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서혜명이라는 아이의 목숨이 본래의 운명보다도 훨씬 질겨서, 하루 정도만 더 이 세상에 머물러 있었더라면 결말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 <본문 P69>
목차
- 추리소설에 대한 단상
- 『주인공』 분석
- 『사건』 분석
- 『주제』 분석
- 추리소설에 대한 단상
미국 작가 ‘애드거 앨런 포’로부터 <모르그 가의 살인사건(영어원제:The Murders in the Rue Morgue)(1841년)>이 집필된 것을 시작으로, <셜록홈즈 시리즈(1887년)>로 해당 장르가 정립되기까지 약 40년가량이 걸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난제에 맞부딪히는 탐정을 내세우는 이 ‘추리소설’이라는 장르가 무료 한 세기가 넘을 정도로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낭만적인 수수께끼에 빠져드는 즐거움을 결코 무시할 수도 없습니다.
흔히 ‘고전’이라는 이름으로 어느 장르에 접근하는 이들에게는 ‘교과서’로 취급받는 작품들이 있습니다. 소설도 마찬가지입니다. 추리소설을 쓰고 싶은 지망생들에게는 위에서 언급한 ‘코난 도일’의 <셜록홈즈 시리즈>와 ‘애거사 크리스티’의 <명탐정 포와로 시리즈>가 비슷한 위상을 가지겠죠. 이후 나오는 작품들이 해당 작품들에서 정립된 서사와 클리셰를 비틀고 부수면서 발전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히 ‘교과서’라는 표현이 과언은 아닐 겁니다.
이번에 읽은 <낭만 선생이 말하길, 그녀가 잃은 것> 또한 이런 과거 작품들에 뿌리를 두고 탄생한 흥미로운 작품이었습니다. 내용도 극히 ‘추리소설’스럽습니다. 마법이 사회로 받아들여진 시대를 제시하며, ‘낭만선생’이라는 기이한 여자가 사건을 풀이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죠. 배경설정이 독특하고, 인물이 독특하지만, 그 바탕에는 우리가 경험해온 익숙한 인물들이 등장하며 사건이 진행됩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 <낭만 선생이 말하길, 그녀가 잃은 것>이 어떻게 과거 작품들을 존중하는지와 더불어, 이 작품이 제시하는 ‘추리극’의 방식을 살펴보고, 더 나아가 지금 추리소설이 나아가고 있는 방향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이후 글에서 보이는 비판은 일개 독자의 주관적인 감상에 불과합니다. 참고 부탁드립니다.
2.『주인공』 분석
관습적으로 ‘소설’이라는 매체를 설명하며 그 구성요소를 ‘인물’ ‘사건’ ‘배경’ 세 가지로 분류하곤 합니다. 세월이 쌓이며 소설이라는 매체 자체가 그 장르를 분류하기 힘들 정도로 세분화된 것도 사실이지만, 결국 서사를 가진 이야기라는 점에서 위의 세 가지는 절대 빠지지 않는 뼈대나 마찬가지입니다.
‘추리소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추리극이라는 틀 안에서는 소설의 삼요소를 다음과 같이 구체화시킬 수 있습니다.
WHO?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은 누구인가? (중심인물)
WHAT? 어떤 사건이 벌어졌는가? (사건배경, 주변인물, 수사과정)
WHY? 왜 그 사건이 벌어졌는가? (동기)
더 세분화하고 대동소이한 의견이 있겠으나, 우선 저는 이렇게 세 가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파트에서는 WHO? 이 소설을 직접적으로 이끌어가는 ‘탐정’ 캐릭터에 대해 분석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탐정 캐릭터란 ‘사건을 직접적으로 해결하는 인물’을 뜻합니다. 바로 작품의 제목에서도 보이는 ‘낭만선생’이 그 주인공입니다.
