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미국 드라마의 세계화를 이끌었다고 생각되는( 저의 주관적 의견입니다) 분위기가 있는데, 바로 애매한 미스테리 장르입니다. 제가 멋대로 붙인 이름이긴 하지만 당시엔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거든요. 분위기를 이끈 건 [LOST]였습니다. 장소, 인물, 시기 등 모든 것이 분명치 않은 이야기 전개에 ‘다음 화엔 설명해주겠지.’ 하고 보다가 결국 다음 다음 화를 기다리게 되는 알 수 없는 드라마였습니다. 이 작품 보다 5년 먼저 등장해서 스릴러 팬들의 머리를 흔들어 놓았던 [프리즌 브레이크]의 충격이 아직 남아있던 시기라 더 그랬던 것 같습니다.
뜬금 없이 예전 미드의 추억을 되살려보게 된 건 이 작품 [BURN]을 보면서 흔히 ‘미스테리 미드’라 불리우게 된 그 장르가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일단 이 작품을 보자면 미스터리 호러 장르인데 긴 호흡으로 장기 연재 중이고 내용의 몰입도 또한 좋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괜찮았던 부분은 이야기의 흐름 상 지속적으로 등장하게 되는 대규모 살육 장면인데 고어 씬에 거부감을 가지신 분들도 어느 정도는 적응하실 수 있을 만큼의 적당한 수위에 특히 장황하게 늘어놓지 않고도 장면에 몰입되게 하는 표현력에 좋았습니다. 초반에는 조금 뜬금없게 보일 수도 있는 장면들이 등장하는데 작가님의 능력으로 자칫 공황 상태에 빠질 수도 있는 위기를 극복해냅니다. 위기가 극복되지 않는다면 내 능력이 부족했던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는 옛 성현의 가르침이 떠오르는 부분입니다…(100% 농담이지만 요즘엔 왠지 농담처럼 느껴지지 않을 때도 있어서요.)
제가 어렵게 구성해 본 이야기의 큰 줄기는 이렇습니다.
카지노가 들어선 가상의 도시 시월에는 욕망에 가득 찬 가족들과 그들에게 이용당한 자매, 그리고 욕망으로 저지른 악행들을 파헤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들이 그린 그림으로 지옥 문을 열 수 있는 재수 없는 능력을 가진 새벽과 새영은 그 그림을 통해 재물 혹은 영생 같은 음험한 욕망을 가진 사람들과 그들이 불러낸 악마들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자매와 조력자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정보를 얻고 악마를 물리칠 방법을 찾으려 하지만, 과거의 사건에서 미래의 길을 찾는 건 그들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강대한 힘을 가진 악마를 불러내고 시간의 흐름까지 읽으며 자신들을 막아서는 악마와 그의 하수인들에게서 새영과 새벽, 그리고 그들을 돕는 여러 사람들은 다시 지옥의 문을 닫을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까요?
초반 14화 까지의 내용을 읽고서 이 작품의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 이르면 ‘아, 읽어보기 잘했다.’라는 생각이 드는 포인트가 있기 때문에 결국 이 작품은 독자의 인내심과 약간의 입소문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슷한 예로 보여드릴 만 한 최근 미드 중에는 [FROM]이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여행 중에 길을 잃은 사람들이 도착한 마을에서 기괴한 일들을 겪는다는 내용의 호러 미스테리 드라마인데 초반 몇 화의 내용을 보고서 사건의 진상에 대해 대충이라도 알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엘러리 퀸이나 반 다인의 소설처럼 증거를 충분하게 내놓고 독자와 두뇌 다툼을 벌이는 구조도 아닌 데다가 이런 스타일의 작품은 보통 후반부에 드러나게 되는 사건의 진상이 독자들에게 강한 충격을 남길 수록 성공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 같더군요. 그러려면 독자들이 어느 정도 상상 가능한 울타리를 멀찍이 벗어나야 하겠지요.
이 작품은 그런 반전의 강박에 빠져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개연성을 은하계 저 멀리로 보내지도 않았구요. 하지만 초반부의 전개에서 후반부의 진행 과정을 예측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은 작품의 장편을 완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초반 접근도를 떨어뜨리는 난점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조금 아쉽습니다.
결국 그 어려운 포인트를 넘어서고 나면 이야기는 꽤나 매력적인 장편 호러 미스테리가 됩니다. 제 취향이라 그런 부분이 있음을 인정하고서라도 작품의 장점으로 꼽을 수 있는 포인트가 많습니다.
잔인한 표현들만 살짝 빼 놓고 보면 작품의 분위기는 스팀 펑크 냄새가 나는 아포칼립스 배경의 무협 활극 같습니다.
배경이 되는 도시 시월은 좀비 게임 바이오 하자드에 등장하는 라쿤 시티 같고 등장하는 인물들은 각자의 개성도 훌륭한데 모두 맨손 일당백은 기본 패시브로 보유한 강자들이라 보는 맛이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진지한 내용을 기대했던 독자들이 실망하지 않겠어?’ 하는 노파심을 가질 수도 있는데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굵직한 사건의 흐름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모든 걸 다 쏟아내고 찬란하게 하늘로 돌아가는 무림 지존의 아름다운 최후를 볼 때의 장엄함도 있고, 작은 역할을 맡았던 인물들의 결코 작지 않은 그들만의 소중한 이야기도 담겨 있습니다. 이야기의 매력 또한 쏠쏠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 [BURN]에 대해 한 마디로 마무리를 짓기는 어렵습니다. 완결이 되지 않은 작품이기도 하고 어떻게 완결이 될 지 전혀 예측이 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브릿G의 독자 여러분들께 과감하게 추천해드리고자 합니다. 이 작품은 장편의 진정한 가치를 보여주는 명작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장편의 가치는 읽으면 읽을 수록 빠져들다가 결국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왠지 모르는 후련함과 울컥하는 감정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긴 호흡으로 작품과 함께 천천히 걸으면서 인물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도착한 여정에서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감정을 이 작품에서 느낄 수 있을 지 아직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시도해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는 한 번 같이 걸어 볼 생각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