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 Bastard

  • 장르: 호러 | 태그: #아날로그호러 #레트로 #가을맞이호러 #패미콤
  • 평점×108 | 분량: 144매 | 성향:
  • 소개: 추억의 고전 게임이 있나요? 자신만이 알고 있는 추억의 게임은요? 그 게임 속에 담겨진 비밀을 알고 있나요? 더보기

Red Bastard

미리보기

누구나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떠오르는 풍경이 있을 겁니다.

해질 무렵까지 친구들과 타고 다니던 롤러스케이트, 쇠와 나무로 만들어진 미끄럼틀, 문방구 앞의 오락기, 미니카, 다마고치, 백 원 짜리 과자, 패미콤 게임기를 두들기며 화기애애하게 웃던 아이들…. 제가 살던 동네의 특징이라면, 아파트 단지 근처에 버려져 있던 폐건물입니다.

그 건물은 번화가로 가는 길목에 놓인 넓은 공원 한가운데에 있었습니다. 버려진 테니스장 옆에 딸린 사 층짜리 건물이었는데 무슨 의도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백만장자였던 건물 주인이 한순간 재산을 다 잃고 그 안에서 목매달고 자살했다는 소문이 어렴풋하게 들려왔을 뿐이죠.

죽은 거인의 관처럼 양옆으로 기다랗게 뻗은 벽, 회색 페인트로 뒤덮인 표면, 군데군데 덩굴처럼 내려온 칠 벗겨진 흔적, 깨진 유리창, 어두운 그늘에 가려진 내부…. 불길한 붉은 빛으로 물드는 노을 배경으로 그 건물을 오랫동안 노려보고 있으면, 그 안에서 누군가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했습니다. 소꿉친구들은 건물 앞을 지나가다, 창밖으로 고개를 내민 피눈물 흘리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는 식의 이야기를 퍼트렸습니다. 그래서 그럴까요. 중고등학교 형 누나들이 담력 시험을 하는 장소로 주로 쓰였다고 해요. 늦은 저녁 가출 청소년들이 모이는 곳이니 되도록 가까이 하지 말라던 학교 선생님의 충고도 떠오릅니다.

단순히 괴소문 때문에 그 건물이 제 머릿속에 각인됐던 건 아닙니다. 제가 열한 살이 되던 해, 누구도 건물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가설울타리가 세워졌거든요. 건물은 금세 철거되었습니다. 오밤중 누군가 그곳에 발을 잘못 들였다가, 지하층에서 중년 남성의 썩어 가는 시체를 발견했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저와 또래였던 아이가요.

*

불길한 폐건물 이야기를 하려고 오랜만에 블로그에 들어온 건 아닙니다.

혹시 불법 합본 게임팩을 기억하시나요? 짝퉁 패미콤 게임기는요? 요즘 친구들은 잘 모를 수 있겠지만, 저 어릴 때는 집집마다 텔레비전에 게임기를 연결해 온갖 도트 게임을 즐기고는 했습니다. 슈퍼마리오 브라더스, 남극탐험, 봄버맨, 서커스 등이 있었습니다. 불법 합본 게임팩이 모든 아이들이 한 번씩 그 게임을 할 수 있도록 톡톡한 역할을 해줬을 겁니다. 그때는 팩 하나에 수십 가지 게임을 모아두는 게 불법인지도 전혀 인지하지 못했지요.

제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그 게임팩 속에 담겨 있던 한 가지 게임 때문입니다.

불과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머릿속에서 떠올리지 못했던 게임이었습니다. 인터넷에서 만난 어느 유저 덕분에 기억 속에서 건져 올리게 됐지요. 암울한 시기였습니다. 형은 돈도 되지 않는 역사학을 전문적으로 배워보겠다며 대학원에 재학 중이었고, 아버지는 은퇴를 앞두고 무슨 일을 더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죠. 저는 지원서를 넣는 회사마다 족족 떨어지기를 반복했습니다.