(P13). … 구불거리는 검은 머리는 덥수룩하게 자라나는 것을 순전히 귀찮다는 이유로 방치해 둔 탓에 허리까지 내려오는데, 멀찍이서 보면 흡사 덩어리진 덩굴이 다리를 달고 걸어 다니는 것처럼 보여서… (이하생략)
(P14). 핏기가 없는 얼굴색이나 뼈대 위에 근육을 생략하고 그대로 살가죽을 발라놓은 듯 수수깡마냥 깡마른 체형… (이하생략)
(P15). … 밑단이 바닥에 끌리는 추리닝 바지에 당장이라도 뜯어질 것 같은 슬리퍼 같은 게 그녀의 트레이드마크다.
첫 회차에서 드러나는 ‘낭만선생’의 외모에 대한 묘사는 가히 충격적입니다. 그녀가 표면적으로도 범상치 않은 기인이라는 것이 느껴질 정도죠. 작가가 제시하는 첫인상을 머릿속으로 힘겹게 그리다보면, 사람보다는 사람의 형상을 한 무언가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추리극에서 등장했던 탐정들이 외모가 추한 경우는 많습니다. 당장 ‘셜록 홈즈’조차도 길쭉한 두상과 매부리코를 가졌으며 무척 깡말랐다고 표현할 정도로 그 외모가 범상치 않은 편입니다. 이런 외모적인 특성은 그 인물이 사회에 어떻게 섞여 있는가를 관찰할 수 있는 좋은 지표입니다. 실제로 ‘셜록 홈즈’는 추리에 필요한 모든 지식을 배제하면서 살아가는 괴짜나 마찬가지였죠.
말 그대로, 이 소설에서 제시하는 탐정 ‘낭만선생’은 사회적 인간상에서 벗어난 기인입니다. 사회적으로 여성스럽다고 할 수 있는 가치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외모로 나서는 데 거리낌이 없으며, 인간을 대하는 태도가 다소 건조하다 못 해 거만한 지점이 보입니다. 그녀가 사용하는 언어 또한 냉소적이며 난폭한 편입니다.
(P35). “설화는 천성이 상냥한 애라서 얌전히 넘어가 준 모양이지만, 난 그 애처럼 온화한 사람이 아니거든. 한 번만 더 이따위 짓을 했다간 이 정도로는 안 끝날 줄 알아.”
(P42). “아픈 애라니, 얘가 말입니까? … 이 정도로 상태가 악화될 정도라면 진작 정신병원에 처넣었어야 할 일이죠.”
본문에서 발췌한 문장은 낭만선생이 용의자를 폭행하고 난 뒤에,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대사입니다. 단 몇 문장만으로도 그녀의 고압적인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합니다.
하지만 그녀가 도덕적 개념이 없는 무뢰한은 아닙니다. 작품은 꾸준히 그녀가 상식적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손님을 맞으며 커피를 권하는 예의도 있으며, 이야기를 끝까지 경청한 후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이는 여유마저 있습니다. 때문에 인간관계(어디까지나 그녀와 친분이 있는 사람에 한해서)도 깔끔한 편입니다. 실제로 그녀와 친분이 있는 이들에게는 박학다식한 언변 덕분인지 호감에 가까운 평가를 듣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친구로 사귀어두면 나쁠 것이 없는 여자’ 정도로 해석될 수 있겠습니다.
(P51). 선생은 대학 시절부터 언변이 뛰어나서 일견 전제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화법에도 듣기에 지루하지 않은데다가, 결론에 이르는 논리가 꽤 독특해서 대화가 상투적이지 않고 즐거웠다. 실제로 최근…(이하생략)
2-1. 컨셉이 지배하는 요즘 탐정들… 『낭만선생』은 어떤가요?
사실 ‘추리소설’이라는 장르가 시대를 타고 발전하면서, 작가들은 끊임없이 자신이 동경해왔던 작품들과 차별성을 갖기 위해 싸워왔습니다. 그중 가장 돋보이는 것이 ‘탐정의 컨셉’입니다. 과거 ‘오귀스트 뒤팽’ 같은 다소 캐릭터성이 희미했던 장르가 ‘셜록홈즈’라는 캐릭터로 인해 ‘탐정’의 이미지를 정립했다면, 지금 추리소설은 이렇게 정립된 탐정의 이미지를 어떻게 변주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21세기에 들어 등장한 탐정 캐릭터를 살펴보면, 그 컨셉 자체가 작품의 컨셉과 연결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카와 마나부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 물리학자 교수
–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초현실적인 현상을 물리학의 관점에서 밝혀낸다.
