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죽을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나를 부추긴 선생님 때문입니다. – <본문 P67>
목차
- 『하이브리스토필리아(Hybristophilia)』의 단상
- 『살인마를 동경하는 사람들….』
- 『나와 선생님』
- 『End? 혹은 And』
- 『하이브리스토필리아(Hybristophilia)』의 단상
‘하이브리스토필리아(Hybristophilia)’라는 심리학 용어가 존재합니다. 흔히 강도, 연쇄살인 같은 중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들에게 매력을 느끼는 심리적 이상 증상으로, 국내에서는 ‘범죄도착증’ 혹은 ‘범죄자 애호’로 번역되곤 합니다.
지탄을 받고 비난의 대상이 되는 이들에게 매력을 느낀다는 것이 역설적으로 느껴지는 게 사실입니다. 그들을 향하는 ‘매력’은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됩니다. 범죄로 비난이 집중되는 이에 대한 연민일 수도 있고, 사회적으로 용인하는 도덕적 범주를 과감히 벗어났다는 데에 느끼는 동경으로 다가갈 수도 있습니다. 또는 단순히 미디어 노출되는 외모나 성적 매력으로 인해 호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1974년도 연쇄살인으로 악명을 떨쳤던 ‘테드 번디(본명: Theodore Robert Bundy)’는 이 범죄도착증의 대표적인 예시로 인용되곤 합니다. 그는 뛰어난 외모 여자들에게 접근해 납치와 살인을 일삼았으며, 마흔 두 살의 나이에 사형장으로 보내졌습니다. 당시 수많은 언론들이 그를 ‘외모가 훌륭하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살인마’라는 데에 주목하며 그를 포장하기에 앞섰고, 실제로 일부 대중이 그에 동조하며 불온한 인기를 만든 사례가 ‘범죄도착증’의 한 사례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현상에 대해, 살인마라는 대상에게 일종의 ‘영웅(Hero)’에 가까운 동경을 느낀다며 해석을 곁들이곤 합니다. 만화속에서 나오는 ‘배트맨(Batman)’처럼 사회규범 바깥에서 힘을 발휘하고 사회를 흔드는 현상에 빠져든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어쩌면 ‘동경’이라는 용어로 해석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2.『살인마를 동경하는 사람들….』
이번에 읽은 소설 <친애하는 선생님께> 또한 이런 ‘범죄도착증’을 소재로 집필된 작품입니다. ‘나’로 지칭되는 화자가 동경하는 살인마와 편지를 주고받는 형태로 진행되는 서간체 소설이며, 깔끔한 문체와 생생한 대사문의 매력을 살려 흡입력을 놓치지 않는 매력이 있었습니다.
화자의 첫인상은 무척 꺼림칙합니다. 감옥에서 형을 기다리는 연쇄살인범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그를 닮기 위해 살인을 준비하며 조언까지 구하는 황당함을 보여주죠. 화자는 자신을 선생님의 ‘추종자’라고 표현하며, 존경의 언어를 아끼지 않습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 그렇습니다.
(P7). 선생님! 하지만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는, 이 폭탄을 터뜨리고 싶은 욕망이 꿈틀대고 있다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저조차도, 저를 비웃는 모든 이들을 전부 죽여 버리고 싶었던 게 수십 번이거든요. …(중간생략)… 용기를 내서 편지를 보냅니다. 저는 선생님에게 굴하지 말고 당당히 임하라는 뼈저린 교훈을 얻었습니다.
‘추종자(Follower)’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과격함은 ‘동경’과는 결을 달리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호감을 느낀다는 것을 넘어서, 그 사고와 행동 모든 것을 따라가고 싶다는 일종의 선언에 가깝기 때문이죠.
실제로 ‘추종자’라는 이름으로 세력을 이끌던 범죄자들이 있습니다. 미국의 범죄자 ‘찰스 맨슨(본명 : Charles Milles Manson)’은 ‘맨슨 패밀리’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추종자들을 모아 세력을 만들었고, 자택으로 쳐들어가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사살했던 ‘폴란스키가 살인사건’을 일으켰습니다. 또한 노르웨이의 음악가 ‘바르그 비케르네스(본명 : Varg Vikernes)’는 자신의 팬들을 이끌며 각종 범죄를 저질렀고 음악 동료를 살해한 건으로 형기를 마친 전적이 있습니다.
추측컨대, 이 작품은 ‘찰스 맨슨’을 모티브로 한 것이 자명합니다. 일가족을 살해했다는 중범죄와 더불어, 추종자로부터 받는 동경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감옥에 갇혀서도 반성이 없다는 점에서 많은 공통점을 보입니다. 살인 후 인터뷰에 당당하게 임했다는 언급 또한 ‘찰스 맨슨’의 행적과 유사합니다. 특유의 개성과 똘끼(?)를 구분하지 못 하는 뒤틀린 사고도 한 몫 하는군요. 의외로 본문에서 보이는 살인마의 부담스러운 인물조형이 아주 공상이 아니라는 의미도 되겠습니다.
