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착각해버렸다. 오래 전에 진산 작가의 단편을 읽으려고 <성리학 펑크 2077>을 도서관에서 빌렸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 단편이 조선 배경인 줄 알았다. 막상 ‘오랜만에 감상이나 써볼까’하고 다시 책을 펼쳤더니 웬걸 그냥 시기 미상의 중국을 배경으로 한 무협이었다.
단편이 묶인 책 제목이 <성리학 펑크 2077>이 아닌가. 나는 이게 <기기인 도로>와 같은 시리즈로 묶여 나온 조선 스팀펑크 단편집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저 <성리학 펑크 2077>이라는 표제작을 중심으로 한 단편집이었던 모양이다.
뭐, 상관 없다. <협탐 – 고양이는 없다>는 충분히 만족스럽게 한국적인 무협이었으므로.
대다수의 장르 문학 출판사들은 자기들이 내는 작품에 ‘한국적’ ‘한국형’ 그 외 아무튼 ‘한국’ 어쩌고를 못 붙여서 안달이기 마련이다. 작가들이나 매니아 독자들은 그런 세태에 분통을 터뜨리고는 한다. 아니, 왜 그런 거 찾느냐고들 말이다. 굳이 그럴 필요 있느냐고. 촌스럽지 않느냐고.
문제는 나는 거기에 대해 오래 골몰해 온 작가라는 것이다. 닐 게이먼의 <신들의 전쟁>을 보라. 원제는 <미국인 신들(American Gods)>로 전세계의 신적 존재들이 미국으로 이민 와서 현 시대의 가치관을 상징하는 새로운 신들과 전쟁을 벌인다는 내용이다.
나는 이 작품을 보고 미국이 부러워서 죽는 줄 알았다. 속된 말로 배알이 꼴리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스스로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여기에는 킬링 포인트가 있는데, 정작 닐 게이먼은 영국인이다. 아, 이쯤 되면 질투에 눈이 멀어버린다. 지들은 <스타워즈>니 그래픽 노블이니 하는 거 다 가졌으면서 이제는 지나가던 영국인까지 그런 걸 해준다고? 니들끼리 잘 먹고 잘 살아라, 이것들아.
정작 <신들의 전쟁>을 읽었던 그때는 이 질투의 이유를 잘 알지 못했다. 그때는 장편은 커녕 단편 몇 자, 아니 에세이조차 적기 버거웠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장편 하나를 마무리해가는 이제야, 왜 ‘한국 어쩌고’에 대한 수식어를 다들 못 달아서 안달인지 이해가 가기 시작한다.
다들 한국 액션 영화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최근에 필자는 <전, 란> 정도를 재밌게 봤다. <베테랑 2>를 보려고 벼르고 있긴 하지만, 필자의 월급날 직전에 극장에서 내려갈 전망이다. 그 외에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보려고도 생각하고 있다.
최근에야 한국 영화가 <기생충>이 칸에서 상도 타오고 여기저기 국제 영화제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지마는, 다들 이게 뚝 떨어진 게 아니라는 걸 기억해야 한다. 기술, 학문 그리고 예술마저도 과거의 무언가를 레퍼런스 삼아서 성장하는 것들이니까.
예컨대 마동석이나 황정민이 주먹질 하나 발차기 하나 날리는 데에도 그 기저에는 충분한 양의 레퍼런스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범죄도시> <베테랑> 이전에 <팔도 사나이>나 <죽엄의 다리>가 있었고, <장군의 아들>이 있었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도 그 전에 충분한 양의 ‘만주 웨스턴’이 없었더라면 나오기 힘들었을 터.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이를 읽어주는 독자들도 존재해야 한다는 것. 필요가 없는 작품은 공허할 뿐이다. 그러나 독자들은 왜 이를 필요로 하는가? 한국 액션 영화를 회고한 에세이에서 오승욱은 말한다. ‘그래도 우리 말을 하는 주인공에서 친근감을 느꼈던 모양이다’라고. 이 에세이들을 묶은 에세이집 이름도 <한국 액션영화>다.
그러면 그 친근감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신토불이(身土不二)라서? 국뽕 좀 마시고 싶어서? 예술도 ‘자쓰가리우것든만가리우’하자는 건가? 브나로드 운동을 폄훼할 생각이 없음을 미리 알린다. 자립성을 가지는 데 생산성만큼 중요한 건 없으므로.
단순하다.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눈도 있고 귀도 있으나 입이 없다. 혹자는 이 개념에 ‘서발턴(Subaltern)’이라는 개념을 떠올릴지도 모르겠으나, 필자는 거기에 대해 이름 정도만 들어봤을 뿐 안토니오 그람시의 책을 읽어본 적이 없음을 말해 둔다.
그렇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입이 없다. 입이 허용되지 않는다. 뭔 소리냐고 할지 모르겠다. 아, 다들 알면서 왜 이러느냐. 이 글 업로드 날이 평일일텐데, 지금 읽고 계신 독자분들 하루 몇 시간 일하다 오셨느냐고 물어보고 싶다. 취준생이라면 깊은 유감을 표하겠다. 그리고 그 취직 하느라 학교 얼마나 열심히 다니셨느냐고, 학교 졸업하고도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셨느냐고 물어보고 싶다.