늦은 밤 고전 게임을 모아둔 사이트를 들어간 건, 세상 물정 모른 채 게임이나 하던 유년 시절을 조금이라도 붙잡고 싶었던 걸까요. 그 사이트에는 어린 시절 즐기던 오락실 게임과 각종 플래시 게임이 모여 있었습니다. 사이트 자체가 아주 오래돼서 커뮤니티 게시판이 어느 정도 활성화된 곳이었죠. 하지만 사이트가 낡은 만큼, 유저들이 많이 떨어져 나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새벽에는 저만 접속해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 사이트에는 메인 배너 바로 아래,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공개 채팅창이 있습니다. 새벽 네 시가 넘어갈 즈음 우연히 채팅창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누군가의 한마디가 보이더군요. <Red Bastard>라는 고전 게임을 아냐고 묻는 문장이 눈에 띄었죠. 아무리 찾아도 그 게임을 할 수 있는 사이트가 없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때였어요. 유년 시절 심해 아래 감춰둔 과거의 희미한 기억에 닻이 내려진 느낌, 이 기억을 뱃전으로 끌어올리면 확실해질 것만 같은 느낌이 제 머리를 때렸습니다.

그 게임에 대해 알려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죠. 그게 오랫동안 제가 찾던 게임의 이름이었다는 걸요.

*

<Red Bastard>를 플레이하게 된 특별한 사연은 없습니다. 열한 살 때 형과 형의 친구들의 괴롭힘을 피해 문을 잠가 놓고 작은 RGB 텔레비전과 짭퉁 패미콤 게임기를 연결해 오락을 즐기는 것만이 유일한 취미였거든요. 불법 합본팩에는 오백 가지 넘는 게임이 들어있다는 식으로 속여 놓고, 어느 순간부터 색상만 달리해 첫 오십 가지 게임을 반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슈퍼마리오의 옷을 빨간색에서 파란색으로, 1945의 비행기 색을 주황색에서 초록색으로 뒤바꿔 마치 다른 게임인 척 했던 것입니다. 워낙 많은 시간을 오락으로 보낸 저는 사기 수법을 빨리 눈치챘어요. 목록을 쭉쭉 내리며 더 이상 할 게임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즈음이었습니다. 300번 대에 들어서 아무 제목이나 눌러봤는데, 전에 보지 못한 화면이 펼쳐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새로운 게임을 찾아냈다는 기쁨은 잠시였습니다. 게임의 첫 인상은 아주 지루했어요. 몇 가지 알아들을 수 없는 영문 글자가 반복되더니, 도트로 그려진 화사한 저택과 고딕체로 된 영어 제목이 떴지요. 본격적으로 게임이 시작되자 집 안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한 가족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초창기의 포켓몬스터 게임의, 좁은 실내로 들어간 모습을 떠올려 보세요. 탑뷰 시점에 짜리몽땅한 캐릭터들이 조잡하게 그려진 의자에 앉아 있거나 책장 근처에 서 있거나 하지 않습니까. 딱 그런 모습으로 단란한 가족이 묘사되어 있었습니다. 제 캐릭터는 그중 아빠였어요. 딸 둘은 거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는 듯 했고, 아내는 바로 옆에 이어지는 부엌에서 일정한 패턴으로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잠시 뒤 창문에서 머리에 두 개의 뿔이 달린 빨간 형체의 괴물이 나타났습니다. 괴물은 소파에 앉아 있던 딸에게 접근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괴물을 따라가 버튼을 눌렀어요. 제 캐릭터는 망치 같이 생긴 도구를 꺼내 놈의 머리를 내리쳤습니다. 큰 곤충이 밟힌 듯 우지직 소리와 함께 놈은 사방으로 분산되며 사라졌습니다.

게임은 이것의 반복이었습니다. 뿔 달린 빨간 괴물이 가족을 납치하지 못하도록 지켜내는 것이었죠. 처음에는 의욕에 가득 차 플레이했지만, 금방 질리고 말았습니다. 빨간 괴물이 나타나는 방식이 너무 엇비슷했거든요. 다음 스테이지가 나오는 것도 아니었어요. 그저 빨간 괴물이 집 어딘가에 무작위로 나타나면, 그 괴물을 따라가 때려잡는 게 전부였습니다.

