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아는 동네, 익숙하게 아는 사람에게 일어난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누군가 천천히 뒤따라가며 찍은 어두운 캠코더 화면으로 들여다보는 듯한 오싹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내가 느낀 이 소설의 큰 매력은 분위기였다. 작가님이 실제 경험을 소설로 써낸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몰입감이 좋았고, 독자가 가진 개별적인 추억에 대한 향수와 이야기가 주는 느낌이 합쳐져서 독특한 체험을 주는 것 같았다.
판매한 문구점 주인도 잘 모르는 이상한 팩 게임의 존재, 팩 게임 안의 숨겨진 다른 규칙, <Red Bastard>라는 게임이 만들어진 배경, 사람들에게 미쳤던 위험한 영향으로 판매 금지 조치가 내려졌음에도 어떻게 된 일인지 한국까지 흘러들어와서 서안과 정수가 함께 했던 추억의 게임이 되었다는 것도 기묘함을 더해주고 있다. (다른 리뷰어께서도 그런 말을 하셨지만 나도 이 게임이 진짜 있는 건 아닌지 검색해 보기도 했다.)
현실적인 배경을 하고 있으면서도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서 주인공의 악몽에 끌려 들어온 것 같기도 했다. 술술 읽혀서 좋았고 서안이 살아있는 존재인지 죽은 사람인지 뚜렷하게 나와있지 않아서 더 섬찟하게 느껴졌다.
가장 무서웠던 장면은 믿었던 친구 정수에게 떠밀려서 서안이 계단으로 굴러떨어지는 장면이었다. 지하실에 갇혀서 느꼈을 끔찍한 공포와 불안에 평생 잊지 못할 흉터로 남았을 것이다.
가정 폭력이라는 상처를 공통점으로 친구가 된 소년들이 유대감을 통해 무력함과 공포를 이겨내길 바랐는데, 장르가 호러라는 것을 잠시 잊고 말았다. 외부 요인에 의해 이들이 맞게 되는 상황이 안타까웠다.
<Red Bastard>의 결말은 한 가지로 딱 떨어지지 않는 것 같다. 이해 가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헤매고 다녔다.
첫째, 서안은 살아있다. 복수를 계획하고 정수를 찾아낸다. 소문에서 폐건물의 죽은 남자 시체를 발견했다고 신고한 또래의 아이는 서안이었다. 서안은 그 일을 겪고 이사를 갔고 정수와 소식이 끊어진다. 게임을 하며 과거를 떠올린 정수는 속죄를 위해 형을 죽인다. 자신을 죽이러 오는 서안을 기다리며 끝나는 결말.
둘째, 형과 형 친구들은 그날 서안을 죽였고 정수는 목격자였다. 또래 남자애가 남자 시체를 발견해서 신고했다는 소문은 정수가 신고했지만 기억 못하는 걸 수도 있다. 정수는 서안의 죽음을 감당하지 못해서 다 잊어버렸고 이 사건의 주범들은 한 명도 처벌받지 않았다. 서안의 실종 혹은 범인이 밝혀지지 않은 의문의 사고사로 끝나버림. 그 후에 서안의 가족이 이사를 갔는데, 정수가 기억을 왜곡해서 서안의 죽음을 모르고 살아왔다면?
서안과 닮은 남자아이가 과거 마지막으로 봤던 모습 그대로 게임기를 들고 있는 걸 정수는 목격한다. 정수의 눈에 자신에게 복수를 하러 온 서안이 자라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이런 장면이 있어서 서안이 죽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정수에게만 보이는 폐건물의 존재도 희한하다. 죽은 서안이 복수를 위해 돌아왔던 걸까? 원한 품고 저주받은 게임을 통해 깨어나 복수했다는 결말. 그럼 고전 게임 싸이트에서 같이 채팅했던 사람은 누구일까? 누구랑 대화했냐고? ㄷㄷ 유령이 게임도 하고 채팅도 했다고? 안경 쓰던 사람이 죽었는데 안경 쓰고 나타났단 소리처럼 들리는데……. 이거 상당히 게임에 집착하는 유령이구먼.
셋째, 서안의 존재는 죄책감에 보았던 환상이었다. 정수는 고전 게임 싸이트에 들어가서 추억의 게임을 하면서 기억이 되살아나기 시작했고 혼자 미쳐서 정신 착란 상태로 형을 죽이고 자살하는 결말. 이 경우에도 실제 서안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넷째, 서안은 안 죽었고 복수하려고 이날만을 기다렸다. 처음 읽을 때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정말 그랬다기엔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지점이 있었다. 인내심이 지나치게 강하다. 이 정도로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면 고전 게임 싸이트에 주인공이 들어올지 안 들어올지 어떻게 알고 긴 세월을 기다릴 수 있었을까? 안 들어오면 영원히 못 만나는데? 차라리 찾아가서 복수를 하거나 전화를 걸어서 니 죄를 깨달으라는 말로 충격을 주는 편이 훨씬 빨랐겠다.
서안은 정수가 미웠으면서도 먼저 자신을 찾아내 주기를 추억에 매달려서 내내 기다렸던 건 아니었을까? 착했던 서안은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정수의 무력함까지 헤아리고 있었고, 사실은 제대로 사과하기만 한다면 다 용서해 주고 싶지 않았을까?
오래 기다렸는데 찾아오지 않았고 고전 게임 싸이트에 들어온 정수를 서안은 바로 알아봤는데 누군지도 모르는 눈치다. 단순히 지나간 추억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걸 알게 된 뒤에, 억눌러 왔던 분노가 터졌을 것이다. 자기 인생은 망했는데 이 놈은 기억도 못 하고 잘 살고 있었다니.
조금 아쉬웠던 점은 형과 주인공에게만 복수를 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정수에게 형 친구들은 타인이고, 보통의 정상적인 가족이었다면 정수와 정수의 친구를 보호해 주었어야 할 형은 그런 친구들과 어울려서 비극의 원인을 만든 주범이었다. 정수는 서안에게 소중한 친구였으니까. 그런 관점에서는 정수와 서안에게 충분히 납득 가능한 복수가 성립되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이대로 끝내기엔 너무 아쉬워서 뒷부분을 상상해 보았다. 나는 서안의 유령과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폐건물이 하울의 움직이는 성처럼 직접 찾아가는 친절한 서비스로 형의 친구들에게도 복수를 감행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이상, 과몰입 독자의 리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