일평균은 9시부터 18시. 9시간 정도일 것이다. 여기서 아르바이트나 재택 등 환경이 특수하다면, 혹은 사장이 쌍욕 처먹어 마땅할 금수라면 조금 달라질 것이다.
우리는 유치원,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천천히 회사 생활하는데 길들여진다. 지금 고등학생들이 야자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필자는 야자도 했고 등하교 시간, 조례 시간까지 다 합친다면 12시간이 넘는다. 수능 치고 나면 여기서 한번 인생이 갈리고, 다들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진다.
그러다 취업 준비할 때쯤 되서 사람은 심각한 자괴감에 빠진다. “아, 나는 평생 취직도 못하는 쓰레기 새끼구나.” 이걸 극복 못하는 순간, SNS니 갤러리니 뭐니 하는 곳에서 빌빌거리면서 입이며 손끝이며 욕을 달고 사는 인간쓰레기가 되어버린다. 그래, 인셀 말이다. 입이 없어도 비명은 질러야 사람이 살 것 같은데 말이다.
이걸 극복하는 사소한 방법은 뒤쫓아갈 뭔가를 찾아내는 것이다. 없어도 추락하고, 썩은 동아줄을 잡아도 추락한다. 대체로 두 가지는 연결되어 있다. 사람이 한 병 2000원도 안하는 쓰레기같은 희석식 소주 붙잡고 “응. 너넨 술맛을 몰라서 그래. 난 소주가 달달하다.” 하듯이 말이다. 그 끝은 분명 알코올 중독과 뇌졸중인데도 말이다.
원래 성리학(性理學)은, 유학(儒學)은 이런 ‘목표’를 제공하는 학문이었다. ‘수기치인(修己治人)’을 통해 ‘군자(君子)’로 거듭날 것.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란 반쯤 농담 섞어 ‘스스로를 수양하여 아이돌로 거듭나면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뜻이다. 크리스트교나 신도와는 내용이 다르다. 아무도 누군가의 죄를 사해주지 않는다. 그러니, 너 스스로 군자가 되어라. 그리고 군자가 되기 위한 방법을 ‘예(禮)’로서 알려준다.
이미 쇠해버린 성리학적인 ‘예’를 현대에 다시 끌어오는 것은 무리수다. 애초에, 수양을 한다고 모두가 ‘군자’가 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질문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군자’란 무엇이었느냐고.
답은 <킹덤 오브 헤븐>의 명대사로 대신하겠다. “아무것도 아니다, 모든 것이기도 하고!”
잡소리가 길었다. <협탐 – 고양이는 없다>(이하 <협탐>)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자. <협탐>을 왜 내가 조선 배경으로 착각한 것일까. 물론 <성리학 펑크 2077>이라는 표제작 때문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협탐>은, 아니 무협은 무엇보다도 민중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르이므로. 그리고 민중에게 추구할 ‘군자’의 이미지를 ‘협객’으로서 제시하므로.
김용이 무협을 쓰기 이전부터 무협은 민중서사였다. 김용 본인의 작품도 대다수는 ‘신문 연재’였다. 무협을 받아들인 국내에서조차 PC 통신, 대여점 등에서 독자와 함께 수많은 레퍼런스를 축적해가며 성장했다.
그 과정에서 ‘한국적 무협’에 대한 시도 또한 분명히 있었다. 안병도의 <본국검법>이나 일부 연구자들은 <퇴마록>을 방계로 치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 와서 굳이 한국의 역사전기적 요소를 끌어와서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알맹이다. 마치 이영도가 <드래곤 라자>를 썼을 때 이것이 전혀 다른 서양의 중세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들 적어도 이제와서는 ‘한국적’인 것으로 여기듯 말이다.
한국적이라는 것은 소재주의적인 것도 아니고, 국뽕도 아니다. 그저 ‘한국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말한다. 대중예술이라는 것은 독자를 전제로 한 핑퐁이다. 한국에서 한국인을 상대로 대중예술을 한다는 것은 입이 없는 대다수 한국 사람들에게 볼 거리를 제공한다는 것이고, 나아가 쫓을 거리를 제공한다는 일이다.
늦었지만 자백하자. <협탐>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쓰는 감상은 아니다.
<협탐>은 서부극으로 치면 <셰인> 같은 작품이다. 심지어 플롯 구조조차 비슷하다. 협객이 자기가 사는 마을에서 사건 하나를 해결하고 다른 곳으로 간다. 오히려 밋밋할 정도의 기본적인 플롯이지만, 진산은 특유의 가벼운 문체와 매니악하지 않은, 종이책 단편 독자에게 딱 맞는 서술 방식으로 무협을 재밌게 풀어낸다.
그럼에도 이 작품에 대해 굳이 한국적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오히려 너무나도 무협적이기에, 한국적이다. 쫓아야 할 이치가 가치관으로서 존재하고, ‘무협’이라는 현상이 있다. 그리고 이를 작가의 작품이라는 의미로 꿰뚫는다. 이는 성리학이고, 저항적이다. 그러므로 ‘성리학 펑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