊이까지 고려한 듯한 인물들의 모습은 이 작품에 푹 빠져들 수 있는 여지를 주었습니다.
이 뒤에 간혹 제시되는 비판은, 이 작품을 재밌게 읽은 독자가 남긴 아쉬움이라고 이해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2.『캐시언』이 머무르는 등대의 어둠
‘등대’라는 사물을 떠올렸을 때, 관습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빛’이 주는 이미지와 대응합니다. 어둠이 가장 짙어지는 시간에 바다를 비춰주며 뱃사람들을 인도하는 이미지는 수많은 작품에서 응용되며 외로운 길잡이에 가까운 형식을 창작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등대’의 위치입니다. 등대는 기본적으로 빛 그 자체를 상징합니다. 빛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물이 아닌, 빛과 등대를 동일시하는 것이 보통이죠.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이 ‘등대’를 조명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세계 2차 대전이 끝난 직후, 등대를 거쳐 가는 일련의 사람들을 관찰하며 빛에 가려져 있던 어두운 사실들을 직접적으로 드러냅니다. 그것은 등대에서 일하고 있던 ‘캐시언 마이어스’라는 인물의 진술로 알 수 있습니다.
(6-P62). 등대지기로 몇 년간 일해 학비를 벌 거라니, 새삼 어처구니가 없어 기가 다 찼다. 여기가 무슨 등대인가, 폭력배들 돈벌이 신호등이지.
(6-P76). 사실 제임스 이전에 이 등대에 오는 놈들은 다 똑같은 놈들이었다. 돈 때문에 밀매매든 조직폭력배 수발 드는 허드렛 일이든 하러 온 놈들. 개중에는 어딘가에서 악랄한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다니다 숨기 위해 등대를 택한 놈들도 있었다.
(14-P48). 아마 높은 확률로 이 일대의 해군 간부들도 이 등대의 진짜 목적을 알고 있거나 깊게 연루되어 있을 것이다. 그 비싼 밀수품들을 누가 사겠어? 본인들이 주요 손님이거나 모른 척 하면서 조금씩 찔러주는 밀수품을 챙기는 거겠지.
캐시언(이하 캐스)은 등대에서 오랫동안 몸을 담은 일꾼으로서 그 내막을 냉소적인 시선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가 바라보는 등대는 ‘등하불명(燈下不明)’에 걸맞은 장소입니다. 등대를 거점으로 모여드는 밀수품업자와 조직폭력배들은 마치 불빛에 꾀인 파리떼를 보는 것처럼 너저분한 장면으로 다가옵니다.
흥미로운 것은 캐시 보인 또한 이 무리에 스스로를 밀어 넣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단편적으로 들개와 같은 삶을 살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쩌면 모든 삶을 파괴로 몰아넣었던 전쟁 후의 삶을 그대로 응축시킨 삶을 살았던 듯하죠.
(6-P62). … 조합원들이랑 파업했다가 사장놈이 고용한 까패들과 ‘치안관리’를 하러 온 경찰들에게 얻어맞았을 때가 절로 생각났다. 그때는 한 대로 안 끝나고 죽어라 맞기만 했다가…(이하생략)
그렇기에 이 등대라는 환경이 낯설지 않습니다. 오히려 캐시는 본인이 살아왔던 삶의 연장으로 보고 있죠. 그것은 물질적인 보충과는 무관합니다. 오히려 이 환경 자체를 본인과 동일시하며, 그 외의 목적을 가진 이들을 냉소적으로 평가하는 모습이 대부분이죠.
하지만 이런 그에게 다음과 같은 환경을 처분하겠다는 작은 결심이 움트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제임스 브라운’이라는 청년과의 만남이었습니다.
3.『제이』가 채워주는 등대의 빛
‘제임스 브라운(이하 제이)’는 그늘로 가득한 등대에서 가장 이질적인 존재입니다. 기본적으로 그의 배경 또한 독특합니다. 비록 교육은 부족했으나 군의관으로서 복무하며 인간관계를 배웠고, 돈을 벌겠다는 순수한 목적으로 등대까지 찾아온 청년이죠. 이 등대조차 그에게는 1순위가 아니었습니다. 바느질로 옷이나 꿰매며 푼돈이나 벌자고 자조하던 것이 수많은 경쟁자에게 밀려 테두리 밖으로 밀려난 탓에 찾게 된 차순위나 마찬가지였죠. 즉, 그는 처음부터 등대를 벗어날 것을 가정하며 찾아왔다는 뜻입니다. 마치 빛을 보고 찾아왔다가 떠나는 한 척의 배나 마찬가지입니다.
