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을 돌이켜보면 나는 나름 말을 잘 듣는 아이였던 것 같다. 착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말을 듣지 않았을 때 일어날 일들을 별로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마지못해 그랬던 것 같다. 가끔씩 상상을 해본다. 내가 만약 그 순간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땠을지. 여기저기서 ‘가만히 있으라.’ 고 말하니까 나 역시도 순순히 그 말을 듣고 있지는 않았을까. 배가 기울어지고 바닷물이 점점 차오르는데도 가만히 있지 않았을까. 하나 둘 늘어가는 울음소리와 절규로 채워지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역시나 가만히 있지 않았을까. 갑자기 숨이 턱 막혀온다. 잠깐의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히고 또 이렇게 무섭고 아픈데, 그들은, 그들은 어땠을까…….
갑자기 무슨 이야기냐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읍혈(泣血)>을 처음 읽었을 때는 나도 그랬으니까. 분명 작품 소개를 보면 “귀신을 보는 ‘나’는 흡혈귀와 함께 산다. 판타지를 쓴다는 흡혈귀는 뒤주에 갇힌 세자를 모티브로 한 소설을 쓴다.” 라고 나와 있는데, 그러니까 흡혈귀가 등장하는 판타지 소설에 사도세자의 이야기가 좀 더해지는 이야기겠지 싶었는데 말이다. 누가 봐도 그렇지 않은가?! 누구라도 그저 그렇게 가벼운 생각으로, 아니 어쩌면 아무런 생각도 없이 읽지 않았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이게 갑자기 뭔가 싶은 생각이 들게 되겠지만 말이다. <읍혈(泣血)>은 그렇게 전혀 예상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날(?!)의 그 상황 속으로 들어가게 만들었다. 그렇다. <읍혈(泣血)>은 2014년 4월의 그날을 이야기한다.
<읍혈(泣血)>은 그날을 이야기하기 이전에 우선은 ‘나’와 ‘흡혈귀 남편’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기관장을 대신해서 이런저런 글을 쓰는, 기관장의 고스트라이터이고, 흡혈귀인 남편은 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이야기로 글을 쓰려는 소설가이다. 뭔가 비슷한듯하면서도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은 ‘나’와 ‘흡혈귀 남편’의 결합(?!)은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조차도 쉽사리 이해하기 힘들게 느껴질 만큼 낯설게 다가왔다.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이 갑자기 왜 나오는 것인지, 솔직히 어렵게만 느껴졌다. 조금은 불친절한, 그런 시작이었다. 그럼에도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혹은 그 끝에서 뭐가 있을까 싶은 궁금증에 계속해서 작품에 몰입하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혼란이자 아픔, 고통 등이 그날의 기억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시작의 낯섦은 공감으로 바뀌어져 갔다.
‘내’가 사는 곳은 죽음이 짙게 깔리고 전체가 장례식장이 되어버린 도시이다. 누구보다도 그 일이 더 피부에 와 닿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누구도 기억하지 않아도 괜찮은 삶을 사는 ‘나’ 같은 사람이 죽었어야 했는데, 아직 더 살아야 할 아이들이 죽었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 생각이 심해져서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폐소공포증 같은 것들도 얻었을 것이고, 환청과 환각에도 시달렸을 것이다. 물론 자살시도도 했을 거고……. 그러면서도 글을 쓰는 ‘나’이기에 뭔가를 글로 표현하고 싶다는 강한 본능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이내 다시 글은 써서 뭐하나 싶기도 했었을 것이고, 또 다시 그러다가도 그렇다고 쓰지 않는 나는 왜 살아야 할까, 등의 결코 답이 없을 것만 같은 생각들만을 수없이 반복했을 것이다. 그리고 수없이도 눈물을 흘리며 울었을 것이다. 그렇게 ‘읍혈’을 하다가, ‘흡혈’을 불러내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기왕이면 소설 쓰는 흡혈귀로다가 말이다.
