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오답노트가 아닙니다. 일개 독자의 주관적인 감상에 불과하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Q: 이 작품은 ‘공포소설’입니다. 혹시 ‘공포’에 대해 평가 기준이 있으신가요?
A: 제가 생각하는 ‘공포’는 말이죠…….
‘공포’라는 소재는 친숙하면서도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자극적인 감정 중 하나입니다. 이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당연히 멀리하고 싶은 지점으로 규정하면서도, 그 지점에 가까이 다가가는 법을 연구하며 상품화하는 것이 현대 문화로 자리 잡고 있죠.
하지만 타인의 손으로 그 감정을 건드리는 방식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몇몇 ‘공포’를 전하는 공식이 정립되는 것이 분명하면서도, 그 공식이 만인에게 적용될지도 의문일뿐더러, 그 공식으로 닦아낸 칼로 사람이 가진 가장 불편한 감정을 건드린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 또한 따라옵니다. 때문에 ‘공포’라는 감정을 건드는 방식은 그 형태가 기본적으로 ‘인간적이 공감’에서 규정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현대 작품에서 ‘공포’를 건드리는 공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그 공포의 주체가 현실과 맞닿아 있을 것.
둘째, 혹은 그 공포의 주체와 맞서는 대상이 현실과 맞닿아 있을 것.
제 부족한 말솜씨 때문에 표현이 모호한 것은 죄송합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결국, ‘공포’의 주체와 대상 모두, 우리가 ‘사람’으로서 느낄 수 있는 범위에 걸쳐 있을 때 선명해진다는 의미입니다.
Q: 그래서 이 <개를 키우는 이유>는 어떤가요?
A: 이 작품은…….
먼저 말하자면, 이 소설은 첫 인상이 굉장히 좋았던 작품입니다. 자취하는 여자와 그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꼬마를 등장시키며 긴장감 있는 출발선을 제시했고, 그 꼬마를 바라보는 시선에 얽혀 있던 의문을 하나하나 흘려가며 독자들을 집중시키는 과정을 쌓아가는 것이 엿보였습니다. 전체적인 소설적 기본기와 이야기를 구성하는 뼈대가 무척 튼튼하다는 증거겠죠.
공포의 주체로 등장하는 ‘꼬마’의 존재도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어른을 위협하는 아이라는 이미지는 무척 도발적이었고, 그 존재의 등장이 내 집안 ‘거실’이라는 전개를 제시하며 훌륭한 방점을 찍어주었지요.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이처럼 ‘현실’과 맞닿아 있는 공포에 집중하는 솜씨였습니다. 집안에서 들리는 사소한 기척에도 겁을 먹는 여자를 묘사하는 것과 더불어, 평범한 아이라고 생각했던 소년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비틀린 형태로 나타나는 모든 과정은 결국, 우리가 가장 안전하게 여겨야 할 공간을 침범 당하는 ‘공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느 환상성으로 빠져들며 전개가 엉성해지는 작품들에 비해, 이 소설은 그 주체와 컨셉이 명확하여 쉽게 몰입할 수 있는 셈입니다.
공포의 대상으로 등장하는 아이 또한, 이 현실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아이가 다루는 도구는 쇠막대기 두 짝과 사람을 찌를 수 있는 흉기가 전부이며, 그 아이를 움직이는 욕망 또한 어른을 우습게 보는 자만과 그들을 누르기 위한 오락으로 규정됩니다. 조금 평면적인 욕구에 비판을 덧붙일 수도 있겠으나, 이 주체가 ‘어린아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 평면적이고 직선적인 사고방식 자체를 못 이해할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Q: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아쉬운 점은 없을까요?
A: 결국 아쉬운 점 또한…….
하지만 이 소설에서 드러나는 단점 또한 이 현실성에 담겨 있습니다. 정확히는 이 소설이 뼈대로 삼고 있는 현실성을 그르치는 무언가라고 할 수 있겠죠.
당장 소설에서 눈에 띄는 것은 아이의 ‘말투’입니다. 물론 의도적입니다. 당장 소설소개에 ‘#급식체’라는 태그를 제시한 것만 봐도, 아이의 약올리는 말투는 작가가 의도적으로 잡은 인물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급식체’라는 말투를 정의해보면, 일반적으로 현실에서 쓰이는 말투는 아닙니다. 인터넷으로 통용되고 유행하던 언어에 가깝죠. 이런 말투를 현실에서 사용하는 아이를 떠올리기가 어려운 것을 떠나, 이런 말투의 인물을 제시한 것은 소설이 잡고 있는 현실적인 공감대를 삐걱거리게 만드는 장애물로 작용합니다.
문제는 이 ‘급식체’가 너무 많은 것을 잡아먹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이라는 인물은 사실상 이 말투로 규정되는 성격을 그대로 카피(copy)하고 있으며, 그 말투에서 나올 법한 행동들을 소설에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이 아이라는 캐릭터에 맞춰 말투를 설정한 것이 아닌, 말투를 설정하고 아이의 캐릭터를 만들었다는 것이 너무 자명하다는 것입니다. 앞서 아이의 욕구가 평면적이지만 납득이 간다고 언급했으나, 냉정히 말하면 이 아이는 태생적으로 평면적일 수밖에 없는 악당이라는 쪽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제목에서 등장하는 ‘개’라는 소재 또한 의문이 많았습니다. 자고로 ‘동물’이란 소재는 ‘이성이 없는 도구’입니다. 그 동물 자체를 인간과 닮은 대상으로 묘사하지 않는 이상, 이 ‘동물’이라는 소재가 가지는 역할은 도구에 한하는 것이 일반적이죠.
이 소설에서 ‘개’는 사건을 해결하는 도구입니다. 사건이 절정에 달하는 순간, 갑작스럽게 등장하며 막을 닫아주는 역할을 맡고 있죠. 문제는 이 ‘개’가 주인공의 역할을 빼앗았다는 점에 있습니다. 주인공은 직접적으로 사건에 휘말리는 대상으로 등장하며, 실제로 목숨을 위협 받는 순간에 이릅니다. 사실상 소설은 ‘주인공이 이 사건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 셈입니다.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사건을 마무리한 것은 무대 바깥에서 뛰어든 ‘개’ 한 마리이기 때문이죠. 그 과정에는 어떤 개입도 없습니다. 사실상 주인공이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해결될 수 있었던 사건임이 자명하죠. 결국 주인공의 ‘나도 개 한 마리 키워야겠다’라며 제목을 되새기는 과정 또한 그녀의 안도감만을 제시할 뿐, 어떤 소설적 맺음으로 보기에는 미묘한 감이 있습니다.
Q: 잡소리 그만하고 결론을 내려주세요. 이 소설은 재밌나요?
A: 네! 재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재밌습니다. 전개가 선명하고, 사건이 명확하며, 주인공의 시선을 쫓아가는 과정들이 ‘공포’를 건드리며 흥미를 자극합니다. 다만 아이의 설정과 별개로 작가가 잡아놓은 컨셉이 너무 과한 탓에 사람보다는 어떤 괴이로 보이는 감이 있으며, 소설 자체의 맺음이 엉성하여 하나의 사건보다는 소란으로 여겨지는 감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누군가는 이 모든 것들을 조금 열화 된 <사탄의 인형>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그 단물을 빼먹는 데 후회가 없는 소설이라 생각합니다.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