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근한 연기들을 먹고 자라는 <행복백화점에 갔다온 이야기> 감상

대상작품: 幸福백화점에 갔다 온 이야기 (작가: 헤이나, 작품정보)
리뷰어: 무강이, 2일전, 조회 17

‘사유 불가능한 것을 철학적으로 사유하려는 비철학적 시도’

유진 새커라는 학자가 <이 행성의 먼지 속에서>라는 책에서 말했습니다. 공포라는 감정은 이런 것 같다고. 글쎄요, 개념상으로는 맞는 것 같긴 합니다.

그런데 저는 학술인도 철학자도 아니라서, 조금 다른 느낌으로 접근해보고 싶네요. 맛에는 다섯, 혹은 여섯 개가 있습니다. 단맛, 신맛, 쓴맛, 짠맛, 감칠맛에 굳이 하나 더 더한다면 매운맛 정도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레몬 신 맛과 오렌지 신 맛이 같을까요? 그걸 결정하는 건 ‘향’입니다. 네 ⋯ ⋯ . 그냥 커피 내리다 배운 잡지식 이야기입니다. 공포라는 개념이 ‘맛’ 존재한다면 공포라는 개념을 구성하는 텍스처는 ‘향’으로 존재하는 셈이죠.

 

소개가 늦었습니다. 인용구를 먼저 쓰면 눈길을 끌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행복 백화점에 갔다온 이야기>는 뭐하는 작품이냐구요. 요즘 유행하는 ‘리미널 스페이스(Liminal Space)’ 체험담 류의 짧은 글입니다.

화자인 주인공은 기묘한 백화점에 갔다가 길을 잃지만, 금방 빠져나오고 맙니다. 그러나 그 백화점의 풍경만큼은 정신을 홀린 채 남아있습니다.

짧은 이야기에서도 눈길을 끈 것은 역시 작가가 묘사하는 리미널 스페이스의 풍경입니다. 옛날 느낌의 불가해한 백화점. 딱히 친절하지도, 그렇다고 괴팍하지도 않은 그런 느낌의 ‘미지근한’ 텍스처들. 

 

짧은 이야기 속에서도 눈길을 끈 건 코멘트 속에서 작가가 참고했다고 하는 작품들입니다. 베이퍼웨이브(Vapourwave)와 몰소프트(Mallsoft)는 음악 장르입니다. 2814의 앨범과 Oneohtrix Point Never의 <Replica>는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리미널 스페이스 사진들은 최근 들어 참고자료로 모으는 게 취미구요.

참고 자료로 언급된 음악들을 들어보시면 알겠지만, 음악들은 굉장히 차가운 음색으로 따뜻한 풍경을 연출해냅니다. 사운드 스케이프(Sound Scape)라는 용어를 아시나요? 노이즈 섞인 조용한 로파이 기타 팝 하면 우중충한 소도시를, 우블베이스 때려넣은 신스웨이브 하면 사이버펑크 풍 대도시를 연상하게 되실 겁니다. 그런 연상작용을 ‘사운드스케이프’ 정도로 (일단 저는) 부르고 있습니다.

작가는 참고했다는 장르의 ‘사운드스케이프’에 걸맞은 기묘한 공간을 서술로 연출해냅니다.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서 낡아가고 있을 법한, 기묘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백화점.

 

그러나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작가조차도 (사석에서나마)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이게 왜 호러인 걸까요. 왜 이게 무서워야 하는 걸까요.

 

일단 호러라는 맛 자체는 성립합니다. 주인공이 다소 무서운 일을 겪었고, 탈출했지만 아직까지도 그 정신까지는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공포의 집’ 플롯입니다. 그 외에도 베이퍼웨이브적인 사운드스케이프와 결합한 기묘한 분위기 하며, 장르로서 ‘호러’가 성립하지 않을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향은 이상합니다. 무섭기는 커녕 신비한 향에 노스탤지어가 느껴질 정도입니다. 백화점은 주인공뿐만 아니라 독자들마저 매혹하는 공간으로 느껴집니다. 여기에 더 있다가 가고 싶을 정도로. 마치 ‘여기에서 길을 잃어야 했을 것 같다’고 서술될 정도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말할 수 있죠. 낭만과 혐오가 종이 한 장 차이이듯, 매혹과 공포도 종이 한 장 차이인 거 아니냐고. 네, 실제로 동화와 호러는 사이 좋은 이웃입니다. 풍자와 해학이 한 쌍이듯 말입니다.

그렇다면 화자는 무엇에 매혹되고, 무엇에 겁에 질린 걸까요. 

 

저는 리미널 스페이스에 대한 공포는 기존 상투적인 호러 장르의 공포와는 조금 결이 다르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니, 어쩌면 오히려 호러의 ‘원형’을 담은 공포라고 할까요.

리미널 스페이스는 사진 한 장 있는 게 사실 호러의 전부입니다. 그 안에 꼭 왠지 괴물이 있어야 할 것 같으니까 괴물을 넣고, 기묘한 ‘로어’가 있어야 할 것 같으니까 로어를 넣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괴물과 로어들에, ‘내용’이 있을까요.

의외로 ‘내용’ 자체는 있습니다.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의 코즈믹 호러 작품에 등장하는 수많은 수산물 이미지에 대한 호러처럼 말입니다. ‘슬렌더맨’이나 ‘팔척귀신’ 따위는 한밤중에 나타나는 키 크고 창백한 무언가에 대한 공포입니다.

사람에게 내재되어 있던 어떤 공포에 대한 무의식적인 기제가 사진 한 장을 만나, 억지로 그 사진이 무서운 이유를 설명하게 만듭니다. 거기에 집단지성이 연결된 결과 ‘SCP’ ‘백룸’ ‘크리피파스타’ 등이 결국 만들어집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만들어진 ‘공포를 해명했다’고 할지 모르지만, 글쎄요, 해명된 건 ‘우리의 공포’일 뿐입니다.

 

그 점에서 기묘한 백화점이 리미널 스페이스로 작용하는 것은 단순합니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지연된 죽음으로 몰아넣습니다. 비틀즈는 해체된 지 오래고, 2030 재즈 아티스트의 대다수는 비극적인 죽음이 아니라도 자연사로 타계한 분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음악은 팔리고 있고, 서사는 잊히지 않습니다.

이게 그들이 한 예술의 힘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문제는 이 모든 일이 예술뿐만이 아니라 전방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겁니다. ‘페페 더 프로그’같은 각종 퇴물 ‘밈’들은 기묘하게 생명력을 얻어 부활합니다. 잊힌 줄 알았던 프랜차이즈는 비디오 게임화 등으로 생명력을 얻어 부활합니다.

옛날에는 단단한 뭔가였던 것들이, 이제는 녹아서 연기가 되어 사라집니다. 자본주의는 이제 그 미지근한 연기들을 흡수해 자신의 세를 불리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탈출합니다. 어쩌면 거기에 더 있어야 했었던 건지도 모르죠. 거기서라면 백화점의 이름처럼 영원히 幸福할 수도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한자로 쓰인 ‘幸福’이라는 단어는 고작 낡은 간판에 불과할 겁니다. 영원히 지연된 행복일 뿐. 뭐, 저속노화라고 안 늙는 건 아니니까요.

좋은 플레이리스트 감사합니다. 저는 이 곡을 드릴게요. The Smile의 <i quit>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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