(5-P38) 하턴클리프 이 개자식! 또박또박 순해터진 글씨체로 불법적인 일은 안 시킬 거라고 장담까지 했으면서 평범한 불법 밀수입 조직에 사람을 처넣어?
물론 그가 등대의 배경을 깨달았을 때는, 다소 후회하는 듯한 속내를 비칩니다. 하지만 그가 ‘캐시언 마이어스’라는 인물과 엮이면서 그의 시선은 바다를 향하는 불빛처럼 어느 한 곳에 진득하게 머무르기 시작합니다.
(10-P74). “다 밀기 싫으면 좀 다듬어 드려요? 실례같아서 말을 안 한 것 뿐이지, 원래 수염 안 기르던 사람이 신경 안 쓰고 있다가 자라게 둔 것처럼 지저분하게 되어 있어서 영 보기 좋진 않아요.”
(12-P75). “저번에도 말했지만 적당히 줄여서 불러도 괜찮아요. 다른 사람 이름이라도 좋으니 정말 원하는 이름으로 불러도 상관없고. 욕으로만 부르지 마요.”
(16-P58). “앞으로도 의심 가는 거 있으면 그냥 물어봐줘요. 나 당신한테는 거짓말 안 해요.”
제이가 캐스에게 보이는 태도는 명확히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인정’ 다른 하나는 ‘공유’입니다. 그는 캐스에게 만큼은 이름과 모습 양쪽으로 무언가를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고, 그것은 곧 캐스의 눈에 들고 싶다는 하나의 욕구로 비춰집니다. 그것으로 인해 제이는 무언가를 자꾸 베풀며 그와 생활을 공유하는 것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은 기본적으로 결이 다른 인생을 살았습니다. 제이는 신분을 위조하면서까지 어딘가를 떠돌아다니는 삶에 익숙했고, 캐스는 자신을 숨기고 버리는 삶에 익숙했습니다. 신분을 위조한다는 것은 불법에 대표적인 이미지지만, 그것은 곧 양지에서 살아가고 싶다는 제이 본인의 의지이기도 합니다. 즉, 캐스가 제이에게 감회된다는 것은, 곧 그가 익숙하던 삶을 벗어낸다는 의미로 다가옵니다. 결국 그가 만든 변화는 캐시의 독백으로 명확히 드러납니다.
(13-P83). 3년 뒤에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해야 알더브룩과 밀러 그 지독한 인간들의 손아귀에서 둘 다 목숨을 부지하고 나가서 살 수 있을까.
처음이 아닐까요? 그의 본심에서 ‘두 사람’이라는 테두리가 만들어지는 순간입니다.
사실 제이의 캐릭터는, 서두에서 언급했던 이성애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앙탈을 부리거나 토라져서 고개를 돌리는 모습 등, 남자라고 생각하면 이질감이 심한 장면도 많은 편입니다. 오히려 이 캐릭터가 여성으로 설정되었다면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당위성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할 정도였죠.
물론 그렇게 된다면 ‘BL’이라는 장르로 설정한 이유 자체가 사라질 겁니다. 그 장르를 지켜야할 이유를 찾는 과정 또한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말만 남기며 인물 분석을 마무리하겠습니다.
4. 리뷰를 마무리하며….
사실 이 작품을 완벽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특히 사랑을 주 감정으로 내세우면서도, 그 관계가 진전되는 과정은 무척 희미하다는 것은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들의 사랑이 일반적인 사랑과 결에서 벗어나는 만큼, 그만한 에피소드가 준비되었다면 하는 아쉬움도 남습니다. 작가님이 남긴 말에 따르면, 해당 작품은 15세 버전과 19세 버전이 따로 준비된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 제가 느낀 이야기의 공백은, 19세로 준비된 작품을 덜어내며 생긴 이음새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다만.
낯선 이미지는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이 그렇습니다. 현실에는 소설적 개연성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느 두 연인의 만남에 그럴 듯한 추억을 그려볼 수는 있겠지만, 결국 두 연인을 이어준 것은 영문도 모를 호감에 가깝습니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에게는 어떤 사건으로 특별해진 것이 아닌, 원래부터 특별했던 두 사람을 그렸다는 추측도 신빙성 있게 떠오릅니다.
멋진 작품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집필 활동을 응원하겠습니다.
그런데 시트러스 2기는 언제 나오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