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만요! 제 모자란 독후감을 읽기 전에 가볍게 기사 하나만 읽고 갈게요.
벌써 4년 전 뉴스입니다. 당시 이 주제에 대해 가벼운 토론이 있던 걸로 기억합니다. 뉴스에서 소개하는 사례는 다음과 같습니다. A씨는 눈사람을 만들며 안에 이물질(?)을 삽입했습니다. 몸통 부위에는 커다란 첼제 양동이를 삽입해 뼈를 만들었고, 얼굴 부위에는 커다란 돌덩이로 모양을 잡았죠.
결국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눈사람을 고의로 걷어찼던 한 행인의 다리가 부러진 것이죠. 행인은 A씨에게 치료비를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A씨는 ‘그저 눈사람 모양을 잡기 위한 장치였을 뿐이다’라며 변명했죠. 이 사례의 결과와는 상관없이, 많은 네티즌들이 다리가 부러진 행인을 조롱하고 비웃었습니다. 오히려 속이 시원하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죠. 현재 사회에 만연한 폭력과 파괴에 대한 반감이 제대로 드러난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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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읽은 <눈사람 안에 들어있는 마음> 또한 이런 반감에서 탄생한 소설이 분명합니다. 사회에서 용인되는, 혹은 용인된다고 여겨지는 폭력과 파괴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아직 성숙하지 못 한 아이의 시선에서 담담한 문체로 풀어갑니다.
고백하자면, 작품의 첫인상이 조금 엉성했던 건 사실입니다. <눈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했던 소설은 책을 찢는 아이들의 사례로 이어지고, 학생들의 징계, 선생님들의 관습적인 훈계 등 사회 전반에 가질 법한 의문들이 두서없이 쏟아지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작가님 본인이 갖고 있는 문제의식이 가공 없이 날것으로 제시되는 것이 여실이 느껴졌고, 그것은 다소 창작된 작품보다는 누군가의 고발글, 혹은 ‘수필’에 가까운 느낌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역설적이게도 이 소설을 ‘수필’처럼 변질시킨 것은, 주인공 ‘서언’이 보여주는 ‘질문’들이었습니다.
작중에서 서언은 기본적으로 의문이 많은 아이입니다. 많은 어른들이 혀를 차고 눈을 피할 법한 사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왜 저럴까?’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며 답을 찾아가죠. 서언의 이런 질문은 다소 사변적인 대사로 등장합니다.
P15. 참다가 가해자에게 울분을 터뜨리면 어째서 피해자도 같은 가해자 취급을 받게 되는지 모르겠다. 가해자가 쌓은 가해의 시간과 피해자가 참은 피해의 시간은 어디로 사라져 버리는데?
P15. 쌍방 과실이라는 말은 왜 그렇게 쉽지? 사람은 경험해야만 타인의 처지가 되어 그 마음을 아는 거라면 가해자의 마음에 쉽게 공감하고 피해자의 마음은 납득하지 못 하던 사람들은 평생 가해만 저질러 왔던 걸까?
P30. 피해자까지 왜 가해자와 같이 그런 교육을 받아야 하는 걸까?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어른들의 말은 틀에 박은 듯 똑같다. 앵무새의 어휘력도 그것보다는 풍부할 것 같았다.
P51. “왜 그랬냐는 말은 제가 아니라 눈사람을 부순 사람들에게 물어보셔야 하는 질문 아닌가요?”
위의 대사들은 직접적으로 의문을 제기하며 주제의식으로 끌고가는 작가님의 노력입니다. 굉장히 직설적이고 사변적인 대사이기도 하죠. 하지만 이런 대사들이 부담스럽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이 모든 것이 ‘서언’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소설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위의 대사가 등장하는 순간만큼은, 마치 모든 장면들이 뒤로 물러나며 목소리만 남는 듯한 착각마저 듭니다. 냉정히 말하자면, 소설 전반에 서언의 목소리가 아닌 작가님의 목소리가 끼어들고 있다는 의미기도 하겠죠.
다만 공감할 수 있는 주제입니다. 분명 여느 독자들은 저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네 말이 맞아’라는 한마디를 중얼거렸을 것이 분명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눈사람 안에 들어 있는 마음>에 담긴 사회의 단면은 ‘무슨 문제 있어?’라는 이기적인 한마디로 무마될 수 있는 그런 폭력의 이미지입니다. 사소하지만 우리 모두가 아파할 수 있는 그런 파괴의 이미지죠.
작품에는 많은 질문들이 담겨 있습니다. 아직 서언은 답을 하지 못 했습니다. 괜찮다면 작가님께서 답을 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하고 싶은 질문은 ‘작품소개’란에 담겨 있었습니다.
타인이 정성 들여 만든 것을 일부러 부수는 사람의 마음에는 대체 어떤 심연이 깃들어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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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답을 안 했던가요?
서두에서 등장한 기사를 기억하시죠? 행인이 눈사람을 걷어찼다가 다리가 부러졌던 웃지 못 할 사건 말입니다. 혹시 행인이 치료비를 받아냈을까 걱정(?)하시는 분이 있다면, 안심하셔도 된다는 말씀드립니다. 눈사람을 만들었던 A씨는 치료비를 물어줄 필요가 없다는 판단을 받아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눈사람으로 사람을 해치겠다는 의도를 입증할 수 없다.
2) 눈사람을 만드는 것 자체는 불법이라고 할 수 없다.
3) 눈사람을 만들었다는 행위와 다리가 부러졌다는 행위 사이에는 인과가 성립하기 힘들다.
그럼 작중의 ‘서언’은 어떨까요? 법대를 졸업한 친구에게 소설 내용을 설명하며 답을 구해봤습니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다음과 같은 답이 돌아왔습니다.
“이 새끼는 좆됐어 ㅎㅎㅎ”
어쩐지 씁쓸하네요. 제가 작년에 찍었던 귀여운 눈오리나 보고 가세요.
눈오리보다 귀여운 건? 더 많은 눈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