쿠죠 사쿠라코 (사쿠라코 씨의 발밑에는 시체가 묻혀 있다) – 골격표본을 만드는 표본사
– 유골의 상태만을 보고 단서를 찾아낸다.
야가미 타카유키 (저지 아이스 시리즈) – 전직 변호사
– 사설탐정으로 움직이며 야쿠자들이 지배하는 세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낭만선생’의 컨셉은 ‘선생님(teacher)’으로 해석됩니다. 교수, 연구자 등 다양한 언어로 표현될 수 있겠지만, 누군가에게 지식을 전수하고 가르쳐준다는 컨셉은 우리가 아는 ‘선생님’의 캐릭터에 부합합니다. 때문에 서사 자체도 ‘낭만선생’이 직접 움직이며 사건을 해결한다기보다는, 그녀가 갖고 있는 지식을 바탕으로 주변인을 이끌어준다는 느낌에 가깝습니다.
다소 냉소적이고 모르는 타인을 대하는 태도가 건조하다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기본적으로 ‘선생님’은 타인입니다. 일부 제한된 시기 동안 선생과 학생이라는 관계를 맺고 지식과 삶의 방식을 전수받을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서류가 없는 계약의 형태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에는 선생님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제자들이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많은 것을 책임져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P77). 노골적으로 혀를 차면서 불쾌한 기색을 표한 낭만 선생은 약간이지만 분명하게 언성을 높이면서 그렇게 선언했다. …(중간생략) “… 야말로 체포돼야 마땅한 사람이란 말입니다.”
앞선 글에서 그녀가 거만하고 냉소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옳고그름을 무시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본인이 추구하는 기준은 선이 흔들리지 않을 만큼 분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정을 타지 않은 교사의 모습이 겹쳐보여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 컨셉 자체가 조금 희미하다는 건 사실입니다. 흔히 모든 사건을 경청하고 제자리에서 풀이를 제시하는 탐정을 ‘안락의자탐정’이라는 컨셉으로 설명하곤 하는데, 낭만선생은 제자리에서 경청하는 것을 넘어 모든 가정을 배제한 채 자신의 지식에 의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녀가 이 소설에서 가장 유능하다는 것을 제시하는 과정이 될 수도 있지만, 흔히 가설의 검증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지식과 사례만을 곁들며 결론을 제시하는 방식은, 그녀를 컨셉에 비해 너무 거대한 존재로 묘사하는 감이 있었습니다.
컨셉에 비해 너무 거대한 존재로 묘사한다?
냉정히 말하자면, 탐정 캐릭터들 중에 지식이 부족한 경우가 드문 편입니다. 오히려 한 분야에서 만큼은 교수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만큼 지식을 뽐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그렇기에 그 지식을 특정분야로 한정시켜, 그 탐정의 컨셉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낭만선생이라는 캐릭터는 그 지식이 너무 방대하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소설을 전부 읽고 나면, 낭만선생은 ‘외모가 기이하고 성격이 이상한 여자’라는 표면적인 컨셉이 더 크게 다가오곤 합니다.
그렇기에 독자들은 그녀가 ‘마법’이라는 분야에 발을 걸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곤 합니다. 하지만 당장 이 소설에서는 ‘마법’을 배제하는 것과 더불어, 이 사건은 절대적인 현실성에 기반 한다며 선을 긋고 시작합니다. 마법사가 인간의 관점으로 사건을 풀이한다는 컨셉은 흥미롭지만, 막상 그 관점이 여느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 또한 아쉬운 점입니다.