3.『나와 선생님』
아마 독자들이 주목하는 건 편지를 보내는 화자입니다. 감옥에 갇힌 연쇄살인범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다는 불온한 호기심과 더불어, 활자에서 과감하고 솔직하게 보여주는 들끓는 감정에 의문과 공포를 동시에 느끼기 마련이죠.
개인적으로 작품을 읽으면서, 오히려 흥미가 가는 것은 편지를 받는 ‘선생님’의 태도였습니다. 편지를 보내는 발신인의 태도가 솔직하다고 표현했지만, 의외로 가장 솔직하게 자신을 보여주고 있는 건 수신인이었기 때문이죠.
(P46). 우리는 모두 동물 같은 존재야. 자유롭게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
(P49). 너 또한 이 감정을 느꼈을 거라 믿어! 씨발! 한 번 느끼게 되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쾌락이지.
흔히 말하는 쾌락살인마의 모습이지만, 그는 스스로를 ‘동물’로 규정하며 본능에 따라 움직이기를 권합니다. 사실 동물들이 쾌락을 위해 사냥을 즐기는 경우가 이례적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의 사상은 오히려 욕망에 충실한 사람으로 비춰지기도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나와 선생님이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벌어지는 보이지 않는 줄다리기입니다. 마치 이야기는 내가 선생님에게 편지를 보내며 그의 사상에 끌려가는 듯한 구성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자세히 볼수록 끌려가는 것은 선생님 쪽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P49). … 그 쾌감을 느끼게 되면, 이제 너는 오로지 그 행위에 대한 결과만 바라보고 움직이게 될 거야. 왜? 우린 동물이니까. 원숭이일 뿐이지. 털 없는 원숭이랑 다를 게 뭐가 있어?
(P51). 그림을 그려줘! 그 새끼 표정 말이야. 그냥 스케치 정도만 해도 돼.
선생님은 흥분을 감추지 못 합니다. 본인을 동경하고 추종하며 살인을 계획하고 있다는 이에게 거리낌 없이 제 목소리를 감추지 않죠. 그는 스스로 부화 직전의 병아리로부터 껍질을 깨주는 것처럼 그를 이끌어주고 있다 믿어 의심치 않는 겁니다. 하지만 그 흥분을 부추기고 있는 건 오히려 추종자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껍질을 깨도록 유도하고 있다는 말로 규정할 수도 있습니다. 이 공수가 바뀌는 듯한 역전의 관계는 이 소설의 치밀한 구성을 호평하게 만듭니다.
(P66). 그들을 죽였을 때 느낀 감정은, 죄책감이었습니다.
(P82). 너는 니 가족을 쳐 죽이기 위한 조언을 내게 해줬어.
그 역전의 관계는 마지막 고백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화자는 자신이 복수를 위해 선생님의 가족을 죽였다고 고백하며, 자신은 그 어떤 쾌락도 느끼지 못 했다는 말로 선을 긋고 있습니다. 그가 이룬 것은 살인을 되갚아주었다는 복수가 아닙니다. 선생님이 감옥에서 손을 떨 정도로 흥분하며 편지를 보냈던 모든 과정과 의도가 처음부터 의미가 없었다는 것을 점찍어주는, 다시 말해 살인마가 누군가를 이끌 수 있다고 믿었던 모든 과정을 허상으로 추락시키는 일입니다.
본인을 ‘선생님’이라고 믿었던 건 진심이었을 겁니다. 그는 스스로를 가장 인간에서 멀리 떨어진 무언가로 규정했지만, 사실 그는 누구보다 인간에 가까웠다는 뜻입니다.
4.『End? 혹은 And』
서두에서 ‘범죄도착증’을 설명하며, 그 예시를 ‘배트맨’에 비유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배트맨’이라는 캐릭터 또한 그 사정을 주목할 만합니다. 그는 어릴 적 노상강도에게 부모님을 잃었고, 그 복수심으로 자경단이 됩니다. 법의 테두리 바깥에서 범죄자들을 소탕하며, 본인의 정의를 실현하죠. 즉, ‘배트맨’이라는 영웅 또한 누군가가 벌인 살인으로 인해 탄생한 부산물이라는 뜻이 됩니다.
소설 <친애하는 선생님께>는 발신인이 복수를 이뤘다는 고백과 함께 이야기를 끝냅니다. 소설 바깥의 이야기를 추측하자면, 결국 화자 또한 살인범이 되었고 그에 따른 죗값을 치르겠죠. 어쩌면 그 고통을 벗어나지 못 하고 더 커다란 악행을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그가 친애한다는 ‘선생님’과 결이 다르지만 결국 같은 길을 걷게 된 셈입니다.
독자는 그를 동정할 수 있지만, 동경할 수는 없습니다. 복수를 이뤘으니 시원하다며 손뼉을 쳐주기에도 여의치 않습니다. 그 이유는 자명합니다. 결국 이 주인공의 뒤로 벌어질 모든 사건들이 결코 아름답지 않기 때문이겠죠.
소설은 끝(End)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그 뒤로 이어지는 ‘그리고(And)’를 상상해보게 만드는 것이 이 작품의 매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좋은 작품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멋진 집필 활동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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