그 게임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소름 끼쳤어요. 게임 초반에는 동요를 연상시키는 전자음으로 진행되다가, 빨간 괴물이 나타나고서부터는 음악 연출이 뒤바뀌었지요. 단조로 구성된 화음이 이어졌는데, 괴물의 시시한 출현과는 걸맞지 않게 사람의 심정을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누군가 저를 쳐다보는 느낌이 들어 이따금 주위를 두리번거리기도 했습니다. 사이렌처럼 높은 음이 흘러나오기도 했는데, 마치 고통 받는 아기의 울음소리 같았어요. 보스라도 나오려나보다 긴장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

저는 한동안 그 게임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시 플레이하게 되더군요.

열한 살, 기말고사를 마친 지 얼마 안됐던 날이었어요. 수학 학원에서 돌아왔는데, 아버지가 형을 혼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거실로 들어서니 아버지가 야구방망이를 들고 이제 갓 중학생이 된 형을 엎드려 뻗치게 한 다음 엉덩이를 내리쳤습니다. 아버지는 저를 보더니 이번 학기에도 고생 많았다고 했습니다. 저는 어색하게 인사하고 제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학교 성적표가 도착한 모양이었습니다. 형의 성적은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점점 형편없어졌고, 아버지는 낮아진 성적만큼 야구방망이를 휘둘렀죠. 저는 그런 취급을 당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공부해야 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어요. 아버지가 들어간 안방에서 코골이가 들리자마자, 형이 저를 찾아온다는 겁니다.

형은 제 방을 돌아다니며 시비 거리를 찾았습니다. 무작위로 청소 검사와 숙제 검사를 했죠. 콘센트 사이에 먼지가 왜 이렇게 많이 끼어 있냐, 모레가 숙제 제출하는 날인데 아직도 안 끝냈냐… 그러다 저의 복부와 등판에 주먹을 날렸습니다. 언제부턴가 저는 문을 걸어 잠그고 형이 포기할 때까지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학교에 나설 때 골목길에서 머리채를 잡혔지만요.

그날 그 게임을 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게임 속 가족이 너무 부러워서? 가족을 때리는 아버지가 아니라 지켜줄 아버지가 있으면 싶어서? 모르겠습니다. 다만 앞날의 두려움 때문에 손이 떨려 제가 제대로 플레이를 하지 못했다는 게 기억납니다. 빨간 괴물 놈이 두 딸을 잡아가더니, 이윽고 아내 캐릭터까지 납치해갔지요. 게임 오버 화면이 뜰 줄로만 알았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건 STAGE2라는 글자였습니다.

1탄의 클리어 조건은 괴물이 가족들을 납치해가도록 놔두는 것이었던 겁니다.

*

게임은 훨씬 흥미진진해졌습니다. 스테이지2부터 게임은 탑뷰에서 횡스크롤 시점으로 바뀌었습니다. 주인공은 숲을 헤매고 있었어요. 빛이 한줄기도 들어오지 않는, 어둠이 내린 숲이었지요. 세로로 길게 이어진 배경에는 어둠 속에서 안광을 빛내며 노려보는 듯한 짐승들의 눈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어요. 주인공은 어디서 들고 왔는지 어느새 횃불을 들고 있었습니다. 다른 손에는 커다란 십자가를 쥐고 있었어요. 첫 스테이지에서 망치인 줄로만 알았던 물건이 바로 십자가였던 거예요. 숲은 너무 어두워서 횃불이 허락하는 시야 너머로는 어둑어둑하기만 하더라고요. 길을 걷는 중간중간 땅 속에서 썩어가는 살점이 군데군데 붙은 해골이 나타나 길을 방해했습니다. 십자가를 휘둘러 녀석을 물리치거나, 나무에 매달려 함정을 피해가면서 길을 나아갔습니다. 저는 배경이 오래전 버려진 공동묘지 위에 형성된 숲이라는 걸 직감했습니다. 깊숙이 들어갈수록 해골의 형태는 기괴해졌어요. 내장을 흘리고 다닌다던지, 신체가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가능하지 못한 형태로 뒤틀려 있다던지. 아기 같은 목소리로 주인공을 보면 증오에 찬 목소리로 울부짖는다던지…. 그런데 빨간 괴물놈이 횃불에 비친 빛 사이에 어른거리는 것 아닙니까? 저는 녀석을 따라잡았다 싶어 바로 달려갔어요.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