3.『사건』 분석
사건은 1년 전 ‘혜명’이라는 여학생의 실종사건을 제시하며 시작합니다. 행방불명되었던 그녀는 살점이 남지 않은 유체로 발견되고, 본격적으로 이것이 평범한 실종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P24) … 시신은 등산로 한복판에서 발견되었는데…(중간생략)…신기한 마음에 들어 땅을 조금 파헤쳐보니 그것은 돌부리나 나무뿌리 같은 것이 아니라 사람의 두개골이었다는 이야기다.
이 사건이 본격적으로 기이해지는 것은, 피해자에게 얽혀 있는 다양한 인물들의 증언과 행동입니다.
다정 – 학교에서 혜명을 괴롭히던 주동자였으나, 어느 날부터 혜명이 자신을 해치러 올지도 모른다며 등교를 거부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혜명은 사망해서 유체로 발견된 지 오래였다.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다는 걸까?
재서 – 혜명과 마음을 나누는 몇 안 되는 친구였다. 그녀는 혜명과 함께 학기를 보내던 중, 갑작스럽게 눈앞에서 사라지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가 증언했던 시기에는 이미 실종상태였다. 그녀는 이미 사라졌던 혜명과 함께 교실에 있었다는 뜻일까?
혜명의 모친 – 혜명이 실종된 이후 떠들썩하게 소란을 피웠던 것에 비해, 수사가 종결되자 미련을 뗀 듯 잠적해버렸다. 하지만 경찰은 그녀가 피해자와 모녀 관계라는 것을 고려해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정말 실종된 딸에게 보일 수 있는 태도일까?
간략하게 용의자와 증언, 그리고 작중에서 제시하는 의문들을 정리해봤습니다. 의도적으로 흥미를 자극하기 위한 두 학생의 증언을 배제하면, 현실적으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모친의 행적입니다. 다소 초현실적인 상황을 가정하고 있는 두 학생에 비하면, 그녀가 하는 행동은 딸을 걱정하는 부모로부터 떠올릴 수 있는 관습적인 이미지에 무척 모순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시체가 제법 오랜 시간이 흘러서 백골이 된 유체가 된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것을 생각하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시체를 숨겼고, 그것이 모종의 이유로 등산로까지 떠내려 와 사람들에게 발견되었다는 추측도 가능합니다.
위 내용은 이 사건이 현실에 기반하고 있다는 가정으로 집중하는 요소들입니다. 하지만 이 추리극에서 집중하고픈 부분은 앞에 제시된 두 학생의 사정입니다. 한쪽은 죽은 피해자에게 목숨을 위협받는다는 이유로 폐인이 되었으며, 다른 학생은 이미 실종되었던 학생과 함께 교실에서 지냈다는 믿기 어려운 진술을 내놓습니다.
이 지극히 초현실적인 증언들은 마법에 정통한 ‘낭만선생’에게 사건을 의뢰하는 시발점이 되고 있습니다. 즉, 두 학생의 이야기가 아니었으면 낭만선생이 이 사건과 연결된 접점이 없었다는 말도 되겠죠. 하지만 낭만선생은 이 모든 사건을 ‘마법이 아닌 사람으로 인해 벌어진 일’로 가정하며 의견을 제시합니다. 이 흐름은 그녀가 오히려 사건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는 지점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사실 이 상황에서 많은 것을 유추할 수는 없어도, 누가 이 사건에서 가장 큰 책임을 지고 있는지는 아렴풋하게 보이는 편입니다. 결국 집중하는 건 ‘누가 혜명을 죽였나’를 떠나 ‘누가 그곳에 혜명을 묻었나’로 집중되기 때문입니다. 결말만 놓고 생각하면, 가장 행적이 수상한 사람을 고르면 되는, 보기가 부족한 객관식에 가깝다는 느낌도 듭니다.
이 소설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이 사건이 어떻게 벌어졌나’를 떠나 ‘이 사건이 왜 벌어졌나’에 집중하며 인물들을 파고 든다는 점입니다. 각각의 인물들은 어쩌면 수상하고, 또 어쩌면 난해한 증언으로 추리에 혼동을 일으킵니다. 여기서 작가는 ‘왜 이들은 이런 증언을 할 수밖에 없었나?’를 제시하며 ‘왜 이들은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나’로 이어지는 하나의 흐름을 만드는데 노력합니다.
