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 장인이자 안드로이드인 휘지. 휘지는 전세계를 돌며 서예 퍼포먼스를 하고 그 밖의 시간에는 도장에서 붓글씨를 가르칩니다. 옥은 휘지의 높은 순수도를 유지해 서예 장인으로서 갖춰야할 데이터를 지키고 개선하려는 목적으로 휘지를 관리합니다. 어느날 그들을 찾아온 어린 소녀는 붓글씨를 알려달라고 합니다. 휘지 밑에서 부지런히 수련하던 유리는 새로운 삶을 위해 떠나고 휘지에게 하나의 메세지를 남깁니다. 시드니에서 공연을 하던 휘지는 급격하게 순수도가 떨어지는데… 과연 휘지에게 무슨일이 생긴걸까요.
서예라는 소재를 통해 안드로이드와 인간, 삶의 목표와 인간성에 대해 말해주는 좋은 소설입니다. 글씨를 씀으로써 전달되는 것은 메세지에 포함된 의미 뿐만이 아닌 메세지에 대한 고민, 집중의 순간, 글쓰기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 그리고 그 글이 관람자에게 제공하는 무형의 가치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즉 단순히 글자에 집중하는 것이 아닌, 글자를 쓰는 과정, 글자를 써서 보여주는 것이 중요한 행위라는 것이고 휘지는 그 부분을 그 어떤 인간들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휘지의 고민은 주어진 조건에서 흔들림 없이 붓글씨를 쓸 수 있는 것입니다. 휘지는 항상 항상성, 일관성에 대한 도전을 받습니다. 이야기에서 말하는 장인의 조건은 대부분의 경우 항상성으로 정의됩니다.
반면 옥은 관리자입니다. 옥은 이야기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위치에 있습니다. 옥은 악역의 위치에 있다가도 떠나가는 유리를 향해 심술을 부리는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옥은 철저하게 인간과 안드로이드를 분리합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같이 지낸 휘지보다 몇년 같이 보낸 유리에게 더 마음을 줍니다. 옥의 이름이 프라이하이트, 즉자유라는 것은 일종의 블랙 코미디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유리는 일견 옥의 반대의 위치에 있습니다. 그녀는 인간적이고 교류를 원합니다. 이야기에서 유일하게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을 인지하고 그것을 선택하여 프레임 밖으로 나간 인물입니다. 그녀는 서예, 글쓰기로 이어지는 큰 흐름을 벗어나는 메타적인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본질을 찾습니다. 굳이 휘지에게 보낼 편지가 굳이 붓과 한지가 아니어도 괜찮았을 거라고 말합니다. 또한 유리는 행복을 말합니다. 이 모든것을 조합하면 이 갇혀진 프레임의 밖에 행복이 있고 정해진것, 유지해야 하는 것을 떠나야 행복이 있음을 말합니다. 투명한 유리이자, 단순한 이분법적인 이야기에서 유리되고 분리된 존재입니다. 옥과는 다르게 그녀야말로 자유롭습니다.
휘지를 옥과 유리라는 외부 인자, 인물들을 통해 자신을 인지합니다. 휘지는 서예 장인이 되기 위해 태어나고 관리되었지만 유리를 통해 그런 사명으로부터 유리되고 벗어납니다. 과연 휘지의 행복은 무엇이었을까요? 휘지의 꿈이 전설로 남을 명필을 남기는 것이나 멋진 퍼포먼스 였다면 굳이 바닷속으로 사라질 이유가 없습니다. 휘지는 사라짐을 택함으로써 자유를 택했습니다. 그것이 정말 휘지의 행복이었을까요? 휘지의 유언은 ‘감독관님 행복하세요.’ 였습니다. 그가 원한 것은 감독관의 행복이고, 조금 더 크게 보면 휘지라고 하는 객체가 사라짐으로써 야기되는 일종의 공백 상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데이터는 머신러닝을 통해 개선되고 복제됩니다. 더 좋은 글씨, 더 좋은 퍼포먼스는 언제든지 나올 수 있습니다. 휘지의 행복은 정제되거나 개선되는 것이 아닌 타인이 더 행복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휘지가 없어지자 옥은 다시 붓을 잡습니다. 그게 그를 행복하게 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본부나 조직에서 관리하는 역할을 떠나 행복해지기 위한 고민을 시작했을거라 믿습니다. 이야기는 자유와 희망에 대한 메타포로 가득차 있습니다. 휘지의 소멸이 마냥 가슴 아프지 않은 이유는 그 때문이겠죠.
여러 레퍼런스가 있겠지만 읽으며 ‘애프터 양’이 많이 생각났습니다. 작품에서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대사가 있는데요. ‘자네가 어떤 숲을 걷고 있는데, 숲 길에는 낙엽들이 깔려 있어. 그리고 비가 막 그쳤는데 방금까지 비가 와서 축축해진 길을 자네가 걷고 있는 거지. 그런데 그 모든 느낌이 이 차 한잔에 다 들어있는거야.’ 이 대사가 휘지가 생각하고 있는, 서예라는 행위에 다 담겨 있는 것 같았습니다. 행복에 대해 고민하는 것, 휘지가 글쓰기에 대해 고민하는 그런 내용들은 단순히 이분법적인 분류로 구분되는 것이 아닌 그 과정, 고민, 경험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 아닐까요.
모든 면에서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휘지가 로봇팔을 이용해 붓글씨를 쓰는 장면들은 아이코닉하고 시각적으로 강렬했습니다. 특시 시드니 씬에 대한 묘사는 스케일이 굉장히 크고 임팩트가 커서 흡입력있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작가님의 큰 장점으로 느껴졌습니다. 아쉬웠던 점은 서로 다른 시간대에 발생한 많은 사건들이 조금 섞여 있는 느낌이 있고 발생한 사건들이 휘지에게 주는 의미, 휘지의 생각과 행동을 변화하게 하는 포인트들이 좀 더 명료하게 표현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작가님의 글을 응원하겠습니다.
짧은 리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