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위대한 발명품들 중 하나가 바로 언어다. 언어가 발명되었기에 인류는 복잡한 지식을 후세에 전달할 수 있었고, 한 세대가 쌓아올린 지식은 다음 세대가 발전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어 주었다. 이렇게 축적되는 지식들은 문명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언어에는 명백한 한계 또한 존재한다. 언어는 단어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단어들은 모두 각자 대응되는 뜻을 가지고 있다.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고 있는 단어들을 이용하여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뜻하는 바를 전달할 수 있다. 따라서 언어란 단어들에 대한 사회 구성원들의 합의가 있어야만 제대로 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만약 듣는 이가 말하는 이가 사용하는 단어의 뜻을 모른다면 의사소통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다. 돌멩이처럼 주변에 흔히 존재하는 것들의 경우에는 비교적 간단하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직접 들고 가서 돌멩이를 보여 주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이것을 돌멩이라고 부르자고 약속하면 되는 것이다. 그 이후 사람들은 돌멩이를 직접 가리키지 않더라도 돌멩이라는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럴만한 형편이 되지 않는다면 비슷한 대상을 이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평원에서 일생을 보내 한 번도 바다를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바다에 대해 설명할 경우, 호수를 보여 주며 아주 큰 호수를 상상해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비유를 사용할 경우 완벽한 의사소통은 불가능해진다. 대상에 대해 직접 바다라는 단어를 대응시킨 것이 아니라 커다란 호수에 바다라는 단어를 대응시켰으므로 서로 이해한 바가 다를 수밖에 없다.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앞서 돌멩이에 대해 논했던 것 또한 완벽하지 않은 논의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돌멩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크기는 어느 정도인가, 모양은 어느 정도인가, 강도는 어느 정도인가 등 수많은 질문들을 할 수 있다. 그러한 모든 종류의 돌멩이들에 대해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대응시키려고 한다면 무한히 많은 단어를 만들어내야 할 것이며, 그렇게 만들어진 무수히 많은 단어들을 듣는 이에게 모두 이해시켜야만 의사소통이 가능해진다. 이렇게 체계가 복잡해지면 더 이상 제대로 된 언어로써의 기능을 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언어는 유한한 수의 단어만을 가질 수밖에 없고, 그러한 단어들을 이용하여 만들어진 언어는 객관적이지 못하고 대략적일 수밖에 없다. 수식어 여러개를 이용하여 교집합들을 줄여나가면 보다 더 정확한 의미 전달은 가능해지겠지만 말하는 이가 듣는 이에게 자신이 뜻하는 바를 언어를 이용하여 완벽하게 정확히 전달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서로간의 합의를 통해 단어의 뜻을 설정하는 사회 구성원들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계속 변화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죽고, 또 태어난다. 또한 사람들은 한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이동한다. 처음에는 같은 대상을 가리켰던 단어가 사회가 분화되면서 다른 뜻을 가질 수 있고, 이 경우 다른 사회 집단에 속해 있는 사람들 간의 의사소통은 어려워진다.
이러한 이유로 몇몇 대상들은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된다. 서로 뜻을 공유하는 단어들에는 대응되지 않고, 알고 있는 한 줌의 단어들로는 설명할 수도 없는 이미지들은 인간의 머릿속에 갇힌 채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 이미지를 머릿속에 담고 있던 인간이 사회를 떠날 경우, 그 이미지는 그 사람과 함께 사회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린다. 한 개인이 이러한 사실을 깨달았을 때, 죽음에 대한 추상적 공포는 자신의 소중한 기억들이 전달되지 못한 채로 자신과 함께 모두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현실적인 두려움으로 바뀐다. 이러한 이미지를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머릿속에 존재하는 이미지의 원본이 되었던 대상을 다른 사람에게 경험시키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언어와 단어에 대한 지금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하여 이 소설에서 할아버지가 의사소통을 위해 시도하려고 했던 일들을 처음부터 살펴보자.
“저 뒷산에는 커다란 고양이가 산단다.”
‘고양이’와 ‘커다란’이라는 단어는 할아버지와 ‘나’ 모두 뜻을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이 둘을 합쳤을 때 떠올리는 대상은 할아버지와 ‘나’에게는 다를 것이다. 바다를 ‘커다란 호수’라고 설명하는 것과 같다. 바다를 제대로 설명하기에 ‘커다란 호수’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을뿐더러 충분하지도 않다.
“내가 어릴 적에….. 저 산에서 호랑이만한 고양이를 보았어.”
할아버지는 비유를 사용하여 자신이 보았던 것이 무엇인지를 ‘나’에게 전달하려고 하고 있다. 이미지는 보다 명료해졌으나 여전히 충분하지 않다. 직접 그 대상을 놓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할아버지와 ‘나’ 모두 상대가 머릿속에 떠올린 이미지가 무엇인지를 알 수 없으며,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네가 그걸 못 믿는 거 같으니 내일 나와 함께 저 뒷산에 가자꾸나……”
결국 언어를 이용한 의사소통에 실패한 할아버지는 그 대상을 직접 ‘나’에게 경험시킴으로써 이미지를 전달해주려고 한다.
“옛날에는 뱀딸기가 많았지. 요즘은 뱀딸기도 없어. 그래서 고양이도 어디론가 가버린 모양이구나.”
하지만 그 대상을 찾을 수 없다면 의사소통을 위한 마지막 시도 또한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보고 싶었는데 아쉽구나.”
결국 이미지는 의사소통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지 못한 채로 할아버지의 머릿속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언어의 형태로 설명되지 못한 지식은 그 사람이 떠남과 함께 사라져버린다. 다음에 누군가가 그 대상을 발견하고, 머릿속에 그 이미지를 새길 때까지 그 지식은 사회에서 사라져 버릴 것이다. 글의 마지막 부분을 인용하고 리뷰를 마치겠다.
느린 걸음을 반보씩 쫓았다. 수풀이 흔들린다. 숲으로 이어지는 들판의 끝자락에 뱀딸기가 피어오른다.