(P75). “다정 양이 주장했던 대로라면 혜명 양은 원한인지 뭔지 모를 불가사의한 힘으로 되살아났고 지금도 다정 양에게 복수할 기회를 노리면서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어야겠지만, 당연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 (중간생략) … 혜명 양이 실제로 살아났는지 어땠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다정 양이 그렇게 믿었고, 왜 믿게 되었는지가 중요한 겁니다.”
왜? WHY? 이 질문은 형태가 부족하고 색이 부족한 증언들에 모양을 갖추고 빛깔을 입히는 과정으로 다가옵니다. 낭만선생은 그들의 증언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절대적 전제로 제시합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 ‘가능하지 않은 이야기’가 탄생한 인간의 배경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현장에서 물건을 찾고 족적을 검사하는 여느 형사들과 비교하면, 그녀는 보이지 않는 사람의 정신과 심리에 집중하고 있던 셈입니다.
이런 인물을 파고드는 방식은 추리극 이상으로, 하나의 서사로서 완성도가 높다는 인상을 줍니다. 다만 추리적인 관점으로 보자면 다소 호불호가 갈리는 흐름도 분명 존재합니다. 제가 소설을 읽으며 고민해 본 지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낭만선생의 시선에 갇힌 이야기
이 소설의 해답이 제시되는 부분은, 모조리 낭만선생의 개인적인 해석으로 진행됩니다. 분명 그녀는 증언에서 보이는 사소한 허점조차 놓치지 않으며, 그 허점이 드러난 배경을 추측하며 해석을 덧붙이는 추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해석 또한 그녀 한 사람의 시선에 갇혀 있다는 것이 눈에 밟히곤 했습니다. 뛰어난 언변으로 주변인을 납득시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을 납득시키는 건 낭만선생이라는 캐릭터에 가까웠습니다.
둘째, 증거의 부재
앞선 이야기와 연동되는 문제점으로, 결국 이 모든 이야기에 현실적인 증거를 제시하기 어렵다는 점도 눈에 띕니다. 물론 목격증언도 증거로 활용되는 시대이고, 낭만선생이 추리로 제시한 피해자의 행적을 조사하면 많은 물적 증거가 발견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피해자가 실종되었다가 유체로 발견된 기간을 생각하면, 그 정도 증거들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도 의아한 지점입니다. 도시혈(盜尸穴)이라는 현 상항에서 검증할 수 없는 증거를 제시하는 것 또한 우연을 가장한 무리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굳이 이 도시혈(盜尸穴)과 같은 소재를 쓰고 싶었다면, 피해자와 도시혈 사이에 모종의 연관성을 제시하거나, 혹은 이 도시혈을 직접 검증하는 이야기가 있었으면 더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셋째, 장애물과 다를 바 없는 인물
이 이야기를 난해하게 만든 것은 두 학생의 증언입니다. 한쪽은 실종된 피해자와 함께 지냈다는 진술로 혼동을 줬고, 다른 한쪽은 죽은 피해자가 살아 돌아왔다는 믿기 힘든 주장을 반복합니다. 후에 이 두 증언이 망상에 가까운 방어기제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적어도 재서의 증언만 제외하더라도 사건은 훨씬 단순화 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이 두 증인에게 진술 이상으로 물적 증거가 나왔다면 사건의 기이함이 가중될 수 있었겠지만, 전부 말뿐인 증언에 불과했기에 듣고 흘려도 그만이라는 인상으로 다가올 때도 있었습니다.
4.『주제』 분석
이 모든 이야기가 ‘혜명’이라는 피해자에게 집중되는 만큼, 작가는 이 피해자의 사정을 조명하는 데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표면적으로 그녀는 학교폭력의 피해자이고, 이용당하는 피해자이며, 결국 목숨을 읽고만 가여운 여고생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소설은 중간마다 그녀를 구원할 기회가 있었다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습니다.