<읍혈(泣血)>에는 다양한 귀신(?!)이 나오지만 그것은 귀신이기 이전에 또 다른 인격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했다. 자신에게 혹은 다른 이에게 붙은 귀신을 본다는 것은 나의-혹은 타인의- 또 다른 모습을 잘 알고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보통 우리가 바라보는 모습과는 반대에 있는 숨은 모습 같은 것들을 말이다. 그렇게 나를-혹은 타인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으며 그만큼 이해를 하고 있다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러니까 ‘귀신을 볼 줄 몰라서 무서움을 모른다는 것’은 자신만을 안다는 것이기도 하면서 타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다.
어쨌거나 나를 잘 안다는 것은, 나의 부족함도 잘 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실은 ‘나’는 글을 써야하는데 도저히 그럴 용기가 없어서 억지로 짜낸 용기로 흡혈귀를 만들어 낸 것은 아니었을까 싶은 것이다. 결국, 흡혈귀의 모습으로 글을 쓰고 있는 ‘나’만 존재하는 것이다. 단순히 사도 세자의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들을 통해서 절묘하게 그날의 일이 떠오르게 한다는 사실을 보면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글의 퇴고와 함께 흡혈귀와 작별, 혹은 하나 됨은 글을 쓰는 이는 역시 글로 인해 위로와 일종의 치유를 받는다는 또 다른 표현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민감한 이야기이기에 그만큼 조심스럽게 다가설 수밖에 없지만, 이렇게도 그날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생각에 감탄이 들었다. 조심스럽게 다루는 것 같다가도 필요할 때는 확실히 소리치고, 때로는 조롱도 서슴지 않는 모습이 놀라웠다. 더군다나 다분히 개인적인 문제라고 여겨지는 부분에서부터 적폐라고 불릴만한 사회 구조적 문제까지 짚고 넘어가면서 말이다. 특히나 누군지 알 수 있는 인물들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지만 조금만 관심 있게 보면 다 보이도록 해놓는 치밀함이랄까 정교함 같은 것은 글 자체를 재미있고 반짝반짝 빛나게 만들어준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최고로 생각되는 것은, 어설프게 위로하려고 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단순한 위로보다는 공감이 우선한다고 할까?! 비록 공감이 누군가에게는 우울증과 같은 증상으로 나타나기도 하겠지만, 그런 공감에서 시작되어 결국에는 치유까지 이어진다는-현실에서는 아직 소망에 머무를지라도…- 사실이 그저 좋게만 느껴졌다.
<읍혈(泣血)>은 상당히 밀도가 높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 번에 읽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글을 읽다가도 여러 번 멈춰 서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글이 좋지 않아서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길로 빠져버리게 만든다는 뜻이 아니라, 몇몇 단어만으로 혹은 몇 문장만으로도 어떤 기억이랄까, 공감 같은 것을 불러일으켜 그 속에 아예 빠져서 허우적거리게 만드는 것이다. 독자들은 그 허우적거림 속에서 저마다의 길을 생각하고 또 고민하게 되지 않을까?! 글을 쓰는 이는 역시나 글로 위로하고 치유하듯, 저마다의 방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이런 미약한 허우적거림의 다양함이 하나로 뭉쳐서 ‘가만히 있으라.’에 대적할 수 있는 힘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드넓은 광장을 꽉 채운 사람들의 손안에 있는 도깨비불이 배를 끌어올리고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가듯이 말이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작품 속에 품고 있는 많은 것들에서도 그렇듯 하고 싶은 이야기는 너무나도 많지만 -어쩌면 너무 당연해서 하지 못하는 것 일수도 있겠지만- 더 이상의 무슨 말이 필요할까 싶은 생각이 든다. 그저 가만히 있지만은 않겠다는 생각, 그리고 이미 많은 이들이 보여준 그와 같은 행동에 작은 힘이라도 불어넣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져보며, 이 작품도 그와 함께하리라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