(P79). … 애초에 다정이는 혜명이를 이용해서 부정행위를 저지를 생각이었고, 갑작스런 성적향상의 중간과정을 메우기 위해 스터디에 동참하기로 했으며 …(중간생략)… 전부 혜명이와 그 친구들에게 떠넘겼는데, 그걸 못 견딘 친구들이 전부 떠나가 버려서 결국 혜명이가 혼자 그 애들이 떠맡았던 몫까지 감당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P89). 다음 학기 중간고사에서는 우리 반의 과반수가 부정행위에 가담했다. …(중간생략)… 부정행위 모임에 가담한 인원이 늘어난 만큼 혜명이에게 떠넘겨졌을 과제들도 그만큼 불어났을 테니, 그 사이에 자살하지 않은 게 용한 일이었다. …(중간생략)… 그래서 얼마 뒤에 그 애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내심 다행이라고, 너를 위해서라도 두 번 다시 돌아오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P59). 여러 증언들을 종합해봤을 때 다정 양은 혜명 양에게 저질렀던 폭행이나 착취 등을 감출 생각이 없었거나 그래야 한다는 발상 자체가 없었다고 봐야 해. 자세한 사정은 모르더라도 뭔가 좋지 않은 일을 당하고 있으리라는 짐작은 가능했겠지.
그녀의 선생님은 학급에 부정한 성적조작이 맴돌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함묵합니다. 그 중심에서 혜명이 고통 받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에게 올 책임이 두려워 눈을 피합니다. 가장 가까이서 그녀를 지켜본 어른이, 그녀를 방관하며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P42). “혜명 양이 재서 양의 눈앞에서 사라졌던 건 그녀가 살려달라고 말한 직후였다고 했었죠? 그게 바로 원인이었습니다. 재서 양이 알고 있는 서혜명이라는 배역의 인물은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됐던 거죠.”
재서 또한 혜명을 본모습으로 바라보길 거부합니다. 그녀는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혜명을 비추며, 손길을 내밀어주지 않습니다. 가장 가깝다고 자칭하는 학우의 실태입니다.
(P51). 보통 실종자의 가족이나 지인이라 하면 차라리 죽었다는 확답이라도 해달라며 매달리는 게 정상이다. …(중간생략)… 나는 그들이 어쩐지, 그 애가 죽었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한다기보다는 아까워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P78). “어머님이야말로 체포돼야 마땅한 사람이란 말입니다.”
(P43). “다정 양이나 재서 양, 혜명 양의 어머님이 잃어버린 건 서헤명이라는 개인으로 상징되는 자기 자신이야”
부모 또한 그녀에게 안식처가 되어주지 않았습니다. 모친은 딸을 노골적인 장신구로 취급하며, 자신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그녀를 가꾸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하지만 막상 넝마처럼 망가진 모습으로 나타난 딸을 외면하며, 끝내 죽음으로 내몰기에 이르죠.
이 세상은 크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람도 풍경도 이상도, 오로지 내 각막에 비치는 한 줌의 세상에 불과하죠.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쫓고, 보기 싫은 것들을 내치는 데 주력합니다. 딱 내 눈 안에 담을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세상을 꿈꾸게 되죠. 그 때문에 있는 그대로를 보기보다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그들을 재단하며 살아가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작중의 혜명은 그들의 시선에서 벗어난, 혹은 버려진 인물을 의미합니다.
(P69). 만약 서혜명이라는 아이의 목숨이 본래의 운명보다도 훨씬 질겨서, 하루 정도만 더 이 세상에 머물러 있었더라면 결말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작중의 이 구절은 단순히 혜명이 구조될 수 있었던 시간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 주변인들이 감겨 있던 눈을 뜨고, 혜명이라는 인물을 본질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벌어달라는 의미일 수도 있겠죠.
결국 이 가여운 아이를 죽게 만든 범인이 누구인가요?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인물들 중에 독자들의 얼굴이 없기를 바라며, 이 비루한 감평을 마치겠습니다.
좋은 작품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멋진 작품 활동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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